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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블로그는 잉여의 블로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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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블로그는 주로 책에 관하여 다루고 있지만, 다른 분야도 애기할 수도 있습니다.

저는 잉여입니다.

JHALOFF에 대한 발음은 정해진 것이 없습니다. 쟐롭, 쟐로프, 자알로프 등등 원하시는데로 부르시면 됩니다.


사실 JHALOFF란 아이디엔 별다른 의미가 없습니다. 그저 러시아사람처럼 보이게 만든 글자들의 나열입니다.
물론 각각의 글자엔 의미가 있지만, 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하겠습니다.


거트루드 스타인, <파우스투스 박사 전깃불을 밝히다> - 기계장치 속 영혼 독서일기-희곡




<그리고 독사가 저기 있어
그리고 빛이 저기 있어
누가 그녀에게 빛을 주었지
누구도 그러지 않았어
파우스투스 박사는 그의 영혼을 팔았고
그리하여 빛이 저기 왔어
그리고 그녀는 그녀의 영혼을 팔았지.>


많은 모더니스트들이 실험적이 풍부하며 언어를 가지고 놀고, 많은 독자들을 고통의 미로로 몰아넣지만, 개인적으로 그중 가장 으뜸은 거트루드 스타인이다.
어떤 의미론 차라리 조이스를 읽는게 스타인을 읽는 것보다 덜 피곤하고, 더 쉽게 느껴질 때도 있다. 

사실 스타인은 '어려운 단어'를 거의 쓰지 않는다. 또한 그녀의 문장 자체도 단순하다. 문제가 있다면 스타인은 이런 단순한 단어와 문장들을 미묘하게 변주하고, 반복한다. 
그녀의 유명한 문장으로 <Rose is a rose is a rose>가 있다. 그녀도 마음에 들었는지 자주 변형시키는 문장이기도 한데, 저게 단순히 장미는 장미는 장미다 정도로 번역될 수도 없는 것이 '로즈'란 이름이 '로즈'이고 그게 곧 '장미'인지 아니면 단순히 장미는 장미는 장미다 인지 뉘앙스가 중첩되버린다. 
물론 이런 문장들 자체는 읽는 재미는 있다. 읽다보면 운율도 있고 다 좋다.

하지만 말하지 않았는가, 스타인은 '반복'한다고. 
<A가 B에 있다. A가 C에 있다. A가 D에 있지 않다 ------> 이런 문장이 몇 백 쪽에 걸쳐지는 순간 독자의 정신은 날아간다.

참고로 그녀의 대작 <미국인의 형성>은 약 1200쪽 분량이다.

그런 의미에서 스타인의 실험적인 오페라 <파우스투스 박사 전깃불을 밝히다>는 분량도 적절하면서 내용과 실험 양쪽 모두를 만족시킬만한 좋은 극이다.
(원문의 'lights the lights'에서 이미 반복과 변주가 느껴지지 않는가?)

파우스트 박사에 관한 전설은 이미 사골이 되어버렸지만 그 국물은 오늘날까지도 계속 나오고 있다. 그러니 소재를 재탕한다고 스타인을 비판할 순 없을 거다.
어떤 의미에서 스타인의 파우스트는 가장 암울한 파우스트다. 
괴테의 파우스트는 적어도 구원이라도 받고, 말로우의 파우스트는 지옥에라도 끌려가는 '끝'을 보지만, 스타인의 파우스투스 박사는 흔히 말하는 현대 기계문명에 잡아먹힌 나약한 인간이다. 
파우스트 전설의 신에 도전하는 이성을 통하여 전깃불을 만들었지만, 거기에서 끝나버린 인간.

