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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HALOFF에 대한 발음은 정해진 것이 없습니다. 쟐롭, 쟐로프, 자알로프 등등 원하시는데로 부르시면 됩니다.


사실 JHALOFF란 아이디엔 별다른 의미가 없습니다. 그저 러시아사람처럼 보이게 만든 글자들의 나열입니다.
물론 각각의 글자엔 의미가 있지만, 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하겠습니다.


진 리스 (1), <한밤이여, 안녕> - 밤에 머물 수밖에 없는 자 독서일기-소설



<좋은 아침 - 한밤이여
나는 집으로 갑니다.
낮은 - 나에게 지쳤습니다.
하지만 내가 어찌 - 그에게 그럴까요?

햇빛은 달콤한 안식처였습니다.
나는 남기를 원했습니다.
하지만 아침은 - 날 원하지 않군요 - 지금
그러니 - 잘 자요 - 낮이여!>
-中, 에밀리 디킨슨 



진 리스의 <광막한 사르가소 바다>가 그녀의 가장 유명한 소설이겠지만, <한밤이여 안녕>은 그와 대조적으로 가장 암울한 소설이라 할 수 있다.

낮을 원하지만, 한밤 속에 머물 수밖에 없는 인용구처럼, 사샤는 이미 늙었고, 과거에 상처받았고, 그 과거를 회상하면서 스스로에게 상처를 주고, 그러면서도 호텔방에 머물 수밖에 없는, 말 그대로 한밤 속에 머물 수밖에 없어버린 주인공이다.

무엇보다 독자를 자극하는 것은 기나긴 의식의 흐름으로 능숙하게, 쉴 틈 없이 몰아치는 리스의 능숙한 문체이겠지만, 이 소설에서 특히 극에 달하는 그녀의 시니컬함, 그리고 내용의 암울함 덕분에 늪에 빠지는 것처럼, 독자들도 자연스럽게 사샤의 곁에서, 한밤 속에 머물 수밖에 없다.

출간 당시엔 이러한 암울함이 이 작품이 오래도록 묻히게 된 요인 중 하나였다고 하지만, 오늘날 진 리스를 읽는 이들에겐 이 점이 슬프게도 너무나도 매력적인 부분으로 다가올 것이다. (물론 그녀가 망각되었다가 노년에 재발굴되는 것엔 여러 복합적인 요인들이 있겠지만)

어둠 속에서도 빛을 원하고, 한밤에 머물면서도 낮을 원하여 아침인사를 하듯, 고통은 이미 과거가 되어버린 사샤는 아이러니하게도 이미 완성되었고, 성숙한 인물이다. 우리는 그녀의 의식 속에 나타나는 과거를 안타깝게 볼 수도 있겠지만, 정작 그 흐름을 주도하는 현재의 그녀에게 이 모든 것은 이미 지나간 일이며, 이제는 그 상처 자체를 시니컬하게 즐기는 경지에까지 사샤는 오르고 말았다.

물론 이러한 점이 이 소설을 더욱 비극적이게 만들어준다. 결국 현재의 호텔방에서의 사샤를, 과거의 모든 비극이 지나고나서도 현재에 머무는 사샤는 책장을 덮고 나서도 계속 그곳에 머물 것이며 그 후엔 여러 불길한 상상을 할 수밖에 없다.

그러면서도 이 소설의 제목이자 리스가 인용구로 내세우는 디킨슨의 시는 우리에게 작은 불빛을 비추어줄지도 모른다.
버림받은 낮에게도 인사를 건네고, 자신을 받아줄 수밖에 없는 밤에게도 인사를 건네는 것. 그 시적 미학을 이 짧은 소설은 그 자체로 보여준다.

물론 진 리스를 처음 접하는 독자들에겐 선뜻 추천하기 어렵다. 한 작가를 읽는데 사실 정해진 순서 같은 것은 없겠지만, 적어도 이 소설은 리스 세계의 마지막으로 마주해야하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해본다.









트루먼 카포티 (2) <인 콜드 블러드> - 차가운 피 독서일기-소설




<인 콜드 블러드>는 소위 말하는 논픽션-픽션의 효시 중 하나로 평가받는 카포티의 걸작이지만, 사실 '논픽션-픽션'이라는 이 모순적인 말은 애당초 이러한 것이 성립할 수 없음을 보여준다.

