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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블로그는 잉여의 블로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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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블로그는 주로 책에 관하여 다루고 있지만, 다른 분야도 애기할 수도 있습니다.

저는 잉여입니다.

JHALOFF에 대한 발음은 정해진 것이 없습니다. 쟐롭, 쟐로프, 자알로프 등등 원하시는데로 부르시면 됩니다.


사실 JHALOFF란 아이디엔 별다른 의미가 없습니다. 그저 러시아사람처럼 보이게 만든 글자들의 나열입니다.
물론 각각의 글자엔 의미가 있지만, 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하겠습니다.


오도예프스키, <살라맨더> 外 - 러시아 고딕 문학 기원


오도예프스키는 꽤나 미묘한 작가다. 
그는 러시아 문학에서 푸슈킨 세대의 작가이며 한때 러시아의 괴테나 러시아 파우스트로 불리었고, 그의 몇몇 작품들은 특히 도스토예프스키의 <우스운 자의 꿈>이나 <보보크>에 영향을 주며 러시아 문학에도 꽤나 영향을 남긴다.

다만, 그는 사후 묻히며 20세기에야 재발굴되며 러시아 문학의 거장 중 하나로 자리잡는다.

물론 국내에도 오도예프스키의 대표 장편 <러시아의 밤>이 을유에 번역되어있지만, 이 작품 자체는 개인적으로 그럭저럭이었다. 나쁘진 않지만, 그다지 끌리진 않는 그런 작품일까?

그러나 오도예프스키의 진정한 면목은 그의 중단편들, 특히 러시아 고딕 문학의 중심에 선 작품들에 있다고 본다.

이 감상은 오도예프스키의 러시아 고딕 단편 영역집에 대한 감상이자 제발 지만지든 어느 출판사에서 그의 대표 고딕 중단편집을 출간하기를 염원하며 쓴 글이다.


<러시아의 밤>에서도 그렇지만, 오도예프스키의 주된 테마는 ‘이원론’이다. 

단순히 물질과 정신의 대비라고 할 순 없다.

물론 이러한 대비가 나타나긴 한다.

가령, 그의 단편 <누구도 모르는 이에게 속한 죽은 시신의 이야기> 가 있다.

이 이야기는 한 가상의 마을에서의 관리의 이야기인데, 어느 날 마을에서 신원미상의 시신이 발견된다.

시체안치소에서 보관하던 중 어느 날 이를 관리하는 관리 앞에, 보이지도, 어느 공간에 위치하지도 않은 정신이 찾아와, 그것이 자신의 몸이며 돌려주기를 간청한다.

그는 자신이 잠시 쉬기 위하여 육신에서 떠났음에도 실수로 육신을 잃어버렸다며, 자신이 육신이 없으므로 관리에게 대신 시신을 가져간다는 문서에 서명할 것을 간청한다.

이 과정에서 관리는 공간을 차지할 수 없는 정신의 증언의 모순을 깨닫고 그에게 항의하나, 끝내 단편은 이 모든 것이 단순히 환상인지, 아니면 현실인지 모호한 답을 둔 채 오도예프스키의 이원론을 장식한다.

이러한 이원론은 오도예프스키를 뒤따른다. 그가 그의 가장 긴 중편 <살라맨더>를 2부로 구성한 것조차 이러한 이원론적인 맥락이며, 대부분의 그의 고딕 단편들이 그렇듯, 이것이 실제인지, 아니면 환상, 혹은 망상인지의 모호한 여지를 준다는 점에서 그의 특징이 드러난다.

<살아있는 시체>에서도 한 관리가 자신이 죽은 이후 일어나는 광경들을 목격하며 후회하면서도 끝끝내 이 모든 것이 꿈이라고 생각하며 같은 실수를 반복할 거란 암시나,

<실프>에서 외딴 곳에서 연금술 실험을 반복하던 중, ‘실프’를 목격하지만, 이것이 과연 광기의 현상인지, 아니면 진실로 연금술의 정령을 목격한 것인지 제3자의 서신으로 처리하면서 여지를 남겨두는 것.

이것이 오도예프스키의 고딕 세계다.

오도예프스키의 가장 큰 매력은 이러한 애매모하함과 더불어, 신비주의를 결합시키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의 대표 중편 <코스모라마>에서도, 주인공이 유년 시절 즐겨 보던 장난감, 기괴한 파노라마를 보여주는 ‘코스모라마’라 불리는 장난감을 통해 본 미래의 일상과 여러 상반되는 이원론적인 인물들을 통한 투쟁 - <코스모라마>는 보르헤스의 <알레프>와 유사한 단편이다.

