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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JHALOFF란 아이디엔 별다른 의미가 없습니다. 그저 러시아사람처럼 보이게 만든 글자들의 나열입니다.
물론 각각의 글자엔 의미가 있지만, 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하겠습니다.


(2-2) 존 쉐이드, <창백한 불꽃> - 그림자 해석하기 프로젝트- 블라디미르 나보코프



이번에 읽은 존 쉐이드라는 이름의 다소 생소한 시인의 마지막 유작이라는 <창백한 불꽃>은 문학동네에서 번역되었고, 그 제목과 두께 때문에 먼저 손이 간 기이한 책이었다. 별도의 정보 없이 무턱대고 책을 펼쳤는데, <창백한 불꽃>은 그의 미완의 원고를 정리한 ‘서사시’와 그의 친구이자 편집자로서 이 원고를 정리한 찰스 킨보트의 주석들로 구성되어있고 이는 당시 미국에서 출판된 형식 그대로라고 한다. 

기이하게도 시 자체는 999행의 미완의 시였지만, 그 주석의 분량 때문에 시집치곤 무척이나 두꺼웠다.



5-60년대 미국에서 활동했다는 이 시인은 당대의 대가였던 로버트 프로스트류의 시인이라는데, 그런 배경을 알고 나서 읽은 탓인지 시인의 자연물을 이용한 다채로운 비유들이 우선 눈에 들어왔다.



물론 존 쉐이드의 이 기묘한 장시는 얼핏 보기엔 전통적이고 때론 단조로운 부분도 없지 않아 있다. 그러면서도 T.S. 엘리엇의 시들을 패러디하고 교묘하게 조롱하는 면 등은 현대적이게 보이게도 한다. 



<태양은 도둑이야, 그의 거대한 장관으로

광대한 바다를 강탈하지. 달도 순전히 도둑에 불과해,

그녀의 창백한 불꽃은 태양으로부터 낚아챘지.>

- 윌리엄 셰익스피어, <아테네의 티몬(타이먼)>



존 쉐이드가 아마도 제목으로서 인용한 인간혐오자 티몬의 대사는 말 그대로 이 시의 성격을 나타내는 듯싶다. <창백한 불꽃>은 결국 삶의 그림자를 탐구하며 자신에게 있지 않은 것을 교묘하게 훔치려는 한 삶의 회고록이다.



<나는 죽은 여새의 그림자였다.

창유리에 비친 거짓 창공에 속은

나는 잿빛 솜털의 얼룩이었다 – 그럼에도 나는

계속 살아서 날아다녔다, 창유리에 비친 하늘에서.

집안에서도 마찬가지, 나는 둘로 만들곤 했다

나 자신을, 나의 램프를, 접시에 놓인 사과를.

-p.39, 창백한 불꽃>



존 쉐이드는 시의 시작을 다채롭고 교묘한 비유들로 독자의 시선을 혼란스럽게 만든다. 이러한 화려한 비유로 우리는 쉐이드가 말 그대로 '그림자', 그것도 죽은 이의 그림자에 불과하며 모든 것을 '만들어야했음'을 알 수 있다.



<나의 신은 요절했다. 신을 숭배하는 것은

굴욕이며, 숭배의 전제도 부적절하다고 여겼다.

자유로운 인간은 신이 필요 없다. 하지만 나는 자유로웠던가?

-p.44, 창백한 불꽃>



형식을 제외한 주제나 그 표현만으로도 사실 <창백한 불꽃>은 괜찮은 시가 될 수 있을지 모른다. 이 시의 핵심적인 주제 중 하나는 결국 살아가는 그림자의 피할 수 없는 죽음에 대한 성찰이다. 물론 여기엔 전적으로 쉐이드의 가정사가 깊게 관여되며 자연스럽게 죽은 황여새의 그림자는 자신의 삶을 토로하는 고백록을 작성한다.



<나는 죽은 여새의 그림자였다

창유리에 비친 허위의 먼 풍경에 속은

나는 두뇌도, 오감(그중 하나는 남다른)도 있었다.

그러나 그것 말고는 그저 굼뜬 괴짜였다.

-p. 45-46, 창백한 불꽃>





<삼단논법: 다른 사람들은 죽는다, 하지만 나는

다른 사람이 아니다, 그러므로 죽지 않는다.

공간은 눈 속에서 벌레처럼 들끓고, 시간은

귓속에서 노래를 부른다. 이 북새통에 내가

갇혀 있다.

