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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HALOFF에 대한 발음은 정해진 것이 없습니다. 쟐롭, 쟐로프, 자알로프 등등 원하시는데로 부르시면 됩니다.


사실 JHALOFF란 아이디엔 별다른 의미가 없습니다. 그저 러시아사람처럼 보이게 만든 글자들의 나열입니다.
물론 각각의 글자엔 의미가 있지만, 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하겠습니다.


콘래드 (5) <비밀요원> - 테러리즘의 악령 프로젝트- 조지프 콘래드



조지프 콘래드의 대중적으로 가장 널리 알려진 작품은 <암흑의 심연>과 같은 해양-모험 소설이겠지만, 콘래드는 폴란드 독립운동가의 아들로 태어나 정치적으로 고향에서 도망친 망명자였고, 폴란드의 존재와 더불어 정치에도 늘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는 이방인이었다. 그의 또다른 대표작 <비밀요원>은 이러한 그의 정치소설 중 하나다.

소설은 당시 혼란스런 유럽의 혁명가들과 테러리즘에 관한 이야기이다. 아나키스트 단체에 '비밀요원'으로 잠입하여 폭탄 테러 활동을 벌이려는 비밀 요원 벌록과 그의 아내 위니의 이야기는 오늘날 스파이소설의 효시로도 충분히 그 가치를 지니겠지만, 무엇보다도 그 진가는 인간군상의 묘사에 있다.

콘래드의 정치 소설에 속하는 소설에 <노스트로모>, <비밀 요원>과 <서구인의 시선으로>, 이렇게 세 편 정도를 언급할 수 있을 텐데, 뒤의 2편은 아이러니하게도 그가 그리도 싫어하는 슬라브주의의 사도 도스토예프스키를 연상하지 않을 수 없다. <죄와 벌>의 콘래드만의 비평 소설이라 할 수 있는 <서구인의 시선으로> 뿐만 아니라, 이 <비밀요원>은 도스토예프스키의 가장 정치적인 프로파간다 소설 <악령>을 연상케 한다.

이는 어쩌면 도스토예프스키가 악의적으로 묘사하면서도, 그 암울한 미래를 암시하는 혁명가들의 조직이나 콘래드가 묘사하는 아나키즘 조직과 그들을 교묘하게 이용하려는 자들의 모습이 겹쳐보여서 더욱 그러하는지도 모른다.
콘래드의 정치적 성향을 판단하기는 매우 미묘한 문제인데, 그는 영국 정치에선 다소 보수적인 모습을 보이면서도 폴란드 문제 등의 해외 문제에선 진보적인 경향을 보이고, 민주주의를 중요시 여기면서도 대중의 어리석음을 경계하는 엘리트적 모습도 보이고 또한 냉소적이고 니힐해보이면서도 희망을 완전히 놓지 않는다. 
이런 점은 그가 묘사하는 테러 조직과 그를 둘러싼 권력 구도에서도 나타난다. 이들이 말하는 점에선 분명 테러리스트들의 활동에 대한 현대적인 고찰도 존재하면서도 비판적인 모습이 없지도 않다. (물론 저 슬라브주의의 화신인 표도르의 악의적인 조롱과는 다르다)