그의 가장 긴 중편 <살라맨더>에서 1부에선 핀란드 무녀와 불의 정령이 결합을, 그리고 2부에선 그 불의 정령을 연금술의 살라맨더와 결부시키며 신비주의 모호한 해석으로 나아가는 점은 그가 한때 러시아의 괴테라 불린 것이 이해될 만큼 여러 당대의 해박한 지식들을 조합한 소설가란 점을 알 수 있다.

특히 <살라맨더>는 그 자체로 너무나도 뛰어난 단편이다.

2부로 구성된 이 중편은 본디 단편에 단편이 덧붙여진 형태다.

1부에선 푸슈킨이 묘사한 표트르 대제의 흑인 병사(푸슈킨의 외할아버지)처럼, 핀란드 출신이지만, 러시아에 귀화하는 이에 대한 이야기를 다룬다.

그는 핀란드에서 핀란드 무녀와 미래를 약속하며, 러시아화된 이후, 그녀와 만나며, 끝끝내 기쁜 마음으로 그녀를 놓아주며 신비주의적 구원에 이른다.

그러나 2부에선 정반대로, 이러한 희극과 달리, 같은 주인공으로 하여금 정반대의 몰락을 다룬다.

샐러맨더 같은 연금술과 야생의 핀란드 주술을 결합시키면서도, 동시에 이러한 기록이 100여년 후의 후대인들이 이야기함으로서 과연 진실일지 의문을 품게 만드는 모호함까지.

구질구질하게 설명할 필요가 있을까.

물론 <러시아의 밤>도 그 자체론 나쁘지 않은 작품이다.

다만, 이 러시아 고딕과 SF의 시초를 소개할 더 많은 중단편집들이 소개되기를 기원할 뿐이다.
(오도예프스키는 여러 러시아 SF의 시초로 불리는 SF 단편들을 쓰기도 했다)

지그지문트 흐르지자노프스키, <문자 살인자 클럽> -순수한 이해를 위해 독서일기-소설



<규정의 5항에 따라, 이 종이 원고에겐 사형이 선고됩니다. 잉크 흘리는 일 없이. 이의 있습니까?>



한때 수많은 책들을 가진 이는 가난을 이기지 못하고 소중한 책들을 팔아치운다.

빈 책장을 보면서 그는 자신이 읽었던 책들을 하나하나, 보다 명료하게 다시 상상하고, 이해한다. 그리고 깨닫는다. 존재하지 않는 머릿속의 책이 오히려 진실되며, 물질로 된 책, 문자로 기록된 이야기들이야말로 오히려 방해꾼이란 점을.


흐르지자노프스키의 기괴한 중편 <문자 살인자 클럽>은 이처럼 순수한 이해에 도달하기 위하여 문자들을 없애려는 이들의 모임을 다루는 이야기다.

토요일마다, 기억 연구에 쓰이는 무의미 철자들로 이루어진, 다스. 티드. 제즈 등의 무의미한 이름들을 가진 이들이 모여선, 제마다 원고 없는 기괴한 이야기들을 들려준다. 원고가 있을 경우, 규정의 5항에 따라, 문자들을 담은 종이 원고들은 사형선고를 받아 소각된다. 그러고 나선 문자들을 사라진다.


각자의 이야기를 들려주는 형식 자체는 고전적이나 이들이 들려주는 이야기는 저마다 흐르지자노프스키의 이야기에 익숙한 독자들이라면 알법한 기괴한 이야기들이다. 

죽은 로마인이 저승의 강을 건너는 이야기나, 기계로 된 세상 속에서 육신과 영혼의 이야기, 혹은 햄릿을 연기하기 위하여 햄릿 속 조연 로젠크란츠와 길덴스턴의 '길덴'과 '스턴'이 분열되어 무대 위 정해진 배역과 그걸 연기하는 이야기 등

때론 희곡 같은 실험적인 형식을 통해 순수한 이해에 도달하려는 미치광이들의 이야기들을 문자 살인자들은 읊조린다. 말들을....말들을....


칸트적, 혹은 순수한 철학적인 의미에서 실체에 도달하려는 기괴한 이들에 관한 이야기는 흐르지자노프스키의 주된 소재 중 하나다. 팔뒷꿈치를 핥는 묘기를 통하여 칸트의 물자체에 도달하려는 이야기 등으로 주제는 되풀이되지만, 무엇보다 이 소설은 '중편'이란 점에서, 그리고 데카메론 등의 형식처럼 여러 다양한 모습이 이야기들을 들려준다는 점에서 더욱 독특하다.