<하지만 난 그걸 만들고 싶었고
그래서 악마는 그걸 가져갔고
넌 그걸 원하지도 않았지만
난 그걸 만드려고 혼을 팔았지.>

극이 시작되면, 무엇보다도 스타인만의 독특한 해석이 시작되는데, 바로 파우스트와 메피스토펠레스의 관계다 

<파우스투스 박사: 
이 악마 악마 따위 악마가 있든 내가 알게 뭔가

메피스토펠레스: 
하지만 친애하는 파우스투스 박사 나는 여기 있어요

파우스투스 박사:  
내가 신경쓰는건 이곳도 그곳도 없다는 것. 나는 누구인가. 
나는 파우스투스 박사 모든 것을 알고 모든 것을 할 수 있고 너는 네 덕분이라 하지만 아니지 
내가 서둘지 않고 내 시간만 챙겼다면 나는 이 백색 전깃불을 만들고 대낮의 빛과 밤의 빛도 만들었겠지 
내가 무엇을 했는가 나는 너란 불쌍한 악마를 본다 나는 너를 보고 나는 속았고 또 나는 불쌍한 악마를 믿었고 
나는 네가 필요하다고 생각했지 그리고 나는 악마에게 유혹당했다고 생각했고 
악마가 네게 말해주기 전까지 어떤 유혹에도 홀리지 않았을 것이라 난 알지. 
너는 내 영혼을 원했지 알게 뭔가 너는 내 영혼을 무엇 때문에 원했을까 내게 정녕 영혼이 있는지 네가 어떻게 알까 > 

(파우스투스의 대사는 임의로 끊었다. 사실 전부 한 문단이며 한 줄에 가깝다.)

스타인의 파우스트에선 '악마와의 계약' 자체는 무의미하다. 파우스트는 이미 있는지도 의심되는 영혼을 팔고 현대의 전깃불을 밝혔지만, 그는 더 이상 악마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오히려 악마 자체에 대해서 회의하고, 무기력하게 그를 거부한다.
오히려 메피스토가 자신이 존재함을 끝없이 피력하며 파우스트에게 매달린다.

파우스트는 전설 속 신에게 도전하는 인간이라기보단 현대 문명을 건설한 후 그 문명 속에 갇힌 인간에 가깝다. 
'모던'과 '전깃불'은 태양을 거부하고, 신과 악마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이러한 스타인이 해석하는 관계는 흔히 이야기되는 '인간을 속이는 악마와 속는 인간'의 관계를 역전시킨다.

<메피스토: '당신은 날 속였어.'
파우스투스: '난 그러지 않았어.'
메피스토: '당신은 날 속였고 난 언제나 속았어.'
파우스투스:'넌 나를 속였고 나는 결코 속지 않았어.'>

물론 스타인의 파우스투스 박사가 어떤 '이야기'를 가지고 전개되는 것은 아니다. 스타인의 실험극은 파우스트 전설과 선대 작가들이 이루어놓은 요소들을 뒤섞고, 거기에서 현대의 부조리한 인간상을 그려내는 것에 가깝다. 물론 파우스트 계열 작품에서 가장 중요한 두 작품, 괴테의 파우스트와 말로우의 파우스투스 박사 모두 사용된다.


<파우스투스:
너 불쌍한 악마야 나는 너를 보고 나는 속았고 난 믿었지 불쌍한 악마야 나는 생각했지 내가 널 필요하다고 그래서 나는 생각했지
나는 악마에게 유혹당했고 나는 알고 있었지 악마가 그렇다고 말하기 전까지 유혹은 유혹이 아니라고. 
넌 내 영혼을 원했지 대체 뭐 때문에 넌 내 영혼을 원한 건지, 나에게 영혼이 있는지 넌 어떻게 알지, 
넌 말하지만 누구도 말하지 않지
하지만 넌 악마고 모두가 악마가 그저 거짓말이란 걸 알지, 
그러니 넌 어떻게 알지 내가 알고 있는지 내게 팔 영혼이 있는지 넌 어떻게 알까, 
악마 양반 오 악마 양반 네가 어떻게 말해줄까>

파우스트 전설에서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신과 악마의 대립은 스타인의 파우스트에선 부각되지 않는다. 오히려 마르가리테/헬레나, 즉 파우스트의 애인과 파우스트의 대립이 더욱 부각된다.

스타인이 해석하는 파우스트의 또 다른 특이점은 파우스트의 두 여인, 마르가리테와 헬레나을 '한 명'으로 합쳐놓았다는 것이다.
물론 여기엔 단순히 괴테나 파우스트 전설만 있는 것은 아니다. '아이다'는 스타인의 또 다른 소설 속의 분열된 자아를 가진 여인이며 혹은 그녀의 애인일 수도 있다. 모든 작가들이 그렇듯 그녀 또한 자전적인 요소를 섞어넣는다.