물론 카포티는 한 평범한 가정을 파멸로 몰아넣은 끔찍한 살인사건을 분명 '기자'적인 정신으로서 탐구하려는 면모도 있었을 것이며 동시에 소설가로서 이러한 비극을 픽션적으로 재현하여, 현실보다도 더욱 생생하게 독자들에게 전달하려는 야심도 있었을 것이다.
출간 당시에는 저널리즘보다 뛰어난 결과를 낸 대 성공으로 인하여 '논픽션'에 더 방점이 찍혔을지도 모르지만, <인 콜드 블러드> 자체가 유명해졌기에 실제 사건을, 카포티가 다루지 않았거나 왜곡하지 않았을 시선으로 다루려는 시선들이 생겨났고, 자연스럽게 진실을 소재로 카포티가 가공을 한 '픽션'에 오늘날 방점이 찍혔다고도 볼 수 있다.

비극적이게도 클러터 일가의 비극은 더 이상 <인 콜드 블러드>와 분리되어 이야기하기 어려운 실정이다. '진짜' 비극을 탐구하려는논픽션이 출간되는 이유 또한 아이러니하게도 <인 콜드 블러드>가 바꾼 진짜 진실을 탐구하겠다는 명목에 가까우니까.

다만, 애당초 카포티에게 왜곡의 책임을 물어야할지는 조금 회의감이 든다. 그는 애초부터 '픽션'이라는 형식으로서 이를 다루려고 하였고, 재연-다튜멘터리 영화,혹은 실화를 바탕으로 그렸다고 광고하는 영화처럼, 이러한 시도 자체는 결국 실제와는 다른 왜곡이 있을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논픽션-픽션'이란 명칭은 여전히 유효한게 아닌가, 이 책을 읽는다면 고민에 빠질 수밖에 없다. 머리론 '픽션'에 방점이 찍혀도, 이 요사스러운 책은 픽션도 아니고, 그렇다고 논픽션도 아닌 듯 읽는 이를 혼란으로 몰아넣는다.
 드러나는 끔찍한 진실까지, 서로 어울리지 않는 기묘한 장면들이 요사스럽게도 어긋나지 않고 자연스럽게 이어진다.

이 요사스러운 글은 그 부분들조차도 기괴하기 짝이 없다. 비극이 일어나기 전, 다소 지루함이 느껴질 정도로 평범한 한 행복한 일가의 모습을 그리는, 전원적인 장면에서부터 불길하기 짝이 없는, 범죄 로드영화의 한 장면을 연상케하는 살인마들의 멕시코 기행, 어딘가 중세 이단심문처럼 느껴지는 기괴한 재판 장면,거기엔 살인을 원인으로 한 평화로운 집단이 불길하게 붕괴되거나, 말 그대로 터무니없는 이유 때문에, 그것도 자신의 잘못과는 무관한 자연재해처럼 비극을 맞이한 이들과 남겨진 이들의 슬픔 및 이를 극복하기 위한 시도, 그리고 요사스러운 살인마들의 불운한 과거사까지 포함된다.

분명 재판에서 나온 말을 어느 정도 각색했을 뿐, 뉘앙스는 그대로 전달했을 범인들을 향한 검사의 진술은 마치 남부고딕물의 한 장면이 아닌가 의심될 정도로 기괴하기까지 하다.

무엇보다도 카포티는 적어도 문체상으론 이 모든 걸 '냉혈한'처럼 덤덤하게 서술하는 듯보인다. 하지만 그렇기에 아직도 이 냉혈한을 어떻게 마주하는 게 정말로 옳은 방식일지 의심할 수밖에 없다.

오늘날 신화적으로 승화한 책 중 하나다보니, 자연스럽게 카포티를 다루는 영화나, 심지어 그가 이 책을 쓰는 과정을 다룬 영화까지, 워낙 다양한 해석을 우리는 마주할 수 있다.

개인적으로도 <인 콜드 블러드>를 처음으로 알게 된 것은 오래 전, 카포티를 다룬 영화 소개였다. 아직도 그 영화 자체는 본 적 없지만, 인상 깊었던 것은 영화 속 카포티가 자신이 서술하는 살인마로부터 자신의 옛 모습을 엿보고, 자신의 엇나간 모습이라 상상하며 자신도 모르게 그에게 연민 및 동화를 느낀다는 소개였다.

아무래도 이런 선입관이 작용한 덕분인지, <인 콜드 블러드>를 나중에 읽게 되었을 때는 그가 두 명의 살인마 중 카포티와 유사한 이를 자신도 모르게 '미화'하는게 아닌가, 그런 감상에 빠져든 적도 있다.
물론 카포티가 그에게 조금 더 연민을 가지고 서술하는 것은 분명하다. 다른 한 명은, 카포티는 구제불능의 소아성애자로 그려낸다.