거기에 더하여, 마치 형식 자체로 주제를 보여주듯, 희곡 형식으로 적힌 원고를 읽던 이가 클럽의 규정에 따라 원고가 소각된 후, 어쩔 수 없이 문자 없는 말을 통하여 남은 이야기를 들려줄 때, 소설의 형식으로 돌아가는 등의 모습을 통하여 형식적인 면모에서도 더더욱 즐거움을 준다.


원고들과 문자들이 소각된 후, 무엇이 남을 것인가? 저자의 표현처럼 말들과 말들....그리고 삶이 여전히 있을 뿐이다.







지그지문트 흐르지자노프스키, <미래의 기억들>外 - 죽느냐 잠드느냐 독서일기-소설


(짤은 검색해서 누군가가 잘 찍은 표지)





지그지문트 흐르지자노프스키는 한국에서도 생소하지만, 사실 러시아에서조차 살아생전 거의 발표를 하지 않았고, 죽은지 수십년이 흐른 1980년대에서야 조금씩 알려지기 시작한 작가이므로 여러모로 생소한 작가지만, 분명 고골의 정통 후계자이자 러시아의 또다른 기괴한 작가이므로 기회가 된다면 읽을만한 가치는 충분할 것이다.



물론 굳이 지금 시점에서 이 감상을 끄적이는 것은 2달 정도 후에 그의 새로운 단편선집이 영역본으로 나올 예정이고, 영미권에서 그의 5번째 소설집이 소개되는 시점을 앞두고 있는 지금, 국내 출판사들 중 누군가가 그를 국내에 소개하기를 기원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흐르지자노프스키의 영역본들에 수록된 번역자들의 서문에 따르면, 무엇보다 눈여겨볼만한 점은 그가 청소년 시절 칸트의 <순수이성 비판>을 읽고, 큰 충격을 받았으며 '나'와 'not-나'의 경계가 무너지는 혼란을 겪었다는 대목이다.



청소년 시기에 칸트를 읽었다는 점에서 이미 충분히 미치광이라고 할 수 있지만, 어린 시절 큰 트라우마 덕분인지, 그의 작품 세계에서 사실 칸트적 체계는 빼놓을 수 없는 요소긴 하다. 당장, 그의 작품들 중엔 칸트의 물자체에 도달하려는 팔 뒷꿈치 핥는 서커스 묘기꾼의 이야기도 있으며, 이야기할 <이성의 13번째 범주> 같은 경우도 있으니까.



다만, 그의 작품 체계들을, 적어도 내가 읽은 범주 내에서 정리하자면, 크게 두 부류로 나눌 수 있을 듯 하다. 첫번째는 역시 순수한 광기, 혹은 칸트적인 요소가 깔려있는 작품들. 말 그대로 보르헤스를 연상하듯, 그러한 지적 놀음이나 기괴함 등이 대부분을 차지하는 부류다. 다만, 두번째 부류는 이번에 이야기할 단편들과 연관이 깊다. 



흐르지자노프스키는 소비에트 러시아에서 살던 이였으며, 그의 소심함과 숙청되는 작가들로 인한 두려움으로 대부분의 작품을 발표하지 않았다. 물론 그가 용기를 내어 작품을 발표했더라면, 그 또한 다른 동료들과 함께 굴라그 여행을 갔을 가능성은 높다. 두번째 부류는 이러한 소련과 스탈린 지배에 대한 공포와 풍자적 요소가 강한 부류니까.



그리고 <미래의 기억들>을 비롯한 이 선집의 단편들 또한 이러한 2번째 부류에 속하는 기괴한 이야기들이다. (물론 그렇다고 칸트나 기타 기괴한 보르헤스적 요소들이 없는 것은 아니다)



웰스의 <타임머신>을 대놓고 비트는 <미래의 기억들>처럼, '시간 절단기'를 개발하여 혼돈의 러시아 혁명 시기와 '확정되지 않는 미래'로 여행을 떠나기도 하는 표제작인 중편 <미래의 기억들>처럼 은근히 비트는 이야기에서부터, 대놓고 소비에트엔 '논리'가 존재하지 않는다며 기괴한 철학적 요설들을 내뱉는 이들과 조우하지만, '논리'가 존재하지 않기에 그들과 동조할 수 없는 <붉은 눈>처럼 직접적인 공격 등 그 범위는 다양하다.



물론 흐르지노프스키가 단순한 풍자로 머물렀다면, 오늘날 재평가되는 위치를 가지진 못했을 것이다.



