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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HALOFF에 대한 발음은 정해진 것이 없습니다. 쟐롭, 쟐로프, 자알로프 등등 원하시는데로 부르시면 됩니다.


사실 JHALOFF란 아이디엔 별다른 의미가 없습니다. 그저 러시아사람처럼 보이게 만든 글자들의 나열입니다.
물론 각각의 글자엔 의미가 있지만, 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하겠습니다.


지그지문트 흐르지자노프스키, <미래의 기억들>外 - 죽느냐 잠드느냐 독서일기-소설


(짤은 검색해서 누군가가 잘 찍은 표지)





지그지문트 흐르지자노프스키는 한국에서도 생소하지만, 사실 러시아에서조차 살아생전 거의 발표를 하지 않았고, 죽은지 수십년이 흐른 1980년대에서야 조금씩 알려지기 시작한 작가이므로 여러모로 생소한 작가지만, 분명 고골의 정통 후계자이자 러시아의 또다른 기괴한 작가이므로 기회가 된다면 읽을만한 가치는 충분할 것이다.



물론 굳이 지금 시점에서 이 감상을 끄적이는 것은 2달 정도 후에 그의 새로운 단편선집이 영역본으로 나올 예정이고, 영미권에서 그의 5번째 소설집이 소개되는 시점을 앞두고 있는 지금, 국내 출판사들 중 누군가가 그를 국내에 소개하기를 기원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흐르지자노프스키의 영역본들에 수록된 번역자들의 서문에 따르면, 무엇보다 눈여겨볼만한 점은 그가 청소년 시절 칸트의 <순수이성 비판>을 읽고, 큰 충격을 받았으며 '나'와 'not-나'의 경계가 무너지는 혼란을 겪었다는 대목이다.



청소년 시기에 칸트를 읽었다는 점에서 이미 충분히 미치광이라고 할 수 있지만, 어린 시절 큰 트라우마 덕분인지, 그의 작품 세계에서 사실 칸트적 체계는 빼놓을 수 없는 요소긴 하다. 당장, 그의 작품들 중엔 칸트의 물자체에 도달하려는 팔 뒷꿈치 핥는 서커스 묘기꾼의 이야기도 있으며, 이야기할 <이성의 13번째 범주> 같은 경우도 있으니까.



다만, 그의 작품 체계들을, 적어도 내가 읽은 범주 내에서 정리하자면, 크게 두 부류로 나눌 수 있을 듯 하다. 첫번째는 역시 순수한 광기, 혹은 칸트적인 요소가 깔려있는 작품들. 말 그대로 보르헤스를 연상하듯, 그러한 지적 놀음이나 기괴함 등이 대부분을 차지하는 부류다. 다만, 두번째 부류는 이번에 이야기할 단편들과 연관이 깊다. 



흐르지자노프스키는 소비에트 러시아에서 살던 이였으며, 그의 소심함과 숙청되는 작가들로 인한 두려움으로 대부분의 작품을 발표하지 않았다. 물론 그가 용기를 내어 작품을 발표했더라면, 그 또한 다른 동료들과 함께 굴라그 여행을 갔을 가능성은 높다. 두번째 부류는 이러한 소련과 스탈린 지배에 대한 공포와 풍자적 요소가 강한 부류니까.



그리고 <미래의 기억들>을 비롯한 이 선집의 단편들 또한 이러한 2번째 부류에 속하는 기괴한 이야기들이다. (물론 그렇다고 칸트나 기타 기괴한 보르헤스적 요소들이 없는 것은 아니다)



웰스의 <타임머신>을 대놓고 비트는 <미래의 기억들>처럼, '시간 절단기'를 개발하여 혼돈의 러시아 혁명 시기와 '확정되지 않는 미래'로 여행을 떠나기도 하는 표제작인 중편 <미래의 기억들>처럼 은근히 비트는 이야기에서부터, 대놓고 소비에트엔 '논리'가 존재하지 않는다며 기괴한 철학적 요설들을 내뱉는 이들과 조우하지만, '논리'가 존재하지 않기에 그들과 동조할 수 없는 <붉은 눈>처럼 직접적인 공격 등 그 범위는 다양하다.