-p.50, 창백한 불꽃>



그러나 창백한 불꽃을 써내려가는 존 쉐이드는 아직은 죽음과 마주하지 않았기에 결국엔 내내 삶에 대해 이야기할 수밖에 없다. 이러한 기묘한 사실은 그가 시의 마지막 부분에 와선 시를 쓰고 있는 자신과 마주하고, '999행'을 써내려갔을 때 실제로 불행한 죽음을 맞이했다는 점에서 작품 외적으로 더욱 아이러니하게 만든다.

이 책의 주석을 단 쉐이드 연구가 킨보트에 의하면, <창백한 불꽃>은 1000행으로 구성될 예정이었고, 그 마지막 행은 이 시의 첫 행과 같은 구절로 마무리될 예정이라고 한다. 하지만 이쯤에 와선 과연 쉐이드가 그 마지막 행을 불행한 사고가 없었어도 붙였을지 의문이 든다.

애당초 죽음이 오기 전의 삶에 관한 시라면, 그의 의도에 따라 미완이 될 수도 있지 않았을까?



이런 점을 고려할 때  (더 많은 부분도 고려의 대상이지만) <창백한 불꽃>은 한국 독자들에게 다소 생소한 50년대 미국 시인의 최후의 불꽃 그 자체로서도 충분히 즐길만한 멋진 장시가 될 것이다.



하지만 이 책의 본문인 <창백한 불꽃>만의 감상은 여기까지고, 난 책 외적인 부분에 대해서도 이야기하고 싶다.

두꺼운 분량의 주석을 차지하는 만큼, 난 이 시가 무척이나 난해하거나 레퍼런스적으로 흥미로운 면이 가득한 줄 알고 킨보트 박사가 붙인 주석을 하나하나 따라가 보았다.

그런데 읽을수록 이 책의 자칭 연구가는 시와는 관련 없는 이상한 소리를 하고 있었는데, 굳이 이런 부분까지 국내 번역판에 소개를 했어야했는지 의문이다. 

주석이란 무엇인가? 결국은 작품에 관한 해설이자 설명이고, 작품 없이는 존재할 수 없는 존재다. 

물론 킨보트 박사가 말 그대로 지껄이는 기이한 말들은 간혹 흥미롭기도 하였지만, 시와는 전혀 무관하였다. 차라리 자신만의 작품을 따로 쓰지, 괜히 남의 작품의 그림자에 숨는 짓은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시는 나쁘지 않았지만, 나머지 부분에선 책과 상관없었으므로 너무나도 별로였다. 이쯤되면 킨보트 박사가 과연 저명한 존 쉐이드 연구자인지도 의심이 될 정도로.

아무튼 존 쉐이드의 다른 시집들도 소개된다면 읽어볼 의향은 있다. 물론 킨보트의 주석이 없는 녀석으로!




















물론 이 책이 ‘시집’이고, 이 책의 저자가 정말로 존 쉐이드였다면 위와 같은 감상은 타당했을지도 모르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창백한 불꽃>은 킨보트의 서문, 쉐이드의 시, 킨보트의 주석과 미주로 구성된 나보코프의 소설이다.

개인적으로 이 책을 처음 읽은 이후론 많은 이들이 그러하듯 가장 사랑스러운 나보코프의 최고 걸작으로 남아있었는데, 드디어 문학동네에서 한국어역본으로도 다시 한 번 읽어볼 기회가 생겨서 무척이나 기뻤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독자인 내가 아는 나보코프라면, 과연 이 감상을 쓰는 것이 옳은지, 조금 회의감이 들기도 한다. 내가 아는 나보코프라면, 고고하게 홀로 진짜 예술가로서 밑을 내려다보고, 독자들을 그리 달가워하지 않으며 특히나 킨보트 같은 독자들을 비웃을 테니까.

하지만 나 또한 수많은 킨보트들 중 한 명으로서 그라두스를 기다려야하지 않겠는가?



처음 이 책을 읽었을 때는 자연스럽게 나보코프의 또 다른 걸작이자 악명 높은 <롤리타>와 겹쳐서 읽었던 기억이 있다. 정교하게 가짜 예술가였던 험버트 험버트와 퀼티를 처형시키는 나보코프의 그림자 아래에서 <창백한 불꽃> 또한 가짜를 처단하는 진짜 작가 나보코프의 놀이로 해석했다.