소비에트의 비좁고 폐쇄적인 아파트들을 풍자하는 것처럼 보이면서도, 수수께끼의 쿼드라투린 물질을 바를 경우, 실수로 '무한정' 확장되는 방에서 오는 역설적인 폐쇄적 공포를 그리는 <쿼트라투린>처럼, 그 또한 대가들이 그러하듯, 현실에서 소재를 얻지만, 거기에서 머물지 않는다.



우리에게는 이미 보르헤스가 있고, 또 카프카가 있지만, 왜 굳이 흐르지자노프스키가 필요할까?



그가 단순히 러시아의 보르헤스, 혹은 카프카라는 연구자들의 칭호 때문예? 



사실 이러한 명칭은 그를 잘 모르는 이들을 향한 홍보에 가깝지만, 말 그대로 홍보 문구에 불과하다.





자신의 장례식 등을 참석하기 위해 되살아나는 시체와 부활을 부정하기에 반-종교 위원회 소환을 외치는 소비에트의 이야기를 그리는 <이성의 13번째 범주>나 모든 것이 거꾸로이기에, 꿈 속 이야기를 그리며, '사느냐 죽느냐' 대신 '죽느냐 잠드느냐'를 외치며 현실을 꿈으로 대체하기 위해 꿈들의 반란을 그리는 <분기선>처럼 





모든 걸 거꾸로 뒤집으면서도 자신만의 기이한 체계 하에서 리얼하게 그리는 흐르지자노프스키는 흐르지자노프스키다.



물론 동시대적으로 카프카 등과 같은 작가들이 출현한 것은 일종의 시대정신일지도 모른다.



역자의 썰처럼, 흐르지자노프스키는 말년에야 처음으로 카프카를 알고, 읽었는데, 동질감을 느껴 놀랐다고 한다.







그가 놀랐듯, 이 폴란드계 우크라이나 출생의 기묘한 러시아 작가를 조만간 한국어로도 만나봐야하지 않을까?


로렌스 (2) <호저의 죽음에 대한 명상>, 혹은 왕관 프로젝트-D.H. 로렌스


<사람은 말이든, 어떤 동물이든 파괴할 수 있다>
- <호저의 죽음에 대한 명상>, D.H. 로렌스



<호저의 죽음에 대한 명상>과 일련의 산문들은 D.H. 로렌스의 중후기 산문들의 모음집으로 1925년에 출간되었고, 몇몇 산문들은 그의 대표적인 산문이기도 하다. 물론 '대표적'이란 것은 그의 문제적인 산문들을 의미할지도 모른다.

흔히 국내의 로렌스에 대한 소개에서 자연으로의 회복 등이 강조되지만, 사실 이러한 부분에 대한 해설은 조금 부족한 듯싶다. 요즘과도 같은 자연 보존이나 동물 보호, 혹은 자연친화적인 운동과 달리, 로렌스는 오히려 철저하게 인간의 위계를 긍정한다. 아니, 그에게 있어 모든 것은 투쟁이자 곧 삶이며 이러한 정점은 인간, 아니, 자기 자신이다.

그가 외치는 자연으로의 회복은 아마도 약육강식이 그대로 존재하는 날 것으로의 자연으로의 회복에 가까울 것이다.


그는 부분적으론 동시기 작가들과 사상가들이 그러하듯 니체의 영향을 받았고, 또한 헤라클레이토스의 영향을 받았다. 그는 철저하게 이분법적이며 이원론적이다. (아이러니하게도 그에게 헤라클레이토스 같은 고대 철학자를 소개한 이는 헤라클레이토스 같은 이를 증오하는 러셀이었다)

성과 속이 나뉘고, 삶과 죽음이 나뉘고, 남성과 여성이 나뉘고 인간과 자연은 나뉜다. 

그러나 그의 체계 아래에서 이러한 분리된 이원론은 끝없이 결합과 결별을 반복한다. 마치 그가 스스로 상징으로 삼았던 불사조처럼, 죽음과 태어남을 반복하는 불사조처럼, 끝없는 투쟁 속에서 성과 속은 합쳐지고, 남성성과 여성성은 결합하고, 다시 분리됨을 반복한다.

이러한 그의 체계가 가장 잘 드러나는 것은 역시 이 산문집에 수록된 그의 대표작 <왕관>이다.

앨리스에서도 인용된 동요 <사자와 유니콘>처럼, 왕관을 두고 사자와 유니콘은 끝없이 투쟁한다. 그러나 어느 한 쪽의 완전한 승리로 끝나선 안 된다. 사자든, 유니콘이든 그들의 목적은 투쟁을 하기 위함이며 상대가 사라지는 것은 자기자신의 무의미로 이어진다. 왕관은 더는 중요하지 않다. 처음에 왕관을 두고 투쟁이 시작되었을지라도, 투쟁 자체가 중요할 뿐, 왕관은 더는 중요하지 않다.