카포티가 이 살인마에게만 연민을 가진다고 보기엔 어렵다. 그를 둘러싼 비극적인 가정사가 그를 범죄의 길로 몰아넣은 걸 '설득력'있게 제시하는 점은 분명 그와 그를 범죄의 길로 몰아넣은 사회에 대한 연민과 비판일지 모른다.
하지만 그는 사실 이곳에 나오는 거의 모든 이들, 불행하게 살해당한 가족들에서부터 자신들 사이에 살인마가 있을지 서로 의심하는 마을 사람들, 사랑하던 이를 잃고 고통스러워하는 이들까지, 모든 이들에게 모종의 연민을 가진다. 어쩌면 그렇기에 그는 '차가운' 문체를 유지할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살인 전에서부터 살인 후, 범인들이 잡히고 재판에서 재판 후까지, 시간적인 과정을 소설가로서 능숙하게 독자의 시선을 사로잡을 재단을 하면서도, 여러모로 <인 콜드 블러드>는 찝찝함을 남긴다. '냉혈한'들에게 법의 심판은 내려졌을지도 모르나, 그 과정에서 석연치 않음은 남으며, 남겨진 자들은 계속 살아가면서도, 상처를 극복하려고 노력하면서도 여전히 그걸 마주하는 우리는 그 흉터를 상상할 수밖에 없다.

진짜 냉혈한은 무엇인가, 같은 의문은 사실 너무나도 진부하고 클리셰적이므로 이 책엔 어울리진 않는다. 책 속 냉혈한이 무엇인지 고민하기 전에, 이 책은 정확히 무엇인지를 먼저 고민해봐야하는 책이니까.

요사스럽지만, 분명 카포티의 정점 중 하나인 책임은 분명하다. 물론 앞서 말했듯, 카포티는 화려한 색채를 지녔으므로, 이 책 하나만으로 그의 세계를 단정할 순 없다. 그렇지만 카포티를 읽는데 <인 콜드 블러드>를 읽지 않는다면, 카포티를 읽지 않은 것이기도 할 것이다. 







프라이탁-로링호븐 <육신은 땀 흘린다> - 다다의 육신 독서일기-시



<모더니즘>이라는 사조는 사실 굉장히 폭력적인 사조일지도 모른다. 예이츠와 같은 자는 스스로를 최후의 낭만주의자라고 여겼지만, 오늘날 연구자들은 무자비하게 그를 모더니즘의 카테고리 안에 넣는다. 모더니즘에 속하는 자들은 사실 '모더니즘'이라는 집합에 강제로 묶이는 걸 제외하면, 그 안에서 너무나도 다양하면서 서로 반목되는 자들로 구성되어있다.

그런 여러 모더니즘 내의 하위 그룹 중에서 사실 일반적인 독자가 제일 받아들이기 힘든 부류는 역시 다다-초현실주의 그룹일 것이다. 차라리 그림이나 음악, 혹은 무용이라면 모를까, 일반적인 독자들의 입장에서 사실 이들의 시와 소설을 온전히 즐기기는 어려운 법이다.

엘사 폰 프라이탁-로링호븐, 혹은 프라이탁-로링호븐 남작부인, 그것도 아니면 <남작부인>은 그러한 다다의 주요 인사 중 하나지만, 그녀가 쓴 문학이 굉장히 늦게, 최근에야 한권의 시집이 나오게 되었는데, 그것이 바로 그녀의 시 모음집 <육신은 땀 흘린다>다.

다다의 역사를 살피는 독자라면 프라이탁-로링호븐, 혹은 남자부인 자체는 꽤나 언급되던 걸로 기억한다. 적어도 그녀는 10-20년대 여러 다다 예술가들의 모델로도 활동하고, 본인이 직접 퍼포먼스와 행위 예술, 작품 활동을 하면서 소위 말하는 미국 다다, 혹은 뉴옥 다다의 중심적인 인사 중 하나였고, 마르셀 뒤샹 같은 자들 또한 그녀와 교류하였다. 영미 모더니즘 문학의 중심에 있던 파운드 또한 자신의 칸토스에 그녀에 대한 이야기를 넣기도 했다. 주나 반스나 미나 로이는 그녀의 친구이기도 했다.

독일인지만, 미국에서 대부분의 시를 '영어'로 썼다는 점은 무엇보다 특이할 것이다. 거기에 3번째 결혼을 프라이탁-로링호븐 남작과 하여, 스스로를 '남작부인'이라는 일종의 필명으로 상징화하며 다다의 중심이 되었다는 점 또한 무척이나 특이할만하다.