이 소설에서 무엇보다 흥미로운 것은 그 내러티브다. 콘래드는 고뇌하는 작가들이 그러하듯, 평생을 새로운 내러티브를 찾아 고뇌하였고, 이 <비밀요원>에서도 그런 점이 잘 나타난다.
소설은 주인공 벌록이 폭탄 테러 임무를 받은 후, 그 과정을 시간에 따라 보여주지 않고, 마치 폭탄이 평온한 일상에서 어느 순간 터져버리듯, 이미 테러가 일어난 이후로 장면을 전환하여 그 사이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를 독자의 흥미를 유발하며 진행시킨다.
스파이와 테러에 관한 소설이지만, 이 책의 분량에서 사실 '생각보다' 그런 장면은 아주 크진 않다. 콘래드는 마치 '아나키스트'들을 그리듯, 개인의 내면으로 시선을 옮긴다. 이 책은 무엇보다도 냉혹한 콘래드의 세계 속을 살아가는 진흙 같은 인간 군상을 그려낸다. 저마다 속고 있는 자들이 자신의 그릇된 믿음 덕분에 파멸하고, 사라지는 그런 군상.
주인공 벌록의 경우, 무엇보다도 안개 같은 인물이다. 그는 기계적이고, 때론 가족을 아끼는 듯 보이면서도, 냉혹하게 그 가족을 이용한다. 그러면서도 그는 가족만은 자신을 진실로 이해할 것이란 오만함을 보이며 파멸한다. 
위니의 경우는 다르면서도 비슷하다. 그녀는 남편의 위장을 모른 채 일상을 살아간다. 그러나 폭탄이 터진 이후, 그녀의 삶은 바뀌고, 그녀를 둘러싼 장막은 거두어지며 그녀는 공포, 말 그대로 테러의 위협을 겪게 된다. 어쩌면 마지막으로 시도한 사람을 향한 믿음에서조차 배신당한 채 그녀 또한 씁쓸하게 사라진다.

(이러한 부부의 서로를 향한 믿음과 오만함이 신기루였음을 깨닫고, 파멸하는 모습은 그의 초기 단편 <귀환>을 연상케 한다)

언제 폭탄이 터질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러기 전까지 그저 일상을 살아간다. 때론 그것이 완전히 거짓일 수도 있고, 오만함일 수도 있음에도, 과연 그걸 벗어날 방법은 있는가? 안타깝게도 소설은 침묵한다. 글로써 답할 수 없다는 듯.


p.s. 폭탄과 혁명조직 등과 관련하여 안드레이 벨르이의 <페테르부르크>와도 함께 읽어도 좋을 것이다. 꽤나 흥미로운 비교가 될 수 있다.

H.D. (1) <헤르메스적 정의> - 한 헤르메스주의자의 개인적 합일 프로젝트-H.D.


역시나 이번에도 너무나도 늦었지만, 이제서야 H.D.에 관하여 써본다. 하지만 거꾸로 생각해보면, 원래 거물은 처음이나 마지막에 등장하지 않는가? 고로 난 늦은 게 아니라, 제때에 H.D. 에 관하여 써보는 거다.

H.D.는 물론 그녀의 필명으로 힐다 두리틀의 이니셜이다. 혹시라도 그녀의 책을 주문하려면, 힐다 두리틀로 검색하는 걸 추천한다. 불행하게도 그녀의 필명만으론 겹치는 이니셜들 덕분에 찾기가 힘들다. 

아무튼 H.D. 또한 영미 모더니즘의 거인 중 한 명이다. 끼리끼리 논다고, 그녀가 교류했던 모더니즘 인사들을 살펴보자 - 에즈라 파운드(H.D.의 필명 탄생과 연관이 깊으며 대학시절 연인이었다 친구로 쭉 지냈다), D.H. 로렌스, 매리언 무어, 예이츠, 브라이허 등등 목록은 장장하다.

그녀의 초기 시는 이미지즘 앤솔로지에 포함될 만큼 대표적인 이미지스트 시인이었지만, 소설 등도 많이 집필하였고, 많은 모더니즘 시인들이 그러하듯 후기엔 <삼부작>, <이집트의 헬레네> 같은 서사시를 쓰기도 하였다. 무엇보다도 양성애자였고 브라이허 같은 연인과도 사귀었으며 이러한 자신의 성향에 관한 고뇌 및 자전적인 이야기들 또한 소설로서 우리에게 많이 남겨주었다. 모더니스트들에 관한 회고록도 물론 있다. 하지만 오늘 이야기할 것은 그녀의 마지막 시집인 <헤르메스적 정의 Hermetic Definition>이다.

<헤르메스적 정의>는 세 편의 장시로 구성되어있는데, 각각 <헤르메스적 정의>, <예지>, <겨울 사랑>이 그것이다. 제목에서 알다시피 헤르메스주의와도 연관이 깊다. H.D.의 경우, 역시 그녀의 동료들처럼 신화와 신비주의에 관심을 가지며 이러한 것들을 자신의 삶과 융합하여 자신의 시 세계로 삼는다. 그러한 경향이 훨씬 두드러지는 것이 그녀의 후기 시집들이며 <헤르메스적 정의>는 그러한 기나긴 세계의 종지부를 찍는 그런 작품이다.    