물론 지금도 이 해석 자체는 어느 정도 진짜 불꽃에 가깝지 않을지, 그렇게 킨보트로서 생각해본다. 나보코프의 세상 속에서 오로지 진실 된 진짜 천재, 참된 재능을 가진 예술가는 오직 나보코프 자신뿐이며 그의 수많은 놀이들은 자신이 진짜임을 증명하기 위하여 수많은 가짜들을 처단하는 놀이와도 같다.


분명 찰스 킨보트는 그러한 수많은 가짜들 중 하나일지도 모른다. 이미 <창백한 불꽃>이라는 제목, 희미한 불꽃에서부터 나보코프의 웃음소리가 저 너머에서 들려오는 듯하다.

앞서 시에 대한 감상에서도 언급했듯 ‘Pale Fire’는 인간혐오자 타이먼의 대사에서 따왔고, 원본의 대사에서부터 태양의 불꽃을 훔쳐야 빛날 수 있는 달과 같은 킨보트를 조롱하는 듯하다.

킨보트는 서문에서부터 자신만만하게 자신의 예술성을 보이고자 한다. 그는 존 쉐이드를 조종하여 자신에 관한 시를 쓰게 만든다고 믿으며 그의 참된 이해자라고 믿는다. 따라서 킨보트의 주석은 킨보트의 관점에서는 <창백한 불꽃>을 진정으로 완성시키는 길이 되며, 그 자체로서도 빛나는 예술작품과도 같다.

하지만 그의 주석을 읽는 우리 독자들은 결국 본질적인 문제에 계속 긴가민가할 수밖에 없다. 과연 주석은 그 자체로서 있을 수 있는가? 과연 그림자는 원본이 되는 물체 없이 있을 수 있는가?

안타깝게도 그럴 수 없을 것이다. 자연스럽게 킨보트의 우스꽝스런 자만과 망상은 마치 존 쉐이드의 시처럼, 유리창에 비친 가짜에게 홀려서 죽어버린 여새의 비극이 되어버린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소설로서 <창백한 불꽃>을 다시 한 번 생각해보면 조금은 달라질지도 모르겠다.

이미 험버트의 추악한 고백록에 익숙한 나보코프 독자들이라면 알겠지만, 결국 우리의 킨보트 박사의 장대한 고백 또한 우리 독자들은 믿을 구석이 하나도 없다. 그렇다면 자연스럽게 우리는 나보코프의 놀이 속에서 모든 것을 의심할 수밖에 없게 된다.

킨보트는 분명 ‘거짓말’을 하고 있어 보인다. 그렇다면 어디까지가 그의 거짓말인가? 애당초 존 쉐이드는 정말로 있는 것일까? 그의 이야기들은 진실인가, 아니면 정말로 망상에 불과한가? 그가 ‘킨보트’는 맞는 걸까?


한때는 수수께끼 같은 장시 <창백한 불꽃>의 저자가 킨보트 혼자가 아닐지, 생각해본 적도 있지만, 이번에 읽으면서 그 생각은 바뀌었다. 다시 읽어본다면 또 다시 바뀔지도 모르고, 그것이 나보코프의 놀이 과정이겠지만, 아무튼 지금은 그렇다.

결국 이 책은 킨보트를 향한 희비극인데, 킨보트의 본질은 진짜가 되고 싶은 그림자이며 따라서 <창백한 불꽃>의 주석을 쓰면서 자신이 진짜 <창백한 불꽃>의 저자가 되려는 웃-픈 노력이 곧 킨보트 그 자체니까. 그가 시의 저자라면, 애당초 이런 노력은 무의미할 것이다. (물론 그런 무의미함을 조롱하려는 것이 나보코프의 의도라면, 나 또한 킨보트처럼 조롱당하고 있겠지만)



걸작이 그러하듯 사실 이 책도 너무나도 다양한 방식으로 읽고, 즐길 수 있다. 대표적으론 역시 나보코프의 수수께끼를 풀고자 노력하는 것일 거다. 과연 이 책 속 진실은 무엇이며, 킨보트의 주석 속의 진짜 이야기는 무엇인지, 때론 나보코프가 주석 읽는 방식이나 색인의 숫자들을 따라가며 말 그대로 퍼즐을 맞추듯 새롭게 읽어볼 수도 있다.

하지만 단순히 그런 수수께끼들만 있다면 이 책의 매력은 반으로 줄어들 것이다.



이 책이 내게 너무나도 사랑스럽고, 애처롭게 느껴지는 것은 역시나 이 책이 이 책을 읽는 우리들과 너무나도 닮았기 때문일 거다.