물론 흐르지노프스키가 단순한 풍자로 머물렀다면, 오늘날 재평가되는 위치를 가지진 못했을 것이다.



소비에트의 비좁고 폐쇄적인 아파트들을 풍자하는 것처럼 보이면서도, 수수께끼의 쿼드라투린 물질을 바를 경우, 실수로 '무한정' 확장되는 방에서 오는 역설적인 폐쇄적 공포를 그리는 <쿼트라투린>처럼, 그 또한 대가들이 그러하듯, 현실에서 소재를 얻지만, 거기에서 머물지 않는다.



우리에게는 이미 보르헤스가 있고, 또 카프카가 있지만, 왜 굳이 흐르지자노프스키가 필요할까?



그가 단순히 러시아의 보르헤스, 혹은 카프카라는 연구자들의 칭호 때문예? 



사실 이러한 명칭은 그를 잘 모르는 이들을 향한 홍보에 가깝지만, 말 그대로 홍보 문구에 불과하다.





자신의 장례식 등을 참석하기 위해 되살아나는 시체와 부활을 부정하기에 반-종교 위원회 소환을 외치는 소비에트의 이야기를 그리는 <이성의 13번째 범주>나 모든 것이 거꾸로이기에, 꿈 속 이야기를 그리며, '사느냐 죽느냐' 대신 '죽느냐 잠드느냐'를 외치며 현실을 꿈으로 대체하기 위해 꿈들의 반란을 그리는 <분기선>처럼 





모든 걸 거꾸로 뒤집으면서도 자신만의 기이한 체계 하에서 리얼하게 그리는 흐르지자노프스키는 흐르지자노프스키다.



물론 동시대적으로 카프카 등과 같은 작가들이 출현한 것은 일종의 시대정신일지도 모른다.



역자의 썰처럼, 흐르지자노프스키는 말년에야 처음으로 카프카를 알고, 읽었는데, 동질감을 느껴 놀랐다고 한다.







그가 놀랐듯, 이 폴란드계 우크라이나 출생의 기묘한 러시아 작가를 조만간 한국어로도 만나봐야하지 않을까?


로렌스 (2) <호저의 죽음에 대한 명상>, 혹은 왕관 프로젝트-D.H. 로렌스


<사람은 말이든, 어떤 동물이든 파괴할 수 있다>
- <호저의 죽음에 대한 명상>, D.H. 로렌스



<호저의 죽음에 대한 명상>과 일련의 산문들은 D.H. 로렌스의 중후기 산문들의 모음집으로 1925년에 출간되었고, 몇몇 산문들은 그의 대표적인 산문이기도 하다. 물론 '대표적'이란 것은 그의 문제적인 산문들을 의미할지도 모른다.

흔히 국내의 로렌스에 대한 소개에서 자연으로의 회복 등이 강조되지만, 사실 이러한 부분에 대한 해설은 조금 부족한 듯싶다. 요즘과도 같은 자연 보존이나 동물 보호, 혹은 자연친화적인 운동과 달리, 로렌스는 오히려 철저하게 인간의 위계를 긍정한다. 아니, 그에게 있어 모든 것은 투쟁이자 곧 삶이며 이러한 정점은 인간, 아니, 자기 자신이다.

그가 외치는 자연으로의 회복은 아마도 약육강식이 그대로 존재하는 날 것으로의 자연으로의 회복에 가까울 것이다.


그는 부분적으론 동시기 작가들과 사상가들이 그러하듯 니체의 영향을 받았고, 또한 헤라클레이토스의 영향을 받았다. 그는 철저하게 이분법적이며 이원론적이다. (아이러니하게도 그에게 헤라클레이토스 같은 고대 철학자를 소개한 이는 헤라클레이토스 같은 이를 증오하는 러셀이었다)

성과 속이 나뉘고, 삶과 죽음이 나뉘고, 남성과 여성이 나뉘고 인간과 자연은 나뉜다. 

