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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블로그는 잉여의 블로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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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블로그는 주로 책에 관하여 다루고 있지만, 다른 분야도 애기할 수도 있습니다.

저는 잉여입니다.

JHALOFF에 대한 발음은 정해진 것이 없습니다. 쟐롭, 쟐로프, 자알로프 등등 원하시는데로 부르시면 됩니다.


사실 JHALOFF란 아이디엔 별다른 의미가 없습니다. 그저 러시아사람처럼 보이게 만든 글자들의 나열입니다.
물론 각각의 글자엔 의미가 있지만, 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하겠습니다.


나보코프, <니콜라이 고골> - 죽은 고골 프로젝트- 블라디미르 나보코프




한 작가의 전기를 쓰는 일은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을 것이다. 저자 자신이 최대한 드러나지 않도록 의도적으로 모습을 감추거나, 혹은 작가와 함께 저자가 독자 앞에서 자신의 모습을 과감하게 드러내거나.

나보코프의 경우는 명백히 후자다. 물론 그의 소설들에 익숙한 독자라면, 이 자의식 강한 예술가가 자신의 모습을 감추는 법은 없으리란 걸 잘 알 것이다.

그렇지만 니콜라이 고골이다. 러시아 문학의 근간 중 하나이자 나보코프 본인 또한 존경하는 고골의 '전기'를 쓰는 가운데에도 나보코프는 자신의 모습을 거리낌 없이 드러내는 정도가 아니라, 이것이 자신의 소설 작품이라도 되는 양 험버트 험버트나 기타 모든 이들에게 그러했듯, 모든 걸 조종하려고 든다.

사족이지만, 이 전기가 출판될 당시의 미국에서의 나보코프는 <롤리타>를 쓰기 이전이었다. 누구나 알 법한 작가가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나보코프는 거리낌없이 자신의 '소설'을 보여준다.


고골의 끔찍하면서도, 기묘하고 익살맞은, 어떤 의미에선 고골 자신의 글에 어울릴 법한 죽음에서부터 시작하는 이 170여 분량의 짧은 '전기'는 앞서 언급한대로, '고골'을 주인공으로 삼는 나보코프의 기나긴 소설군의 일원이다.

물론 일말의 자비도 없는 나보코프의 주인공들과 달리, 나보코프는 자신의 문학적 선배를 존경하고 애정하나, 불행하게도 고골의 삶 자체가 이미 '고골'스러웠으므로 나보코프조차 구원해줄 순 없었다.

그러나 사실 이 작품이 소설 같은 '전기'라고 하기에도 조금 어폐가 있을지 모르겠다. 기록에 미친 앵글로색슨인들이 한 인물의 세세한 일상들을 편집증적으로 보여주기 위해 수천 쪽 분량의 전기를 작성한다면, 슬라브 나보코프는 고작해야 170여 쪽, 색인과 짭ㄹ은 연보까지 합친 짧은 분량만을 할애한다.

거머리 치료를 받으며 끔찍하게 비명을 지르는 고골의 최후에서 시작하여 곧바로 잠깐의 탄생 이후 다시 고골의 페테르부르크 상경으로 쉴 틈 없이 넘어가는 이 전기는 고골의 삶을 다루는 소설이자 그의 작품들, 정확하게는 나보코프 본인이 애착을 갖는 고골의 작품들에 대한 평론집이라 일컫는 쪽이 더 올바르다.

물론 일부 전기적인 사실들, 그리고 고골이 스스로 과장하고 허풍을 떤 일화들에 대하여 냉정하게 선을 긋는 나보코프의 설명 등 전기적인 사실 전달도 없는 것은 아니나, 그가 전달하는 모든 삶의 조각들조차 결국은 고골의 작품을 설명하기 위한 도구들로서 제시된다.

나보코프 본인은 고골의 초기 단편들, 우크라이나 설화들을 혐오하며 그저 러시아 문학의 발전이 더뎓기에 높게 평가받았다고 여기며 이들을 통하여 고골을 '희극스러운/유머스러운' 작가라는 평을 내리는 모든 이들을 혐오하고 그들의 평가와 생각을 증오한다.