킨보트가 자신이 쉐이드의 진실 된 이해자라고 스스로 생각하고, 그의 작품들의 온전한 권리가 있다고 망상에 빠지며 자신이 그의 작품에 큰 영향을 끼치고, 자신이 원하는 방식대로 쓰이고 있다는 망상은 분명 나보코프의 시선엔 비웃음의 대상일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결국 이러한 ‘과장’은 으레 우리 독자들이 좋아하는 작가에게 하는 방식과 흡사하지 않은가? 

또한 이 책, 시와 주석, 그리고 모든 것을 읽어 내려가는 과정 속에서 독자가 각자 이 이야기를 받아들이는 방식은 흡사 킨보트가 자신만의 주석을 써내려가는 것과 마찬가지일 거다. 좋은 책을 읽으면서 자신도 이런 글을 쓰고 싶고, 이런 작가가 되고 싶다는 생각을 안 해본 독자가 있을까? 누구나 킨보트처럼, 자신이 더는 그림자가 아닌 불꽃이 되고 싶은 마음은 한구석에 있을 거다.


물론 이러한 방식에서 여러 의문점들은 그대로다. 킨보트가 우리 자신들이라면, 쉐이드나 그라두스는 어떠한가? 쉐이드의 경우 우리가 사랑하는 작가라고 해보자. 물론 그마저도 만족스럽진 않지만, 아무튼 그보단 그라두스를 생각해보자.

지금 이 순간마저도 그라두스는 의문투성이다. 그의 이야기나 그라는 인물의 매력이 떨어져서가 아니다. 그럼에도 그는 대체 무엇일까?

한 편으론 이런 생각을 해본다. 그라두스조차 킨보트의 망상세계, 혹은 그림자 세계에서 변형된 가짜라도, 결국 킨보트의 주석의 끝은 그의 등장으로 끝나버리게 된다.

그라두스와 쉐이드, 킨보트의 만남으로 킨보트는 여전히 자신이 불꽃의 그림자에 불과하다는 걸 깨닫고, 잠시 동안 약간의 진실을 보여주는 듯 보인다. 그리고 그는 새로운 그라두스를 기다리며, 그 기다림이 끝날 때 어떤 방식으로든 모든 것은 끝날 것을 예고한다.

이런 점에선 그라두스는 말 그대로 끝이 아닐까? 어떤 매력적인 이야기라도, 설령 그것이 미완이라도 우리는 마지막 페이지와 마주해야한다. 그 이후에 우리가 여전히 그림자든, 아니든, 다른 이야기를 찾든, 현실로 돌아가든, 끝을 마주해야한다. 마치 존 쉐이드가 자신의 시를 통하여 죽음과 마주하듯.


사실 킨보트로서 이 책의 마지막, 색인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젬블라 – 머나먼 북쪽의 나라’는 흡사 러시아 혁명으로 망명자가 될 수밖에 없었던 나보코프 개인의 향수처럼 느껴진다. 그런 점에서 드문드문 이 책은 나보코프 개인의 삶에 관한 어떤 주석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 또한 킨보트이며 그러한 존 쉐이드-나보코프가 원하는 방식대로 주석을 달진 않을 것이다.  



물론 우리의 오만하고, 질투할 수밖에 없는 나보코프의 시선엔 이러한 감상 자체는 쓸데없는 그림자의 날개짓이며 진짜가 되고 싶은 킨보트들의 그림자는 무의미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아무래도 좋다. 그러면서도 우리 킨보트들은 계속 그라두스를 기다릴 것이다. 창유리의 비친 하늘 속이라도 계속 날아다니고 싶기에, 그림자라도 진짜 불꽃이 되고 싶기에. 

페터 바이스, <소송 / 새로운 소송> - 한 마리 개처럼 독서일기-희곡




가끔 한국에 이렇게까지 다양하게 번역되고 소개된 것이 놀라운 작가들이 몇 있는데, 페터 바이스도 그 중 하나인 거 같다. 이는 전적으로 작가의 역량 문제가 아니라, 한국 번역 및 출판 풍토를 일반적인 독자 입장에서 생각해볼 때 매우 기이한 사례로서다.
그의 소설 역작 <저항의 미학>에서부터 희곡 <소송>과 <새로운 소송>까지 생각 외로 한국은 바이스를 좋아하는 것일까? 그런 의미에서 두 차례 소개되었지만 모두 절판된 그의 최고 존엄 <마라/사드>가 다시 새로운 모습으로 소개되기를 기원한다.