<마르가리테 아이다/헬레나 애나벨:
나는 나 그리고 내 이름은 마르가리테 아이다 그리고 헬레나 애나벨, 그러면 오 그러면 난 할 수 있지 그래 난 할 수 있지 난 할 수 있어 울 수 있어 하지만 왜 왜 내가 울어야지>

물론 무대의 연출자의 재량에 따라 마르가리테 아이다/헬레나 애나벨은 하나일 수도, 둘이거나 셋일 수도 있다. 애당초 텍스트는 지극히 실험적이며 일반적인 극본의 구성을 따르지 않는다.

<메피스토:죄를 범해
파우스투스:무슨 죄 영혼 없는 내가 어떻게 죄를 범해
메피스토:아무거나 죽여
파우스투스:죽여
메피스토:그래 무언가를 죽여 오 그래 아무거나 죽여 그래 그게 나야 속아온 나 악마 누구도 속일 수 없지 그래 그게 나야 나 계속 속아왔지>

사실 이 희곡은 현대로 배경을 옮긴 에덴의 아담과 이브의 우화가 아닐까 의심되기도 한다. 독사가 등장하고, 전깃불은 마치 선악과도 같으며 사탄도 있고, 무엇보다 아담과 이브에 걸맞는 파우스트와 마르가리테/헬레나가 있다. 
차이가 있다면 선악과를 홀로 먹은 파우스트는 홀로 벌을 받는다.

때론 의미없어보이는 장면이나 난해한 장면들이 뒤섞이면서 '영혼 없는' 파우스투스 박사는 무언가 시도를 한다. 그러나 그 시도 자체도 결국 전깃불을 밝히는 것에 그치며 그의 애처로운 목소리만 무대 위에 남는다.

<'날 혼자 내버려둬 내가 혼자 있게 내버려둬, 개와 소년 소년과 개야 날 내버려둬 내가 혼자 있게 내버려둬.'

'제발 독사 씨 내 말을 들어줘 그는 그고 그녀는 그녀고 우리는 우리야 제발 독사 씨 내 말을 들어줘.'>

이 희곡은 전깃불을 만들어 도시를 비추지만, 정작 자기 자신은 비추지 못하여 몰락한 한 인간의 읊조림에 가깝다.

상투적인 표현으로 현대 기술문명에 분열된 인간상을 묘사했다로 부를 수도 있겠지만, 여전히 읽거나 공연을 보면서 사람들로 하여금 생각하게 만한 구석은 많다. 
물론 이건 모든 쓰여진 것에 해당될지도 모른다.




이미 뛰어난 천재들이 사용한 소재를 다시 어떻게 효과적으로 재해석하고, 새로운 것을 찾을 수 있을지 의심되는 상황에서 이러한 답을 줄 수 있다, 고 말하고 싶지만 스타인도 천재므로 그다지 위로는 되지 않는다.

아무튼 개인적으로 무척 마음에 드는 작품이고 언젠가 끄적이려고 마음만 먹었다가 드디어 아주 조금 무언가 끄적인다.

언젠가는 저 괴물 같은 <미국인의 형성>에 관해서도 끄적일 여력이 되기를.

P.S. 
실험적인 극이지만 요근래에도 연출은 되고 있다. 가장 마음에 드는 것은 뮤지컬 버전이다. 
놀랄지 모르지만, 이건 원래 오페라 대본이다.

링크:

첫 5분만 봐도 무방할 거 같지만.


3회차) <피네간의 경야> (0) 등장인물들 정리 프로젝트-제임스 조이스



1) 주인공이 환생을 하는가?
2) 주인공이 이세계로 넘어가는가?
3) 주인공이 회귀하는가?
4) 여동생이 등장하는가?

이 모든 것에 'YES'를 답하셨다면, 그렇다면 넌 <피네간의 경야>야!


자대에서 이런저런 책들을 읽었지만 여전히 시간은 안 갔습니다. 
그래서 <피네간의 경야>도 다시 읽었습니다. 새로 나왔던 옥스퍼드 클래식 판본으로. 물론 다 읽어도 여전히 시간은 안 갔습니다.

역시 오랜만에 블로그에 글 올리려면, 이 블로그의 본질에 걸맞는 글부터 시작해야겠죠. 
<피네간의 경야> 3번째로 읽은 기념으로 다시 한 번 감상 정리하려는데, 우선 시작으로 여러 메이저/마이너 인물들에 대한 정리입니다.