시기적으로 먼저 쓰인 <예지>의 경우, 공습에서 살아남은 독일 여자를 화자 삼아 그녀의 트라우마와 전쟁의 공포, 그리고 신비주의적 의식을 통한 안식에 관한 시다. 그러나 신비주의적 의식인만큼 외부보단 내면에 집중되며 미네르바의 올빼미가 날아가는 것으로 상징되는 안식에 집중한다. 어떤 의미에서 이 장시는 신비를 목격하고 기록하는 성인의 기록담과도 같다. 이 작품과 직접적으로 연관 있는 것은 그녀의 기나긴 서사시 <삼부작>일 거다. 만약 이것에 대해 감상을 쓸 일이 있다면, 그때 조금 더 자세하게 연관시켜도 좋을 듯하다.

<겨울 사랑>은 그녀의 서사시 <이집트의 헬레네>의 연장선상에 있는 작품이지만, 독립된 작품으로 봐도 무방하다. H.D.는 에우리피데스의 헬레네를 모티브로 삼아, <이집트의 헬레네>라는 서사시로 일리아스와 오이세이아의 신화를 재구성하였는데, <겨울 사랑>은 그런 재구성의 연장선에 놓여있는 작품이다. 허나 헬레네에 그녀의 서사시가 초점이 맞춰졌다면, <겨울 사랑>은 페넬로페에 초점을 맞춘다. 

<헤르메스적 정의>는 이 시집의 가장 마지막에 쓰인 작품으로 그 자체로서도 H.D.의 작별 인사와도 같은 작품이다. 

'왜 그대는 와서
내 쇠락을 방해하는가?
나는 늙었다 (그대가 올 때까지 난 늙었었다)' 
로 시작되는 이 장시는 이제는 늙어버린 자신을 돌아보면서도 과거에 자신이 보았던 장미와 연관지어선 장미-십자와 성모, 그리고 천사를 찾으려는 영적 여정을 그려낸다.

끝없이 '붉은 장미'와 파운드의 106번 칸토에서 구절을 따온 '장미가 꽃필 때까지 참으로 오래 걸린다'가 변주되듯 반복되는데, 이러한 H.D.의 후기 작품 상당수가 칸토스에 대한 화답, 혹은 자신만의 칸토스를 만드는 과정이었다는 걸 감안하면 이해할 수 있다. 무엇보다도 파운드는 그녀가 시인이 될 것을 결심하는데 도움을 준 지인이었고, 이 작품은 기나긴 자신의 삶과 쓰였던 것들이 까메오처럼 등장하면서 성모와 기독교적 구원, 그리고 이시스 신화를 비롯한 헤르메스주의 관련 신화들을 결합하기 때문이다.

모더니즘 서사시와 신화와 결합된 작품에 익숙한 독자라면, 역시나 칸토스를 의식하지 않을 수 없는데, 칸토스라는 거대한 프로젝트가 이러한 모더니즘 시들에 영향을 끼친 것은 부정할 수 없지만, 파운드와 H.D.의 관심사는 다르다. 파운드가 역사 그 자체와 반종교적인 자라면, H.D.는 앞서 말한 것처럼 기독교적 신비주의자에 조금 더 가깝다. 

이러한 장미를 찾는 여정, 천사와 대면하는 과정을 거쳐 마침내 이제는 노인이 된 정신은 끝을, 합일을 맞이한다.

<이제 그대는 태어났고
모든 것은 끝났다,
그대는 나를 홀로 내버려둘 것인가?

그대가 대천사들과 연인들에게 향할지,
혹은 지옥의 모험을 떠날지,
나는 알 수 없다,

나는 그저 알 뿐,
이 방이 날 담고 있고,
그것만이 내게 충분하다는 걸,

언제나 끝은 있는 법;
이제 난 내 수녀빛-회색을 걷어내며
충분히 알 수 있다,

가장 붉은 장미,
불변의 법칙을....
밤은 낮을 가져온다.>

그렇게 시인은 자신의 코다를 장식한다. 하지만 시인의 말처럼, 그대가 어디로 향할지 우리는 알 수 없다. 
알 필요도 없다.