그가 다루는 것은 희곡 <검찰관>,<죽은 혼>, 고골의 종교관, 그리고 <외투>다. 거기에 더하여 영어 번역자들이 얼마나 고골을 난도질하고 제대로 알지 못하였으며 오역했는지에 대한 투덜거림과 나보코프 식으로 제시하는 고골들까지 덤이다.

(나보코프는 이 책에서 스스로 번역하여 고골의 편지나 작품 일부를 수록하는데, 그의 서간집을 보면, 만족할 수 없는 영역들에 대한 혐오감과 스스로 번역까지 해야하기에 작업이 느려지는 것에 대한 한탄 등이 드러난다)


나보코프가 무엇보다도 주목하는 것은 'Poshlust (속물근성)'이다. 속물근성 등으로 번역되기도 한다지만, 나보코프 본인이 이 책에서도 거듭 강조하듯, 다른 언어로 정확히 번역될 수 없는 러시아만의 단어 중 하나다. 나보코프가 예시로 든 poshlust적인 인물들론 햄릿의 폴로니오스, 마담 보바리의 오메 등이 있다.

고골의 작품에서 나타난 이러한 poshlust를 보여주고, 고골이 어떻게 러시아 문학을 바꾸어놓았는지 끝없이 예찬하며 그러면서도 그의 '종교적인 몰락'에 대해선 마치 자신의 주인공들을 대하듯 때론 비판하며 한탄하는 나보코프의 모습은 사실 그의 소설들에서의 냉혹한 모습을 생각하면 인간적으로 느껴지기까지 한다.

나보코프의 분석들이 어떠한 방식인지는 국내에도 출간된 그의 문학강의들을 통하여 접할 수 있을 것이다. <고골> 또한 그런 류의 책들 중 하나이기도 하므로.


그러나 고골의 탄생일로 다시 고골의 삶을 끝마치면서도 편집자와의 가상인지 아닌지 모를 텍스트에 대한 코멘터리, 그리고 나보코프 본인의 생각으로 쓰여진 고골의 연보와 색인까지 이어지다보면, 마치 <창백한 불꽃>이나 그의 연구대작 <에프게니 오네긴> 주석본을 떠올리게 한다.


사실 고골 자체에 대해선 더 좋은 연구서가 있을지도 모른다.

다만, 나보코프가 쓴 고골을 주인공으로 하는 소설, 거기에 더하여 좋은 고골에 대한 평론까지 읽고 싶다면, 좋은 선택이 될 것이다.


디노 부차티, <타타르 황야> / 단편집들 독서일기-소설




디노 부차티는 내가 알기로 아직 국내에 소개된 적은 없으나 종종 이탈리아의 카프카로 비유되는 작가이기도 하다.


물론 모든 종류의 카프카 운운되는 작가들이 그러하듯, 카프카는 오직 카프카이며, 카프카들은 카프카가 아니라, 제각기 자신의 본래 모습을 지니고 있다.

카프카는 거꾸로 해도 카프카이듯, 브루노 슐츠가 슐츠이듯, 부차티는 부차티다.


물론 그의 대표장편 중 하나인 <타타르 황야(스테프)/사막>은 어느 정도 카프카를 연상케하는 것은 어쩔 수 없다.

K가 성으로 들어가기 위하여 미로에 스스로 갇히듯, <타타르 황야> 또한 타타르족들이 언젠가 쳐들어올지도 모르는 황야를 지키는 요새 안으로 스스로 들어가는 병사의 이야기를 다룬다.


그러나 카프카가 언제나 미로와 반복에 주 관심을 둔다면, 부차티의 경우는 '흐름'에 관심을 둔다.


처음, 병사가 외딴 요새로 발령이 나서 그곳까지 가는 여정, 그리고 어딘가 기괴한 요새 안의 풍경까지, 모든 것은 실시간처럼 진행되는 듯 보이나

어느 날 불쑥 깨달으면, 세월이 순식간에 흐르고, 자신도 모르게 늙어서 지나간 나날들을 후회하듯,

어느새 병사는 요새에서 나갈 수 없고, 고향의 친구들이 제각기 늙고, 결혼하여 가정을 꾸리는 가운데에서도 홀로 늙으며, 언제 올지 모를 야만인들의 습격을 대비할 뿐이다.