한국 번역본은 <소송>과 <새로운 소송> 두 편을 동시에 수록하는데, 제목에서부터 알 수 있듯 카프카의 <소송>에 기반을 두고 있는 희곡군이다.
<소송>은 전적으로 카프카의 <소송>의 희곡화다. 원작에 충실하고, 모든 희곡화가 그러하듯 바이스 본인의 해석으로 바라보는 요제프 카의 처형극이지만, 카프카의 원본을 모른다면, 이 희곡만으로도 <소송>을 즐기기는 괜찮을 것이다.
다만 전적인 한계는 명확하다. 굳이 카프카의 것을 놔두고, 이 희곡을 읽을 필요가 있는가? 이 본질적인 의문으로 바라보면 이 희곡은 실패작이다. 물론 모든 재창작이 실패작인 것은 아니다. 하지만 바이스의 <소송>은 굳이 <소송>의 사례에 더할 매력까진 없다.

바이스 본인도 이 한계를 명확히 알고 있었고, 그의 <새로운 소송>은 제목처럼 그가 새롭게 쓴 소송이다. 자신의 말년에 거의최후의 작품처럼 쓰여진 이 희곡은 바이스의 생존 당시의 현대로 무대를 옮기고, 줄거리도 카프카의 <소송>과는 몇 가지 틀을 제외하면 다르며 그 배후엔 거대한 기업들의 그림자가 자리잡고 있다. 물론 '새로운'이란 제목만큼 새로우면서도 과거의 카프카의 뿌리를 완전히 단절할 순 없다. 하지만 생각해본다면, 요제프 카의 삶을 어떤 식으로 보이고 해석하든 그는 요제프 카일 것이므로 바이스의 방식이 틀렸다고 할 순 없을 것이다.

<소송>보다는 나을지 모르지만, 사실 <새로운 소송>도 썩 만족스럽진 못하다. 이 무대 뒤에 자리잡고 있는 카프카의 아우라가 너무나도 큰 까닭일까?
바이스를 여러 방식으로 즐기고 싶다면 좋겠지만, 그의 대표작을 읽고 싶다면 역시나 추천하고 싶진 않다.

바이스를 진정으로 즐기려면  아무리 생각해도 역시 <마라/사드>의 재출간 밖에 답이 없다.



페터 바이스, <아우슈비츠 강제수용소> - 증언의 기록극 독서일기-희곡


원제는 <수사>지만, 한국어역본으론 <아우슈비츠 강제수용소>로 소개된 페터 바이스의 이 희곡은 한국어역에서 직접적으로 알 수 있듯 아우슈비츠에 관한 이야기, 보다 정확하게는 홀로코스트를 둘러싼 재판 과정에 관한 희곡이다.
물론 바이스 본인은 극의 서문에 이 극을 표현할 시, '재판'의 재구성이 되지 말 것을 강조하였으나 이 극의 성격상 매우 어려운 주문임은 분명해보인다. '기록극'으로 흔히 이러한 바이스의 극들을 설명하기도 하는데, '기록'인 만큼 실제 작중 대사들은 바이스가 참관하였던 아우슈비츠 재판 기록에서 따온 것들이다.
이 극은 '오라토리오'로 정의되며 여러 개의 칸토로 구성되어 단테의 신곡을 모방한다. 물론 신곡 중 아마도 '지옥편'을 모방하고 있는게 아닐지, 이 극이 다루고 있는 소재와 인물들의 묘사로서 쉽게 생각할 수 있으리라.

바이스 본인 또한 유대계 독일인이었고, 이 문제로 2차 대전 당시 피난을 간 경력도 있어, 어떤 의미에서 이 희곡은 그의 삶과도 연관될지도 모른다. 물론 이 극을 무대에 올리는 것은 쉽지 않아 보인다. 이 극은 여러 '익명'으로 표현되는 증인들과 피고인들, 재판장과 변호사, 그리고 검사의 목소리로만 구성되며 실제 육신을 가진 배역이 갖춰야할 행동이나 표정 등은 막연히 유추할 수밖에 없다. 무엇보다도 극으로 올리기엔 그 분량이 길고, 또 관객으로선 집중하기 어려울지도 모른다.