콘래드 (4) <나르시소스 호의 흑인> - 죽어가는 인간 프로젝트- 조지프 콘래드



<나르시소스 호의 흑인>은 조지프 콘래드의 세번째 '장편'이지만, 사실 분량으로 따지면 중편에 해당되는 작품으로 여러모로 콘래드의 세계에선 분명 중요한 계기가 된 작품으로 보인아. 우선, 기존의 두 장편 <올메이어의 어리석음>과 <섬의 추방자>에서 장편을 시도했다면, 이 세번째 작품에서 콘래드는 비로소 자신의 가장 장기가 발휘될 수 있는 중편이란 글쓰기를 찾았고, 본격적으로 성공하기 시작한다. 또한 이 작품은 콘래드의 세계에서 해양소설이란 특성을 완전히 각인시킨 작품이자 해양소설의 걸작 중 하나로 불릴만하며, 그의 초기작에선 가장 뛰어난 작품 중 하나일 거다.

허나 오늘날 이 작품은 한 가지 문제 때문에 조금은 껄끄러운 작품처럼 되어버렸다. 제목의 '흑인' 의 원제는 오늘날 가장 금기시해야할 단어 중 하나인 'n-word'로 표기되며, 작품 내에서도 자주 등장한다. 물론 콘래드가 이 작품을 출판할 당시에도 이 단어 때문에 미국판본은 '바다의 아이들'이란 제목으로 바꾸어서 출판했다고 하는데, 오늘날과는 전혀 다른 이유에서였다. 당시 미국 출판사 쪽에선 미국인이라면, 아무도 '흑인'이 주인공인 소설을 읽지 않을 것이기에 판매량을 위해서 부득이하게 바꿀 것을 제시했다니, 아이러니라면 아이러니다.

그렇다면 이 소설이 무시무시한 인종차별 소설이고, 콘래드는 인종차별주의자인가? 거기에 대해선 조금 판단을 유보해야할 것이다. 사실 이 중편의 중심 인물은 흑인 선원이고, 이 명확한 주인공이 없는 소설에서 그가 주인공에 가장 가까우며 'n-word'의 쓰임 자체가 영국식 영어에선 당시 흔하다는 걸 감안하면 인종에 관련된 내용도 거의 없다. 그가 때론 애매모호하게 표현되기도 하지만, 사실 이건 다른 인물도 마찬가지고 무엇보다 명확하게 부정적으로 나타나는 인물은 따로 있다. 물론 콘래드를 제국주의나 인종 문제에서 완전히 무결한 존재로 판단하는 것은 위험한 일일 테지만, 딱히 이 작품이 그걸 반증하는 명확한 증거라고 주장하기엔 애매해보인다. 만약 이 소설에서 문제가 되는 점이 있다면, 그런 점은 콘래드의 다른 소설에서 나타나는 것과 거의 비슷하므로, 만약 당신이 콘래드를 읽는데 큰 거부감이 없다면, 이 소설도 큰 문제는 없을 거다. (허클베리 핀을 생각해보자)