그 오랜 흐름과 기다림 끝에서 병사는 결국 '기다림'만을 받을 뿐, 설령 타타르 족의 군대가 쳐들어오는 순간, 말 그대로 요새의 목적이 비로소 실현되는 그 순간엔 그저 기다림 끝에 지치고 늙은 자신을 발견할 뿐이다. 아니, 버려진다는 표현이 정확하겠지만.


카프카를 연상케, 혹은 닮게 느낄지도 모르지만, 부차티의 글 자체는 카프카와는 다른 매력이 있으므로 카프카를 읽었다고 하여 읽지 않을 필요는 없을 것이다.

때론 씁쓸하기도 하지만, 말 그대로 오래된 이탈리아 고전 영화 같은 느낌으로 부차티는 때론 희극을, 때론 기괴한 비극을 그린다. <타타르 사막>의 경우엔 병사에겐 안타깝게도 후자지만, 그의 단편들의 색깔은 다양하므로 여러 선택을 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한 가지 안타까운 점은 그의 대표적인 단편군들 중 하나는 가상의 괴물이 나오는 단편집들이라는데, 영역으로도 거의 없거나 구하기 힘든 듯 하여 제대로 즐겼다고 하기엔 어렵겠지만, 그럭저럭 대표장편과 몇 편의 단편으론 나름 즐기며 기다렸다.


허먼 멜빌 (5) <피에르, 혹은 모호함> - 피에르는 고독했다 프로젝트 - 허먼 멜빌



<수백 수천의 인간 존재가 있는 도시의 한 사람으로서, 피에르는 극지에 있는 것처럼 고독했다.>




작품 외적으로나 내적으로나, <피에르, 혹은 모호함> 같은 작품처럼 모호하고 알 수 없는 책도 없을 것이다. 

멜빌의 작가로서, 인생의 몰락의 시작은 이미 <모비딕>이 시작하였다는 것은 <모비딕>이 전설이 된 만큼 너무나도 유명한 사실이지만, 상대적으로 그 끝을 장식한 것은 <모비딕>의 쌍둥이 형제였다는 점은 덜 알려진 듯하다.

그래, 이 소설은 <모비딕>의 쌍둥이 형제다. 만약, <모비딕>을 더 잘 알고 싶다면, 부득이하게 <피에르>까지 읽어야할지도 모르겠다.

내용적인 면에서 해설을 해주거나, 이야기가 이어지거나 그런 뜻은 아니다. 어떤 의미에서 <피에르>는 '<모비딕>을 쓰는 과정에 대한 소설'이기도 하며, 그런 점에서 <모비딕>의 쌍둥이와도 같다. 혹은 부모란 말이 더 정확할지도 모르겠지만.


물론 이는 <피에르>의 극히 일부분만을 평가한 면이며, <피에르>라는 한 권의 책을 평가할 순 없는 기준이다. 사실, 이미 이 책을 어떻게 평가해야할지는 멜빌 본인이 제목에서부터 우리에게 모든 것을 알려주었다.

'모호함'


이 책은 말 그대로 모든 것이 모호하다. 

언제나 배와 바다, 항해에 관해 자신의 체험을 쓴 멜빌은 유독 이 소설에서만은 뭍에서의 일을, 피에르 글렌딩이라는 한 젊은이의 모호함에 대해 글을 쓴다. 물론 멜빌 본인의 체험이 없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멜빌의 가장 자전적인 소설일지도 모르겠다.

소설이 시작되면, 평범한 연애에 관한 로맨스 소설처럼, 피에르 글렌딩의 유서 깊은 가족의 역사와 저택과 재산에 관한 이야기를 멜빌은 시작한다. 젊고 아름다운 피에르는 소꿉친구이자 금발의 루시와 약혼을 했고, 어릴 적 아버지 피에르가 불행하게 세상을 떠났지만, 어머니와 화목하게 살아가고 있는 듯보인다.

이대로만 간다면, 피에르 글렌딩의 연애담이나 성공담으로 이야기가 흐르지 않을까, 그렇게 예상되지만, 멜빌은 순간 모든 것을 비틀어버리기 시작한다. 적어도 당대 독자들은 결코 원하지도, 예상하지도 못한 방향으로.