팀 피네간 - 
아일랜드 민요 <피네간의 경야>의 주인공이자 1부 1장에서 이야기되는 주인공. 
그는 민요에서처럼 사다리에서 추락하여 죽지만, 장례경야에서 위스키로 인하여 예수처럼 다시 부활하고 사람들을 공포로 몰아넣는다.
피네간이 과연 이어위커 본인인가, 아니면 둘은 완전히 다른 인물인가를 판단하기엔 책 내부에서 너무나도 모호하게 다룬다.
피네간의 죽음과 부활 자체는 1부 1장에서 이미 끝나며 그 후엔 사실상 이어위커와 그의 일가에 관한 이야기니까. 

단순히 피네간을 신화시대의 이어위커, 그리고 신화의 시대가 끝난 이후 평범한 인간 이어위커로 변했다, 정도로 받아들여도 무방할지도 모른다. 

피네간의 이야기는 오래 전부터 밤의 이야기로서 전해졌고, 그 후 기독교 전통에서 다시 한 번 이야기되었다고 소설에선 서술된다. 
1장에서의 피네간의 죽음과 부활이 신화로서 이야기라면, 그 후의 이어위커의 몰락과 부활은 다시 한 번 이야기되는 피네간의 신화일 것이다.


이어위커 일가:
이어위커 일가는 노르웨이 이민자 출신의 더블린의 평범한 가정으로, 아마도 술집을 운영하는 것으로 보이며 현실에서의 그들의 성은 포터(Porter)지만, 일가의 하룻밤 꿈속에선 이어위커 가가 된다.
아버지와 어머니, 쌍둥이 형제와 막내딸, 이렇게 다섯 명의 가족과 하녀 한 명, 하인 한 명이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카톨릭이 아닌 프로테스탄트 계열의 이방인들.
더블린 내 챠펠리조드(Chapelizod)에 살고 있다. 
(챠펠리조드는 '이졸데의 예배실'을 의미하며, 트리스탄과 이졸데는 피네간의 경야에 주 모티브 중 하나다)

이어위커 일가의 투쟁은 크게 부모 세대 - 자식 세대로 나눠지고, 자식들이 부모에게 대립하는 것처럼 그려지지만, 결국 이 모든 것은 '반복'에 불과하며 부모 세대의 인물들이 자식 세대의 인물들과 동일시되며 그들이 하는 것은 이미 일어난 일이고, 앞으로도 일어날 일이란 것을 암시해준다.


험프리 침프튼 이어위커(H.C.E.) -
포터 씨, 여기 만인이 온다(Here Comes Everybody), 호우드 성과 그 주변(Howth Castle and Environs). 험프티 덤프티, 핀 매쿨, 하룬 알-라쉬드, 아일랜드의 마지막 왕 로데릭 오코너 등 수많은 이름으로 변주된다.
작중 대문자 H.C.E.로 되는 모든 것은 사실상 그의 또다른 변형이라고 봐도 무방하다.

더 이상 신화 속 영웅이 아닌 험프리 이어위커는 '알려지지 않은 죄'를 자신의 아내에게 범하였고, 마치 성서 속 인간의 원죄처럼 박해받는다. 어쩌면 이 죄는 소녀들과의 불륜일 수도 있고, 이로 인하여 이어위커의 재판이 열리지만,
결정적인 증거이자 고백인 아나 리비아 플루라벨의 편지는 마지막 장에서야 밝혀진다.

'모든 이가 온다'란 그의 또 다른 이름처럼 그는 한 인물이라기보단 말 그대로 인류 자체에 대한 상징에 가깝다. 
그는 자신의 시대를 상징하는 장에선 주인공이지만 신화 속 영웅이 아닌 인간에 불과하며, 권력을 아들에게 물려준 후엔 아들에게 역으로 박해받는 몰락한 왕에 가깝다. 그는 그리스도처럼 죽음과 부활을 반복해야하며, 몰락과 재기를 번복한다.


작중 한 구절처럼 <피네간의 경야>는 본질적으로 "몰락과 부활의 험프리피아드"다.
  

아나 리비아 플루라벨(A.L.P.) -
포터 부인, 자애롭고 풍요를 가져다주는 자, 리피 강, 바다의 신 마나난 맥리르의 딸.