아무튼 이 소설은 콘래드 본인이 직접 선원으로 일했었던 나르시소스 호를 모티브로, 무역선 나르시소스 호가 인도에서 영국으로 귀환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그러나 정작 상당수 독자들은 이 소설이 사건적인 의미에서 굉장히 정적이라고 느낄 거다. 그저 묵묵히 바다를 항해나는 것처럼 이 배는 그러한 항해에 관한 소설이다.
그러나 바다라는 고립된 공간은 때때로 폭풍이 오거나, 고요함을 보여주며 인간의 내면을 반영하는데, 그런 의식적인 공간 속에서 나르시소스 호의 선원들을 사로잡는 것은 역시나 같은 선원이자 서인도 제도 출신의 흑인 제임스 웨이트다.  배를 탔지만 그는 사실 일할 수 없는 자다. 그는 죽어가는 자이며 다른 이들이 보기에도 그가 죽어가고 있다는 걸 알 수 있다. 그러나 그는 배에서 내릴 수 없다. 자연스레 그를 둘러싼 인간군상은 그에게 영향을 받으면서 죽어가는 약자이자 다 함께 일해야 살 수 있는 야성의 공간에서 도태되는 약자를 어떻게 대해야할지 도덕적 갈등을 겪는다. 'Wait'라는 그의 이름처럼 그라는 존재는 마치 사람의 항해를 멈추며 시험하는 존재와도 같다.
자연스레 그를 둘러싸고 바다에서의 규율을 중시하며 무시하는 늙은 부류나 그를 동정하고 그를 위해 더욱 음식을 주거나, 혹은 폭풍우에서 목숨을 걸고 구해주는 부류 등 작은 사회는 나뉘고, 또 그들 각자 내면의 갈등을 겪게 된다. 이는 비단 선원 뿐만 아니라, 제임스 웨이트 본인도 마찬가지다. 그는 홀로 상징으로만 남지 않는다. 이는 이 소설 속 모든 것과 마찬가지다. 그들 모두 각각 어떤 상징이 되면서 인물이 된다.
이 죽어가는 자 또한 그런 도덕적인 시련을 겪는다. 모든 콘래드의 주인공들이 그러하듯, 그는 패배자다. 그는 죽을 수밖에 없다. 그의 병은 피할 수 없다. 그렇기에 그는 자신의 상황을 오히려 이용하기도 하면서 죄책감을 느끼거나, 혹은 사실 병이 거짓말이라고 죽음에서 도피하고, 스스로를 속이고자 한다. 바다라는 공간은 그러한 시련 속에서 인간의 날 것을 그대로 들어내게 만들고, 또 변화하게 만드는 그런 공간이다. 마치 수면의 자신의 모습에 홀린 나르키소스처럼, 나르시소스 호의 선원들, 웨이트 본인을 포함한 모든 이들 또한 이 죽어가는 선원에게 홀려버린다.  
하지만 웨이트를 포함하여 이 선원들에게 불운한 점이 있다면, 그들은 어떤 영웅적인 세계가 아니라, 콘래드의 세계에서 태어났다는 점이다. 콘래드의 세계는 본질적으로 그다지 긍정적이지 못하다. 마치 폴란드 이민자 출신인 자신의 정체성에 불안을 느끼듯, 콘래드에게 있어 이곳은 패배하는 곳이고, 시험과 갈등 끝에 추한 모습을 보이면서 살아가는 곳이다. 

죽어가는 자가 죽고, 항해가 끝나고, 선원들이 육지에 내려도, 결국 그들 중 누구 하나 다시는 볼 수 없는 그런 곳. 그곳이 콘래드의 바다이며 이 작품을 시작으로 웨이트는 여러 이름으로, 말로우나 커츠, 혹은 짐 등으로 다시 태어날 수밖에 없다.

 

비트키에비치 (1) 광인과 수녀/ 쇠물닭 / 폭주 기관차 - 시체들의 귀환 독서일기-희곡




스타니스와프 비트키에비치, 혹은 비트-케이는 브루노 슐츠와 비톨트 곰브로비치와 더불어 폴란드 모더니즘을 대표하는 3인방이다. 그에 대하여 슐츠나 곰브로비치를 이야기할 때 언급한 적은 있어도, 막상 그의 작품들에 대해선 이야기한 적이 없는데 뒤늦게나마 적어보려고 한다.

비트키에비치는 일종의 르네상스-맨으로 그는 화가이자 극작가였으며 소설가였고, 다양한 분야에 재능이 있었다고 알려진 자다. 이 폴란드 삼총사 중 가장 연장자에 속하는 그의 희곡들은 오늘날 부조리극의 선구자로서 취급되는데, 그의 희곡들이 1920-30년대에 쓰여진 걸 감안하면 그러한 표현에 부족함은 없어 보인다.

그의 소설들(안타깝게도 영어로 완역이 된 것은 한 편이고, 나머진 발췌 번역이지만) 또한 기괴하지만, 희곡들의 경우도 마찬가지인데, 비트키에비치는 보다 직접적으로 존재에 대한 불안을 무대 위에서 표출한다. 여기에서 다룰 세 편의 희곡 중 가장 직접적인 표출은 <폭주 기관차>인데, '최후의 심판'에 버금가는 재앙을 일으켜 존재의 신비로움을 탐구하겠다는 일념으로 기관차를 폭주시켜 충돌 사고를 일으키려는 두 악당의 이야기를 다룬다. 기괴하지만, 정말로 그렇다.