물론 조짐은 처음부터 있었다. 어딘가 결여된 것처럼 부족한 피에르, 상징적으로 '누이'의 존재를 애타게 원하던 피에르, 피에르와 어머니가 서로를 엄마나 아들로 부르는 대신, 누나와 동생으로 서로를 부르는 다소 기괴한 부분에서부터 시작하여, 어딘가 잘못되고 비틀린 것 같은 피에르를 둘러싼 세계의 묘사까지. 그러나 멜빌은 모든 것을 모호하게 비틀어간다.

갑자기 피에르에게 자신의 이복누나, 그의 죽은 아버지와 프랑스 귀족 사이에서 태어난 사생아라 주장하는 이사벨이 나타나고, 애매모호하지만, 행복했던 피에르는 자신이 믿고 존경하던 모든 가치가 붕괴됨을 느낀다. 그는 자신의 누이에게 '글렌딩'이라는 성을 되찾아주면서도, 누구도 그녀가 사생아라는 걸 알지 못하게 하기 위하여, 어머니 앞에서 이사벨과의 결혼을 선언하고, 부부로서 쫓겨난다.

그리고 <피에르>는 이러한 세상에 던져진 순진했던 피에르의 방황담을 그린다.



하지만 역시나 모호하다. 피에르의 방황담과 이야기는 어떻다고, 한쪽으로 단정내리기엔 너무나도 모호하다.


프로이트주의자들이 좋아할 법한 요소와 전개가 이 책 이곳저곳에 자리잡는 것은 부정하기 힘들다.

어디까지나 남들에게 속이기 위한 방편이지만, 자신의 '이복 누이'와의 결혼, 그리고 어머니와의 기괴한 관계, 무엇보다도 시간이 지날 수록 피에르에게 집착하는 듯한 이사벨의 모습이나 후에 피에르를 찾아오는 피에르의 약혼녀 루시, 혹은 이 모든 것이 애당초 거짓말에서 시작된 게 아닐지 의심하기도 하는 피에르의 불안 등 분명 프로이트적인 '심리소설'로서의 선구자일지도 모르겠다.

글렌딩 가문의 알게 모르게 좋지 않은 비밀이 숨겨져있을 거란 듯한 암시나, 피에르의 아버지에 대한 존경심이 사라지며, 진실을 아는 초반부, 혹은 '뉴욕 도시'로 와 겪는 배신 등 멜빌이 언제나 집착했던 미국의 모습을 담고 형성하려는 소설일 수도 있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모호한 것은 피에르의 방황담이 향하는 길이다. 


<피에르는 세계에 책 한 권을 주기로 하였다, 세계가 경탄과 즐거움 속에 찬양할 그런 책을.>


쫓겨난 순진한 청년 피에르는 이전부터 햄릿에 암시되며, 단테 등을 즐겨 읽는 등 문학적 소양에 관한, 말 그대로 험한 세상을 모르고 순진한 기질에 관한 암시는 줄곧 있어왔다.

그런 그는 다른 멜빌의 주인공들이 겪는 것처럼, 철학 팜플랫 등 기괴한 철학을 접하고, 먹고 살기 위하여 자신의 재능을 이용해 작가가 될 것을 결심하는 것은 멜빌의 세계에서 그다지 이상한 일은 아닐 것이다.

애당초 피에르는 멜빌이 그러했듯, 그럭저럭 찬사를 받은 시를 몇 편 발표하기도 했던 말 그대로 총망받는 젊은 문학청년으로 묘사되니까.

그러나 다시 한 번 멜빌은 이제는 익숙해졌을 법한 독자들을 모호함의 길로 이끈다.

<나는 세계를 증오한다, 그리고 포도처럼, 인류의 모든 폐를 짓밟곤 으깨어 그들의 숨을 꺼낼 수 있다, 슬픔과 위선을 생각하고 있으면, 진리와 거짓을 생각하고 있으면!">

이사벨과의 관계, 그를 찾아온 루시와의 관계, 거기에 그들이 만났던 기괴한 예술가들의 모임이나 다시 피에르와 글렌딩 가문 사이의 다툼 등 바깥의 일이 진행됨과 동시에, 아무런 일도 없다는 듯 피에르는 이제 미칠 듯이 자신의 '걸작'을 출판하기 위하여 몰두하기 시작한다.