홀로코스트 또한 인류의 비극 중 하나였고, 이러한 소재를 중심으로 다루는 작품들은 언제나 어떠한 감정과 교훈을 독자에게 주는 것은 분명하다. 바이스의 희곡 또한 그러하다.
다만 앞서 언급하였듯 형식적인 측면에선 다소 단조롭고 지루하며 비록 '기록극'이란 특성을 감안하여도 이 효과가 정말로 좋은지는 조금 의문을 표할 수밖에 없다. 물론 이 극이 다루는 살아남은 자들과 죄를 부정하려는 자들의 재판 자체는 좋을지 몰라도, 굳이 이 소재를 극이란 형식으로 읽어야할 필요성까지 느끼긴 쉽지 않다.

바이스의 또다른 작품들을 읽어보고 싶은 이라면 접해도 나쁘진 않겠지만, 차라리 그의 소설인 <저항의 미학>을 더 추천한다. 
<마라/사드>에서도 언급했듯 바이스의 최고작은 언제까지나 <마라/사드>가 될 것이다. 브레히트과 아르토를 무대 위에서 화해시키고, 정신병자들이 연기하는 사드의 희곡을 무대 위에 그대로 올린 것만으로도 설령 같은 실제 기록을 극에 옮겨도 다를 수 있음을 바이스는 이미 자신의 작품으로 증명했다. 기록극의 실제 기록을 거의 날 것처럼 가지고 오는 것을 생각해볼 때, <수사>는 형식으로서의 한계를 보여줄 지 모르나, <마라/사드>는 그걸 뛰어넘는다.
그렇다고 이 희곡이 잘 쓰여지지 않은 것은 아니다. 어디까지나 상대적인 관점이므로 홀로코스트를 다룬 좋은 희곡을 읽고 싶다면 추천한다. 평가가 그리 좋지 않은 것처럼 느껴지지만, 사실 <마라/사드>를 제외하더라도 바이스의 다른 희곡들도 읽어보고 싶을 때 자신있게 추천할 수 있는 희곡이다.


라이너 슈타흐, <어쩌면 이것이 카프카> 독서일기-산문




카프카는 20세기의 전설이고, 국내에도 전집이 번역되고, 관련된 책들이 여럿 소개되었던 만큼, 이 책 또한 소개되는 것은 기이한 일은 아닐 거다.
라이너 슈타흐는 본래 비교적 최근에 나온 3권 짜리 카프카 전기로 유명하였는데 각 시대마다 나오는 작가 전기의 결정판이 있듯이, 슈타흐의 전기 또한 우리 시대의 카프카 전기의 결정판이라 할 수 있다.
물론 3권으로 구성된 만큼 그 분량이 방대하여 쉽게 읽기 버겁고, 또한 아직 국내에 번역이 되진 않았지만, 조금 더 가볍고 쉽게 즐길 수 있는 판본이 대신 소개되었으니 바로, <어쩌면 이것이 카프카 - 99가지 습득물>이다.

말 그대로 카프카의 일기나 산문, 혹은 그에 관한 글과 일화들을 99가지 짧은 산문으로 소개하는 '카프카' 입문서다. 다만, 이는 작가 카프카가 아니라, 인간 카프카란 점을 명심해야할 것이다. 카프카를 처음 접하는 이들이 읽기 보단 카프카에 익숙한 이들이 곁들여 읽는 것이 좋다.

'전설'이 된 만큼 자연스레 카프카에 관한 실체없는 소문도 많지만, 슈타흐의 본질적인 목적인 어디까지나 실제로 존재하였던 인간 카프카의 모습들이다. 부조리한 세계의 주인으로 으레 독자들이 가질 환상을 부수면서도 인간적인 카프카의 일화들을 보여주는 것은 카프카 독자들로 하여금 색다른 체험을 하게 만들 것이다.
물론 우리는 '어쩌면', 혹은 본래 제목의 물음표에 주목을 해야한다. 이것이 정말로 카프카인가? 물론 인간 카프카의 몇몇 모습일지도 모른다. 그러면서도 우리가 으레 원할 절대적이고 그 자체로 모든 것을 충족하는 답이 될 순 없다.
슈타흐가 소개하는 일화 중 인상 깊은 것은 카프카의 눈동자에 관한 일화이다. 컬러 사진이 없으므로 우리는 그의 지인들의 증언을 추정해볼 뿐이지만, 지인들은 모두 각기 다른 답을 내놓았다. 누군가는 푸른색, 혹은 회색으로 기억했지만, 그나마 객관적으로 보일 만한 그의 여권 기록에선 '푸른 회색'으로 기록한다고 한다.
때론 전설을 전설로 대하거나, 전설을 전설이 아닌 진실로 대하는 것, 양쪽 모두 중요하다. 허나 가장 좋은 것은 역시 카프카의 글을 읽는 것일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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