"글쎄...자네가 그렇게나 헛소리를 지껄여도, 존재의 신비에 다가가기 위한 비존재가 되기엔 아직도 멀었어. - <폭주 기관차>"

하지만 이러한 부조리한 시도는 결국 '무한'의 끝을 도달할 수 없는 한계처럼, 우스꽝스런 실패로 끝나고 만다. 아무리 신의 심판에 도전하려는 무시무시한 기차의 폭주라할 지라도 결국 정해진 레일을 벗어날 수 없는 법이다. 이는 그의 다른 무대에서도 나타난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탐구는 좌절 속에서도 계속 이어진다.

이러한 존재에 대한 불안을 고찰하는 건 자연스레 비트키에비치와 같은 예술가의 숙명이지만, 부조리한 점은 이러한 예술가들은 때때로 '광인'으로 취급되고, 격리된다. 이는 사회의 벽을 의미하면서도, 예술가 본인의 내면의 감옥을 의미하기도 한다. 이러한 점을 극대화 시킨 것이 그의 짧은 희곡 <광인과 수녀>다.

정신병동에서 개인의 내면으로 상징될 감옥에 갇힌 채 우스꽝스런 치료들을 받는 시인이었던 광인은 그를 간호하려고 온 수녀와 사랑에 빠지면서도, 여전히 예술가를 탄압하는 사회에 의하여 '처형'당한다. 그러나 이러한 류의 이야기는 이미 데카당트 시절부터 흔해빠진 부류였고, 비트키에비치는 여기에서 한 발 더 나아가 이야기 자체를 비틀며 광인/일반인의 관계를 역전시킨다.

이러한 역전은 자연스레 무대의 기괴함을 가져다주고, 대표적인 활용은 '시체의 부활'일 것이다. 비트케이의 무대에선 때때로 죽은 자들이 아무렇지도 않게 다시 돌아와 이야기에 개입한다. 그들은 결코 유령과 같은 변한 존재가 아니다.

그는 자신의 연극론을 순수한 형식을 위한 극장이라고 불렀는데, 마치 추상화나 실체없는 소리들처럼, 그는 순수한 형식이자 통일되고도 무의미한 무언가를 꿈꾸었다. 그러나 무대란 본질적으로 배역과 인간들이 지배하므로 화가였던 그는 연극이 그림과 다르다는 것을 잘 알았다. 그럼에도 그는 때때로 '인간'을 제거하기 위하여 부단한 노력을 아끼지 않고, 그의 무대를 '부조리'하게 만든다.

"타지오: 정말로 커보이네요, 아버지. 하지만 벌레가 잡아먹는 것처럼 보여요. 사람들은 벌레 같죠. 그리고 무한은 그들을 감싸고, 신비한 목소리로 그들에게 명해요. - <쇠물닭>"

<쇠물닭>은 그러한 시도가 가장 절실하게 나타나는데, 이 희곡은 말 그대로 이해할 수 없는 희곡에 가깝다. 쇠물닭이라 불리는 여자가 한 남자로 하여금 스스로를 쏘라고 명하며 결국 죽어 사라지고, 아들로 보이는 이는 아버지를 부르면서도, 둘이 정말로 부자 관계인지도 알 수 없다. 혹은 도대체 '쇠물닭'이 무엇을 상징하는지, 입센의 <들오리>나 체호프의 <갈매기>처럼 무언가 의미가 있는지, 혹은 무의미한 장난인지, 대관절 관객으로선 무수한 의문을 품지만, 어느 것 하나 답해지는 것은 없다. 
그는 이 극을 '구체극'이라 이름 붙였다. 마치 시작과 끝이 없는 원처럼, 무한이 무대를 감싸며 답이 보이지 않는 존재를 탐구하게 만들기에. 그리고 때때로 그것은 거기에서 사람을 없애고, 시체들로 채우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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