<그 누가 황량하고 오한이 드는 방 안 피에르의 생각과 느낌을 말해줄 수 있을까, 마침내 그가 자라나며 더 지혜롭고, 깊어질수록,
그가 빵을 얻을 기회는 점점 줄어든다는 그 생각이, 그가 지금 창밖으로 자신의 거대한 책을 내던지곤, 한 달 내 가장 긴 소설, 얕고 아무것도 아닌 소설에 몰두한다면 합리적으로 공감과 돈을 얻을 수 있다는 그 생각이 불쑥 찾아왔을 때.
그러나 이제는 게걸스러운 심오함이 그에게 열렸고, 그의 모든 생기를 집어삼킨다.>


이제 소설 후반부의 상당부분은 작가가 되어가는 피에르에게 더욱 집중하기 시작한다. 그의 외부에서 일어나는 일들과 완전히 분리된 것은 아니지만, 인간으로서의 피에르와 달리, 작가로서의 피에르에겐 아무 것도 아닌 일이나 마찬가지다.

<수백 수천의 인간 존재가 있는 도시의 한 사람으로서, 피에르는 극지에 있는 것처럼 고독했다.>

우리는, 멜빌을 아는 독자들이라면 피에르가 쓰고 있는 이 소설의 제목을 이미 알고 있다.

이런 면에서 <피에르>는 다시 한 번 <모비딕>을 써내려가는 피에르에 관한 소설이 되어버린다. 그러곤 멜빌의 <모비딕>이 멜빌을 파멸로 몰아넣었듯, 작가로서의 피에르도 파멸하며, 그와 동시에 이사벨로 시작된 그의 몰락한 인생도 같이 파멸한다.


때론 집요할 정도로 심리를 묘사하지만, 때론 아무 것도 아니라는 듯 불쑥 사건을 진행시키거나, 때때론 이야기의 진행은 무의미하다는 듯 순식간에 끝내거나, 혹은 더 중요한 의미가 있다는 양 작가가 되어가는 피에르의 내면에 집착하는 등 이 소설의 모호함은 그럼 대체 무엇인가?

피에르는 분명 어떤 의미에선 멜빌 본인의 자전적인 인물일지도 모른다. 일정 부분, 피에르가 <모비딕>을 써내려가는 과정에서 나타나는 포부나 의도 등은 분명 멜빌 본인의 <모비딕>에 대한 생각일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피에르는 멜빌이 아니라는 것은 누구나 알 수밖에 없다. 

그럼 멜빌이 '의도적으로' 언급했던 것처럼, 피에르는 멜빌의 햄릿이나 단테일까? 오히려 멜빌이 함정을 위해서 의도적으로 보여준 것에 가깝지 않았던가?

피에르는 이 소설 내내 모호하면서도, 때론 단호하고, 그러면서 상식적으로 이해가 되지 않은 일을 하면서 그 내면이 서술되지만, 정작 그러한 행동의 명확한 이유가 될 순 없기에 더더욱 독자들에겐 모호한 무언가로 다가온다. 


물론 '모호함들 Ambiguities'이므로 단순히 피에르의 모호함 뿐만이 아니라, 그를 둘러싼 피에르의 세계의 모호함도 포함되겠지만, 그렇다고 모호함의 해답이 될 것 같진 않다. 가령, 피에르와 그의 적 글렌의 어릴 적 관계나 이후의 관계는 억압된 동성애적 관계로 느껴질 정도로 멜빌의 작품들에서도 특히 더욱 강조되기도 하는데, 영향이 있는 걸까? (실제 퀴어비평으로 피에르를 분석하는 경우도 많다) 

<"모든 것은 끝났어, 그리고 당신은 그를 알 수 없을 거야!">


물론 바틀비가 그러하고, 모비딕이나 사기꾼, 빌리 버드 등이 그러하듯, 그리고 <피에르> 속에서 멜빌이 외치듯, 피에르가 누구인지는 알 수 없을 거다.

멜빌을 좋아하는, 혹은 더 익숙해지고 싶은 이라면 멜빌이 남긴 이 기묘한 심리소설이자 <모비딕>의 쌍둥이를 직접 대면하여 마주하는 일 뿐....

그저 모호함....모호함.