원래 그녀가 대부분 발표하지 않았던 시 원고들(일부분은 <리틀리뷰>에 연재되며 어느 정도 호응을 얻었다고 한다)은 그녀의 친구이자 역시 전설적인 모더니스트 주나 반스에게 넘겨졌으나, 반스 또한 모종의 이유로 그녀의 시집 출간 및 그녀의 전기를 완성하지 못하였으므로, 끝끝내 자신의 시집을 출간하려던 노력은 2010년대에 와서야 지켜지게 되었다.

<외침>

나는 죽고 싶다 -
나는 살고 싶다 -

이 사랑포옹
사이에서!

첫번째 '선집'이자 그녀의 문학 세계는 앞으로 더 연구되어야하므로 섣불리 판단을 내리기는 어렵지만, 사실 전형적인 '다다'다.
그녀는 다다이스트들처럼, 언어를 가지고 놀며 의성어로 모든 걸 채우거나, 성적이고, 외설적인 걸 거침없이 드러내며 무의미한 농담을 즐기기도 한다.
그녀가 때론 퍼포먼스로서 자신의 신체시를 무대에 올렸다고 선집의 해설은 말하지만, 안타깝게도 그걸 볼 순 없을 것이므로, 다소 단조로운 대본의 일부만을 우리는 볼 뿐이다, 혹은, 그녀의 퍼포먼스 장면을 찍은 사진 일부를 보거나.

시에서의 레디메이드 기법, 즉 실제 당시 광고 문구, 브랜드 이름 등으로만 채워넣어 도시를 형상화하는 등의 기법은 흥미로우면서, 그녀가 다다의 중심이란 걸 알게 해준다. (물론 이는 해설로서 알 수 있는 사실이었지만)


내 모옴의 정신은 타고났다 -
내 다다로부터 온 유산 -
그의 투박한 농담은 내게 수여되었다
이 외설의 반짝거림.
-<자손의 분석 화학> 중

그녀의 육신의 땀 흘린 말처럼, 우리는 남작부인이라는 다다의 유산 일부분을 아직 맛볼 뿐이다. 다만, 그 전체를 밝히는 것은 역시 다다 연구자들의 몫일 테고, 현재로선 관심 있는 독자라면 즐기기엔 충분할 것이다.

그녀를 소재로 하는 전기나 문학 작품들도 더러 나오는 모양인데, 아직 읽어본 것은 없다.



트루먼 카포티 (1) 단편집 - 포. 남부, 그리고 제임스 독서일기-소설



물론 카포티의 무서움이 제일 잘 드러나는 소설은 <인 콜드 블러드>겠지만, 그의 단편집의 진가는 카포티가 얼마나 다양한 색채를 지니고 있는가를 독자들에게 다양한 형태로 뽐내는가, 일 것이다.

한쪽에서 그는 남부고딕의 기나긴 명단에 이름을 올린 작가다. 특히, 그의 어린 시절과 연관된 단편들은 전형적인 남부고딕물이거나, <앵무새 죽이기>의 연장선처럼 느껴지는 단편들이다.

이는 전적으로 그와 하퍼 리의 관계에 따른 결과물일 것이다. 어린 시절부터 친구였던 두 사람이 서로에게 얼마나 영향을 주었는지는 두 사람만이 정확히 알겠지만, 몇몇 단편 속 어린 카포티는 마치 하퍼 리가 묘사했던 카포티를 그대로 뽑아놓은 듯하다. (모델이 같은 차원을 넘은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언젠가 말했지만, 남부고딕물은 참으로 기이한 장르다. 카포티 또한 분명 자신의 어린 시절을 '리얼'하게 그린 것에 불과하겠지만, 어딘가 그가 묘사하는 남부와 그의 대가족, 이혼으로 인하여 왔다갔다하는 남부 시골 아이의 삶은 고딕에 가깝게 느껴진다.

하지만 이는 다른 한편으론, 카포티를 구성하는 또 다른 색채 때문이 아닐까 싶다. 카포티의 또 다른 큰 축을 차지하는 것은 그가 포와 제임스의 후예 중 하나란 점이다.

<미리암>과 같은 섬뜩한 단편은 그가 포의 온전한 적자가 되었을 수도 있음을 보여주는 것 같다. 호러적 관점에서 안타깝게도 그는 호러에만 몰두하지 않았지만, 그가 남긴 심리적 공포 소설들은 포와 제임스를 연상시키기에 충분하고, 매혹적이며 때론 오싹하다.
(이런 그의 특성이 고딕에도 사실 어느 정도 녹아나지 않았을까?)

다채로운 색깔을 지닌 작가는 사실 많지만, 어찌되었든 카포티도 그 중 하나다.

카포티를 제대로 즐기고 싶다면, 적어도 <인 콜드 블러드>, <티파니에서 아침을>, 그리고 <단편집>을 차례로 읽는다면, 어느 정도 즐길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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