험프리 이어위커처럼 그녀를 상징하는 A.L.P.는 수많은 변형을 낳는다. 아나 플루라벨은 더블린을 관통하는 리피 강을 상징하며 바다의 신 마나난의 딸이자 신화 속 강의 신들이 그러하듯 수많은 자식들을 가진, 만물의 어머니이다.
이는 작중 꾸란의 알라의 여러 이름들을 빗댄 그녀의 여러 명칭들에서도 나타난다. (풍요로움을 가져다주는 자, 영원한 자, 누구보다도 자애로운 자 등등)

아나 리비아는 작중 직접적으로 등장하는 일이 다른 가족들에 비하여 드물다. 그녀에 관한 챕터도 있고, 그녀에 관한 이야기도 많지만, 보다 직접적으로 아나 리비아가 이야기 속에 등장하는 것은 후반부에 일어난다. 
그렇다고 그녀가 작중 망각되는 것은 아니다. 더블린이 리피 강을 중심으로 세워진 도시이듯, 모든 이야기의 근간엔 결국 아나 리비아, 혹은 리피 강을 베이스로 진행될 수밖에 없다. 


그러나 강이 바다로 흐르듯, 이야기가 끝나는 것을 아나 리비아도 막을 순 없다. 다시 강으로 돌아와 다시 시작하는 것 외엔. 


문필가 쉠과 우편배달부 샤운 - 

쉠과 샤운은 쌍둥이이며, 신화 속 대립하는 형제들처럼 그들 또한 필연적으로 대립한다. 이들의 싸움은 카인과 아벨, 야곱과 에사우, 미카엘과 사탄, 세트와 호루스/오시리스 등의 수많은 대립으로 패러디되며 그 중심엔 신화들이 그러하듯 그들의 여동생인 이씨가 있다.
 
쉠은 작가로서의 조이스를 나타낸다. 그는 문필가이며 작가이기에 사람들에게 박해받는다. 샤운은 우편배달부이자 야심가이며 그는 가장으로서의 아버지와 대적한다.

아버지에 관한 장이 넘어가 아이들의 장이 시작되면, 샤운은 왕위를 찬탈하려는 아들처럼, 아버지의 모든 것을 빼앗으려고 한다. 
그의 가장으로서의 지위와 권력. 샤운에게 있어 형제 쉠과의 대립은 아버지의 유산을 온전히 물려받기 위한 대립인데 그는 야만적이고 사람들을 조종하여 쉠을 박해한다. 마치 신화 속 야심가처럼 그는 어머니이자 여동생으로 합쳐진 이씨를 독차지하여 가정의 모든 것을 손에 넣고자 한다.

피네간에서 험프리 이어위커로 주인공이 계승된다면, 이 주인공은 다시 험프리에서 샤운으로 계승된다.

그는 야심가이고, 가족들에게 죄를 범하지만, 그렇다고 완전한 악인은 아니다. 자신의 죄에 대한 죄책감으로 방황하고, 죽음을 맞이하지만, 이씨의 용서로 구원받는다.

우편배달부라는 직업답게, 그는 아나 리비아가 험프리 이어위커에게 보내는 편지를 가지고 있으며 이 편지는 작중 이야기를 진행시키는 가장 중요한 요소다.  


이씨 -
쉠과 샤운의 여동생, 이어위커 일가의 막내. <트리스탄과 이졸데>에서의 이졸데.

이씨는 자식 세대의 아나 리비아이며 근친상간에 관한 신화에서 나타나는 다툼의 원인이다. 그러나 이씨는 결코 부정적으로 그려지지 않으며 오히려 쾌활하고, 장난기 많고 순진한 아이로 그려지기도 한다.
물론 아나 리비아처럼 이씨 또한 직접적으로 등장하는 것은 드물며, 작중 그녀를 바라보는 이의 관점에 따라 때론 모순적으로 그려지는 양면적인 인물이기도 하다. 
어쩌면 진실로 그녀는 자신을 둘러싼 신화적 대립을 이해하기엔 너무 어릴지도 모른다. 형제의 신화적 다툼이나 어려운 숙제조차 이씨에겐 장난치는 것에 불과하다. 
그러나 이러한 순진함이 그녀로 하여금 샤운을 용서하게 만들고, 죄인은 구원받는다.



4명의 노인들 -
4명의 노인들은 이어위커의 재판에서 재판장을, 샤운의 심문에선 심문관들을 맡으며 트리스탄과 이졸데 이야기에선 그들을 엿보는 이들로 등장한다.