그러나 그의 체계 아래에서 이러한 분리된 이원론은 끝없이 결합과 결별을 반복한다. 마치 그가 스스로 상징으로 삼았던 불사조처럼, 죽음과 태어남을 반복하는 불사조처럼, 끝없는 투쟁 속에서 성과 속은 합쳐지고, 남성성과 여성성은 결합하고, 다시 분리됨을 반복한다.

이러한 그의 체계가 가장 잘 드러나는 것은 역시 이 산문집에 수록된 그의 대표작 <왕관>이다.

앨리스에서도 인용된 동요 <사자와 유니콘>처럼, 왕관을 두고 사자와 유니콘은 끝없이 투쟁한다. 그러나 어느 한 쪽의 완전한 승리로 끝나선 안 된다. 사자든, 유니콘이든 그들의 목적은 투쟁을 하기 위함이며 상대가 사라지는 것은 자기자신의 무의미로 이어진다. 왕관은 더는 중요하지 않다. 처음에 왕관을 두고 투쟁이 시작되었을지라도, 투쟁 자체가 중요할 뿐, 왕관은 더는 중요하지 않다.

1차 대전에 관한 글을 쓰려는 동료들과의 프로젝트에서 로렌스가 이러한 다소 늘어질 정도로 반복되는 이 수수께끼 같은 글을 쓴 것은 참으로 의미심장하다.,


그렇다면 이러한 끝없는 투쟁은 대체 어디로 향하는가?

물론 로렌스는 전문적인 철학자가 아니라, 철저한 문학가였고, 그의 산문들은 문학적으론 즐겁게 읽힐지언정, 때론 흥분과 격정으로 가득한 소음처럼 느껴지기에 엄밀한 논리체계를 기대하긴 어렵다.

그렇지만 그는 자신의, 아니 그의 체계 안에서 가장 중요한 걸 언제나 외치므로 그 답은 쉽게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니체가 외쳤듯, 로렌스 또한 결국 '삶'을 외친다.

그에게 있어 성적인 욕망을 표현하는 것은 중요한 일이었지만, 이조차도 사실 삶에 대한 도구적인 이용에 가깝다. 

북미 농장 생활을 하며 누구나 증오하는 호저를 끝내 사냥하고 이를 통한 명상을 하는 그는 식물보다 동물에게 더 '활기'가 있으며, 동물보다 사람에게 더 활기가 있기에, 이러한 파괴 행위를 종국적으로 긍정하며 오히려 이러한 투쟁들을 삶의 회복을 위한 길이란 명상의 답을 얻는다.



사실 이러한 그의 과도기적인 면모를 보면, 그에 대한 지난 수십 년간 이루어진 비판들이 허공에서 생겨난 것은 아니란 걸 느낄 수 있다.

몇몇 산문에선 그는 영국의 정치 생활에 염증을 느끼고, 대중에게 회의감을 느끼며 많은 모더니스트들이 겪는 거대한 힘과 지도자에 대한 갈망을 은근히 드러내기도 한다.

기독교로 삶의 활기를 잃어버린 낡은 유럽의 죽음을 원하고, 이를 대체할 수단으로 투쟁이 넘치는 아즈텍 신앙 등의 복권과 대체를 통하여 '재생'을 꿈꾸는 모습 또한 사실 오늘날 일반적인 독자의 시선으로 완전히 받아들이긴 어렵다.


물론 이러한 로렌스의 변화 자체는 그가 죽을 때까지 끝없이 이어졌으므로, <호저의 죽음에 대한 명상> 등으로 온전히 그를 파악하는 것은 부분만을 보는 일이긴 하다.

다만, 로렌스의 체계를 읽다보면, 그가 일컫는 모든 것, 남성이든 여성이든 하나하나가 어떤 실체가 아니라, 상징들처럼 느껴지는 경향이 없지 않아 있다. 적어도 그의 작품 세계들을 이해하는데 좋은 길잡이가 되어줄 것은 분명하다. 

특히, <왕관> 등의 경우는, 오히려 그의 <미국 문학 강의> 같은 도구적으로 자신의 체계를 설파하는 책보다 조금 더 직설적으로 로렌스의 체계의 기초를 살필 수 있으며, 무엇보다 그의 글 자체는 취향에 맞는다면 그 자체로도 즐겁다.