1차 대전에 관한 글을 쓰려는 동료들과의 프로젝트에서 로렌스가 이러한 다소 늘어질 정도로 반복되는 이 수수께끼 같은 글을 쓴 것은 참으로 의미심장하다.,


그렇다면 이러한 끝없는 투쟁은 대체 어디로 향하는가?

물론 로렌스는 전문적인 철학자가 아니라, 철저한 문학가였고, 그의 산문들은 문학적으론 즐겁게 읽힐지언정, 때론 흥분과 격정으로 가득한 소음처럼 느껴지기에 엄밀한 논리체계를 기대하긴 어렵다.

그렇지만 그는 자신의, 아니 그의 체계 안에서 가장 중요한 걸 언제나 외치므로 그 답은 쉽게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니체가 외쳤듯, 로렌스 또한 결국 '삶'을 외친다.

그에게 있어 성적인 욕망을 표현하는 것은 중요한 일이었지만, 이조차도 사실 삶에 대한 도구적인 이용에 가깝다. 

북미 농장 생활을 하며 누구나 증오하는 호저를 끝내 사냥하고 이를 통한 명상을 하는 그는 식물보다 동물에게 더 '활기'가 있으며, 동물보다 사람에게 더 활기가 있기에, 이러한 파괴 행위를 종국적으로 긍정하며 오히려 이러한 투쟁들을 삶의 회복을 위한 길이란 명상의 답을 얻는다.



사실 이러한 그의 과도기적인 면모를 보면, 그에 대한 지난 수십 년간 이루어진 비판들이 허공에서 생겨난 것은 아니란 걸 느낄 수 있다.

몇몇 산문에선 그는 영국의 정치 생활에 염증을 느끼고, 대중에게 회의감을 느끼며 많은 모더니스트들이 겪는 거대한 힘과 지도자에 대한 갈망을 은근히 드러내기도 한다.

기독교로 삶의 활기를 잃어버린 낡은 유럽의 죽음을 원하고, 이를 대체할 수단으로 투쟁이 넘치는 아즈텍 신앙 등의 복권과 대체를 통하여 '재생'을 꿈꾸는 모습 또한 사실 오늘날 일반적인 독자의 시선으로 완전히 받아들이긴 어렵다.


물론 이러한 로렌스의 변화 자체는 그가 죽을 때까지 끝없이 이어졌으므로, <호저의 죽음에 대한 명상> 등으로 온전히 그를 파악하는 것은 부분만을 보는 일이긴 하다.

다만, 로렌스의 체계를 읽다보면, 그가 일컫는 모든 것, 남성이든 여성이든 하나하나가 어떤 실체가 아니라, 상징들처럼 느껴지는 경향이 없지 않아 있다. 적어도 그의 작품 세계들을 이해하는데 좋은 길잡이가 되어줄 것은 분명하다. 

특히, <왕관> 등의 경우는, 오히려 그의 <미국 문학 강의> 같은 도구적으로 자신의 체계를 설파하는 책보다 조금 더 직설적으로 로렌스의 체계의 기초를 살필 수 있으며, 무엇보다 그의 글 자체는 취향에 맞는다면 그 자체로도 즐겁다.


물론 나는 개인적으로 아직까지도 내가 로렌스의 글을 좋아하는 것인지, 아닌지는 확답을 내릴 수 없다.

사실, 아즈텍 신앙의 복권을 꿈꾸는 그의 악명 높은 <날개 달린 뱀>이나, 가장 문제적일 단편 <말을 타고 떠난 여인> 등을 읽다보면, 그의 생각에 대한 본능적인 거부감이 들면서도, 글 자체로서 사람을 감탄하게 하는 이중적인 면모가 있다.


이러한 생각에 대한 확신을 찾기 위해 다시 로렌스를 한 권 씩 천천히 읽고 있지만, 일단 끝까지 가봐도 답을 내릴지는 모르겠다. 사실, 왕관은 중요하지 않을지 모른다. 끝없이 죽음과 삶을 반복하듯, 로렌스와의 투쟁을 멈추지 않는 것이 로렌스가 원하는 로렌스 읽기일지도 모른다.



*사실 로렌스 산문 입문용은 아니다. 차라리 미국 문학 강의 등이 나을 것이다.
**절판이지만, 놀랍게도 국내에도 번역이 된 적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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