'4'가 상징하듯, 그들은 성서에서의 4복음서의 저자들이며, 아일랜드의 4개의 지역, 동서남북, 아일랜드 연대기의 4명의 저자들 등을 상징하기도 한다.

각각 멧 그레고리(얼스터, 북), 마커스 라이온스(먼스터, 남), 루크 타페이(렌스터, 동), 조니 맥 도갈(코노트, 서)라는 이름으로 불린다.


12명의 배심원들 -
이어위커의 재판에서의 배심원들이며 이들은 이어위커가 운영하는 술집의 단골이기도 하다. 이들 각각의 이름은 나오지 않으며, 그저 12명의 사람들로 뭉쳐서 등장할 뿐이다.


케이트, 조 - 
이어위커 일가의 하녀와 하인이자 술집의 종업원들. 여러 소동들에 감초처럼 낀다. 이어위커 일가의 여러 스캔들에 능통한 자들.
둘의 대비는 또다른 험프리 이어위커와 아나 플루라벨 모티브의 반복.


소녀들 - 
샤운이 죄에 관하여 설교하는 기숙학교의 소녀들이자 험프리 이어위커가 피닉스 파크에서 범한 죄악과 관련이 있을지도 모르는 소녀들.


근황 일상

오랜만입니다.

사실 7/4일에 이미 전역도 해서 이제 한달 정도 지났는데

귀차니즘과 이런저런 사정으로 인하여 거의 손 놓고 있었습니다.

이런저런 일 때문에 예전처럼 자주 블로그질은 못하겠지만, 완전히 접은 것은 아닙니다.

책은 여전히 잘 지르고 있지만, 감상은 모르겠네요, 올리긴 합니다.

물론 확정된 것은 없습니다

짧은 잡념: 사무엘 베케트, <엔드게임> 독서일기-희곡

<불행보다 웃긴 것은 없어, 내가 보장하지. 그래, 그래, 그건 세계에서 가장 익살맞은 거야. 그래서 시작할 때, 우리는 웃고, 우리는 의지를 갖고 웃지.
하지만 그건 언제나 같은 거야. 그래, 우리가 너무나도 자주 듣는 웃긴 이야기처럼, 아직도 우리가 재밌다고 생각하지만, 더 이상 우리가 웃지 않는 것처럼.>


사무엘 베케트의 <엔드게임>은 그의 가장 유명한 희곡 <고도를 기다리며>의 연장선에 있는 작품이다. <고도를 기다리며>의 에스트라공과 블라디미르가 어떠한 희망을 가지고, 앞으로 반복될 것임을 암시했다면, <엔드게임>에선 그 이후의 일, 고도를 기다리는 수많은 막이 흐른 후의 그러한 세계를 다룬다.

베케트는 원래 <고도를 기다리며>를 3막으로 기획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2막까지 쓰면서 그는 3막이 필요없음을 느꼈다. 2막까지 완성된 시점에서 이미 관객들에게 2막 이후에도 그들이 계속 고도를 기다릴 것임을 암시됨을 확신하였기 때문이다. 마치 1에다가 계속 1을 더하는 행위를 계속하면, 무한에 가까워지듯 말이다.

그러나 <엔드게임>에서 베케트는 그러한 노력조차 할 필요을 느끼지 못한다. 0에서 1이 된 순간, 이미 2까지 가는 무한한 시간이 흐름을 그는 느낀 것이다.


<끝은 시작 속에 있었지만, 그래도 넌 계속해.>

이 이야기는 이미 의미불명의 멸망한 세계를 배경으로 진행된다. 생존자는 단 4명에 불과하며, 실질적으론 단 두 사람의 투쟁이 그 중심이다.
멸망하였으나 모든 것이 아직은 사라지지 않은 폐허 속에서 왕으로 군림하는 햄, 그리고 그가 거두고, 키운 시종 클로브. 그 외 햄의 부모이자 쓰레기통에서 다리 없이 사는 넬과 네그가 있지만, 햄은 그들을 사실상 부모나 사람으로 취급하지 않는다.

이미 세상은 <엔드게임>의 세상 속에선 무의미하다. 곧 클로브와 햄의 관계 자체가 곧 하나의 세계가 되며, 두 사람의 관계에 따라, 이미 멸망이 확정된 세계의 멸망이 완전히 확정되기 때문이다.