물론 나는 개인적으로 아직까지도 내가 로렌스의 글을 좋아하는 것인지, 아닌지는 확답을 내릴 수 없다.

사실, 아즈텍 신앙의 복권을 꿈꾸는 그의 악명 높은 <날개 달린 뱀>이나, 가장 문제적일 단편 <말을 타고 떠난 여인> 등을 읽다보면, 그의 생각에 대한 본능적인 거부감이 들면서도, 글 자체로서 사람을 감탄하게 하는 이중적인 면모가 있다.


이러한 생각에 대한 확신을 찾기 위해 다시 로렌스를 한 권 씩 천천히 읽고 있지만, 일단 끝까지 가봐도 답을 내릴지는 모르겠다. 사실, 왕관은 중요하지 않을지 모른다. 끝없이 죽음과 삶을 반복하듯, 로렌스와의 투쟁을 멈추지 않는 것이 로렌스가 원하는 로렌스 읽기일지도 모른다.



*사실 로렌스 산문 입문용은 아니다. 차라리 미국 문학 강의 등이 나을 것이다.
**절판이지만, 놀랍게도 국내에도 번역이 된 적은 있다.







요약: <붉은 유령들> - 20세기 러시아 고딕 단편집 독서일기-소설



알라딘은 주기적으로 외서 재고떨이 세일하는데



거기에서 2천원에 팔고 있기에 바로 질렀다.



이 단편집 자체는 발레리 브류소프 단편 수록되어있어서 언젠가 질러야지 했는데, 책 와서 읽어보니까 제값 주고 사도 괜찮았을 만큼, 구성이 알참.


푸슈킨이나 레르몬토프 등이 악마 등이 나오는 시들도 많이 쓰고, 고골의 이야기들도 그렇듯, 러시아 문학에서 '고딕스런 이야기' 자체는 사실 꽤나 메이저하다.


당장 도끼도 분신 모티브로 <분신>을 쓰기도 했으니까.



특히, 20세기 러시아는 소비에트와 스탈린 덕분에, '사회주의 리얼리즘'이 아니면 죽어야했고, 이런 환경에서 더더욱 고딕 이야기는 정교하게, 그리고 사회 풍자 등으로도 다가왔다. 대표적으로 불가코프가 있고.



7명의 작가의 11편의 20세기 초 러시아 고딕 이야기들 수록함. 제일 메이저는 불가코프지만, 나머지는 다소 생소하거나, 브류소프처럼 러시아 상징주의 운동을 이끌었지만, 정작 다른 나라에 번역이 거의 안 된 작가도 있음. 그리고 얼마 전에 소개한 흐르지자노프스키 단편도 있고.




발레리 브류소프, <거울 속에서>-

브류소프는 위에서 말했듯, 러시아 상징주의 운동 이끈 인물이지만, 정작 시인으로도 유명하지만, 시는 번역된 게 없어서 모르고, 소설 <불의 천사>만 읽어봤는데,



<거울 속에서>도 괜찮은 단편이다.



'거울 속 '나'의 모습이 내가 아니라, 독립적으로 움직이는 존재, 고딕 시초 <오트란토의 성>에서 초상황에서 튀어나오는 그림처럼,



1인칭 여성 화자가 거울을 보는 것에 몰두하다가, 거울 속 자신의 모습이 자신을 가두어두고, 자신처럼 행세하지만 끝내, 다시 거울 밖으로 나온다는 이야기.



그렇지만 주로 심리적인 독백으로 진행되며 무엇보다도 이 모든 것이 사실은 미친 화자의 망상인지 아닌지 의문점을 주는 괜찮은 단편.





알렉산더 차야노프, <미용사의 마네퀸의 이야기>, <베네딕토프>, <베니스식 거울> -



차야노프는 본업은 농업학자라는데, 고딕 이야기 5편을 쓴 걸로 유명하단다. 이 책에서 처음 안 건데, 무엇보다 불가코프가 이 작가에게 큰 영향을 받았고, 특히 <베네딕토프>는 <거장과 마르가리타>를 쓰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고 함.



그리고 대숙청 때 처형되었다. 스탈린, 또 너야?





<베네딕토프>는 <거장과 마르가리타>의 영향을 주었던 만큼, 우연의 일치로 학생인 화자의 이름이 '불가코프'고, 18세기 모스크바를 중심으로, 외국에서 악마와 도박을 통하여 장식품으로 된 일곱 명의 영혼들을 얻은 베네딕토프와 화자의 이야기를 다룸. '외국의 악마'나 '악마와의 거래 및 도박' 등만 봐도 거장과 마르가리타 요소고, 특히 빌라도 이야기가 많이 생각남.



<베니스식 거울>은 <거울 속에서>처럼 거울 속 상이 자신을 거울 속에 가두어놓고, 자신처럼 행세한다는, 러시아 문학에서 단골 소재인 '분신' 모티브를 다른 방식으로 전개하는데, <거울 속에서>가 주로 내적 독백으로 치중되었다면, <베니스식 거울>은 조금 더 외형적으로, 자신으로 행세하는 자아와 자신의 아내를 둘러싼 대결과 비극을 다룸.



<미용사의 마네퀸의 이야기>는 우선 형식적으론 가장 실험적이라 다양한 서술 방식이 동원되고, 한 건축사가 샴쌍둥이를 모티브로 한 마네퀸을 추적하는 기괴한 이야기.







불가코프, <붉은 왕관>, <강령회> -



<붉은 왕관>의 경우, <백위군> 같은 적백 내전을 다루는 불가코프식 단편인데, 동생의 죽음을 막지 못하여 미쳐버린 한 백군의 정신붕괴 이야기



<강령회>는 유령을 소환하는 모임의 이야기인데, 비밀 경찰의 혼을 소환하는 등, 전형적인 불가코프식 풍자





지그지문트 흐르지자노프스키, <팬텀> - 

'팬텀'이 유령을 의미하기도 하지만, 인체모형을 의미하기도 해서, 여기에선 후자의 의미로 일단 쓰임.



한 의대생이 실습 도중 죽은 아기로 만든 인체모형을 자신도 모르게 프랑켄슈타인처럼 살렸고, 세월이 흐른 후, 프랑켄슈타인처럼, 자신이 살린 이 인체모형이 찾아온다는 기괴한 이야기로, 이 생명체가 한 마네퀸과 사랑에 빠졌기에 자신의 창조주를 찾아왔다는, 프랑켄슈타인 이야기처럼 보이지만 어림도 없지~ 러시아 문학 분신 모티브 MAX...!!



거기에 이 생명체가 주장하는 <환영주의>는 기괴한 비틀린 칸트식 유사철학인데, 참 이 작가 칸트 좋아해.







알렉산더 그린, <회색 모터 카> - 기계를 혐오하여, 자신이 사랑하는 여인이 사실은 오토마톤이라고 생각하는 이의 비극.





그리고리 페스코프, <메신저>, <코 없는 여인> - 영혼을 불러내어 적백내전에 참여한 자신의 아들의 소식을 듣고 싶어하지만, 의심 덕분에 망하는 <메신저>, 그리고 정신붕괴되었기에, '코 없는 여인'과 결혼한다는 환상을 보여주는 <코 없는 여인>





파벨 페로프, <크노프 교수의 실험> - 원자와 전자를 복제하여 육신에서 영혼을 옮기는 실험을 사형수에게 하려는 크노프 교수의 실패하여 몰락하는 실험 이야기.







브류소프, 차야노프, 불가코프, 흐르지자노프스키가 제일 좋고, 나머지는 그저 그런 편이었지만

아무튼 알찬 책

세자르 바예호, <오늘처럼 삶이 싫은 날이 없었다> - 안데스에서 온 전령 독서일기-시


<삶에는 충격들이 있다, 너무나도 강한.....나는 모르겠어!>
- 검은 전령 中


남미를 대표하는 모더니즘 시인 중 하나였던 페루의 세자르 바예호는 그 삶만 봐도 빈말로라도 좋다고 할 수 없었고,
그는 언제나 삶의 수많은 충격들을 느꼈다. 자연스럽게 그의 시들은 자신의 삶에 가해진 여러 충격들을 형상화하지만, 결코 정확히 표현될 수 없다. 