<난 당신이 내게 가르친 단어들을 사용해요. 만약 그것들이 더 이상 아무 의미 없다면, 내게 다른 걸 가르쳐줘요. 아니면 내가 침묵하게 놔두든가.> - 클로브

<네놈은 내게 언어를 가르쳤고, 내가 얻은 이익은 저주하는 법을 내가 안다는 거지. 내게 네 언어를 가르친 네놈은 저주나 받아라!> - 캘리번, 셰익스피어 <템페스트>

마치 프로스페로에게 항의하는 캘리번의 그 대사가 연상되듯, 클로브는 햄이라는 유사 부모, 혹은 주인 아래에서 지배받으면서 살아갈 수밖에 없다.
그러나 두 사람의 관계는 서로 필요하다는 역설적인 면모가 있다.

햄은 장님이며, 몸을 움직일 수 없고, 클로브는 언제나 서있을 수밖에 없다.
자신을 왜 떠나지 않느냐는 햄의 질문에 클로브는 더 이상 갈 곳이 없다고 대답하며, 자신을 왜 곁에 머물게 허락하냐는 클로브의 질문에 햄은 더 이상 사람이 없어서라고 답한다.

이렇게 서로가 없이는 살 수 없는 세계를 두 사람은 간신히 유지하고 있지만, 극의 핵심은 두 사람의 결별이 언제 이루어질까이다. 늙은 햄은 늘 진통제를 찾으며, 클로브는 비밀번호를 알아내어, 필요한 것을 훔치고 달아날 궁리만을 한다.

<네 머리를 써봐, 어서, 네 머리를 쓰라고, 넌 이 땅 위에 있어, 그리고 거기엔 어떤 대책도 없어!>

그러나 베케트가 그리는 종말론적 세계엔 어떠한 답이 없다. 끝은 예정되어있지만, 그 끝은 아직 오지 않았다. 그러나 그 끝을 막을 수도 없고, 그렇다고 오게 만들 수도 없다. 그저 무의미하게 기다림과 또 기다림뿐.

<모든 삶들에서, 같은 질문들과 같은 답들.>

<오래된 막판 오랫동안 져왔고, 놀고 지며, 계속 지고 있어.>

승부의 끝, 체스에서 이미 승부가 났지만, 체크메이트 이전까지 무의미한 왕의 도피를 해야하는 그러한 게임처럼, 멸망한 세상의 왕 햄은 무의미한 몸짓을 반복하며 극 위에서 극이 끝날 때까지 모든 것을 계속한다.


<Me - to play. Old Stancher!

내가 - 놀아볼까. 오래된 방해꾼을!>


햄의 첫 등장 대사는 여러모로 번역하기 까다로운 대사다. 그는 다시 한 번 놀고자 한다, 혹은 자신에게 주어진 몰락한 왕을 연기하고자 한다. 이미 너무나도 오랫동안 상대해왔기에 친구처럼 느껴지는 자신의 오래되고, 친숙한 방해꾼과 함께, 혹은 자신이 스스로 그 방해꾼이 되거나.

고도도 더 이상 오지 않는 그러한 세계. 그럼에도 베케트는 이미 초반부터 여기에 대한 나름의 해법을 준다.

<불행보다 웃긴 것은 없어, 내가 보장하지. 그래, 그래, 그건 세계에서 가장 익살맞은 거야. 그래서 시작할 때, 우리는 웃고, 우리는 의지를 갖고 웃지.
하지만 그건 언제나 같은 거야. 그래, 우리가 너무나도 자주 듣는 웃긴 이야기처럼, 아직도 우리가 재밌다고 생각하지만, 더 이상 우리가 웃지 않는 것처럼.>

극에서 유일하게 안식인 '죽음'을 맞이한 넬은 말 그대로 불행에 대해 웃고, 또 웃는 법을 깨달았기에, 작가에 의해서 안식을 맞이하고, 퇴장할 수 있게 된다.

그러나 남은 이들은 어떠한가? 깨달음을 얻을 수 있는 것은 언제나 극소수에 불과하다. 그들은 그저 무의미한 동작을 반복할 것이다, 마치 불교 세계관의 끝없는 윤회처럼.


왕은 모든 것이 반복될 것을 암시하며 퇴장한다. 아니, 잠시 무대 위를 떠난다.

<오래된 방해꾼....넌...남아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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