그가 말했듯, 삶의 충격들을 알 수는 없다. 어쩌면 느낄 뿐.


<나는 신이
아픈 날 태어났습니다.

내가 살아 있고, 내가 고생했다는 걸
모두들 압니다. 그렇지만
그 시작이나 끝은 모르지요.>
- 같은 이야기 (tr.고혜선)


몇몇 그의 시, 주로 초기시들은 종교적으로까지 보인다. 마치 수난을 받듯, 그는 알지 못할 충격들에 대해 구원을 외친다.
신에게 고난을 호소했고, 그 끝엔 신의 고통, 혹은 신과의 결별을 선언하는 듯하다.


그의 두번째 시집 <트릴세>는 그의 명성을 오늘날 만들어준 기묘한 모더니즘적 시집이지만, 난해하기 그지 없기도 하다.

사실 '제목에서부터 그렇다. 마치 바예호의 삶에 가해진 알 수 없을 고통처럼 '트릴세'라는 단어가 정확히 무엇을 의미하지 않았으니까.

그의 친구 중 하나가 회고하기를, 사실 세자르 바예호는 이 시집에 다른 제목을 붙여주었으나 중간에 바꾸기 위하여 인쇄업자에게 연락을 했다고 한다.

그러나 이미 책의 일부가 인쇄에 들어간 상태였고, 바꾸기 위해선, 그 당시 돈으로 그다지 비싸지 않은 3 리브라를 지불해야만 했다.

물론 바예호에겐 너무나도 큰 돈이었다. 망설이며 자신도 모르게 바예호는 '3 (tres)....3.....3.....'을 중얼거리다 혀가 꼬여 트릴세란 기묘한 음을 내뱉었고, 이를 마음에 들어, 자신의 이 두번째 시집에 <트릴세>란 제목을 지어주었다는 것이 그의 친구의 설명이다.


이러힌 기묘한 일화 만큼, <트릴세>는 분명 파격적인 시집이었다. 오늘날까지도 남미 아방가르드 문학에서 동시대의 모더니스트 비센테 우이도브로의 <알타소르>와 더불어, 대표적인 시집으로 남아있는 만큼 난해하고 실험적이며 파격적이었다.

기묘한 시어들.
때론 바예호가 임의로 바꾸는 철자들이나 글자의 모양, 혹은 숫자들을 시어로 삼는 등의 기묘한 실험. 자신의 연애사를 중심으로 하는 성적 은유들.
그러면서도 여전히 존재하는 서정성까지.

<이름을 부르며 어둠 속에서 더듬대며 찾는다.
나 이렇게 혼자 내버려두면 안 돼,
나만 혼자 가둬두면 안 돼.>
- 트릴세 3 (tr.고혜선)

0을 줘도 안 된다, 1을 깨워서
서게 할 때까지는 굳게 침묵할 터이니.>
- 트릴세 5 (tr.고혜선)



그의 마지막 시집 <스페인이여! 나에게서 잔을 거두어다오>이나 유고들을 봐도, 그 형식 자체는 조금 달라질지언정, 바예호의 삶에 존재하는 무수히 많은 고통들을 마주하고 고통받으며 표현하려는 노력은 계속된다.


<오늘처럼 인생이 싫었던 날은 없다.
항상 산다는 것이 좋았었는데, 늘 그렇게 말해왔는데,
내 전신을 이리저리 만지면서, 내 말 뒤에 숨어 있는
혀에 한 방을 쏠까 하다가 그만두었다.>

- <오늘처럼 인생이 싫었던 날은 없다> (tr.고혜선)




국내에 최근 소개된 바예호 선집은 얼추 그의 작품 전반에 해당되는 작품들을 담고 있어 입문하기 괜찮다. 다만, <트릴세>같이 난해한 작품의 부분만이 담긴 것은 조금 아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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