로렌스 (1) <바다와 사르디니아> - 과거, 그리고 미래 프로젝트-D.H. 로렌스



어째서 로렌스를 좋아하는가, 란 질문엔 사실 답을 못하겠다. 물론 그는 글을 잘 쓰지만, 내 취향과 완벽하게 맞다고 하기 어렵다. 그의 사상엔 딱히 동의하지도 않고, 오히려 몇몇 부분에선 비판적인 쪽에 가까울 것이다. 그의 대표작처럼 여겨지는 <채털리 부인의 연인>은 사실 그의 작품들 중 가장 좋아하지 않는 쪽에 가깝다. 

그래도 굳이 생각을 정리해보자면, 역시 로렌스의 (긍정적인 면으로의) 기이함 때문이 아닐까 싶다.

물론 모든 대가는 자신만의 특징을 가지고 있지만, 로렌스의 경우엔 태생적으로 아웃사이더였기에 늘 불모지를 찾아다녔고, 그렇기에 기이함이 발달할 수밖에 없었다는 특징이 아닐까?


그는 40 조금 넘는 짧은 생 동안 수많은 곳을 방랑하였고, 수많은 글을 다양하게 남겼다.

<바다와 사르디니아>는 그런 그의 사르데냐 섬 여행기다.


1차 대전 직후 로렌스는 '증오스런' 영국을 떠났고, 이탈리아에 머물렀다. 그리고 이 여행기는 그 과정에서 잠시 그가 '야만'을 찾아 사르데냐 섬으로 가는 여정을 담은 여행 에쎄이다.

왜 하필 사르데냐인가? 이에 대한 의문을 그는 여행기 초반에서부터 쉽게 밝힌다. 사르데냐 섬은 말 그대로 '불모지'이기 때문이다. 과거의 로마 등의 손길조차 제대로 받지 않은 채, 과거를 간직하고 살아가는 곳, 그곳이 로렌스를 사르데냐로 이끈 핵심적인 이유였다.

이후 이 여행기는 일단은 순차적으로 로렌스와 그의 아내 프리다의 사르데냐 여정을 담는 듯싶다. 로렌스가 묘사하는 전통이 남아있는 사르데냐의 여러 도시와 마을들, 그리고 풍경은 그 자체로 빼어난 여행기처럼 보인다. 인상을 기록한 쪽에 더 가깝기에, 실질적인 여행에 도움이 되지는 않을지라도, 그의 묘사들이 실제 여행에 방해가 되진 않을 것이다.


그러나 사실 이 여행기의 본질은, 다른 로렌스의 작품들이 그러하듯, 그리고 작가들의 글이 그러하듯, 로렌스 본인의 생각과 예언에 가깝다.

로렌스 본인이 언제나 강조했듯, 1차 대전 이후 모든 것은 달라졌다. 그리고 다시는 과거로 돌아갈 수 없고, 사람들에겐 새로운 무언가가 필요하다.

그렇기에 로렌스는 언제나 미지의 땅을 찾아 방랑했고, 그러한 과정에서 자연스레 과거를 아직 간직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사르데냐를 찾는 것은 예견된 수순이다.


그 여정에서 로렌스가 만나는 수많은 사람들의 '입'을 통하여 로렌스는 앞으로 다가올 자신이 예견한 변화들을 대신 들려준다.

무엇보다 인상적인 것은, 역시 마지막에 수록되는 오페라 극장에서 이탈리아 사람과의 대화다. 

이탈리아는 승자이며 독일은 패자지만, 결국 모두가 패자이기에 동료이며, 진정으로 모든 이익을 가져간 사기꾼은 영국이라는 이탈리아인의 말이 단순히 있었떤 사실을 기록하는 것이 아니란 점은 소설가를 아는 이들이라면 잘 알 것이다.

이런 점에서 이 여행기는 여행기면서 동시에 1차 대전 이후 뒤바뀐 사회와 그 미래를 보여주는 산문이기도 하다.

물론 로렌스 본인은 그 미래에 크게 얽매이진 않았을 것이다. 대신 그는 빈 땅을 찾아 방랑을 계속한다.

그에게 더 중요한 것은 이제 과거를 단순히 간직하는 것이 아니라, 뒤바뀐 자리를 채워줄 미지와 과거니까.

이는 그의 신비주의로 쭉 이어지며 로렌스 독자들을 어쩌면 괴롭힐지도 모른다.





* 놀랍게도 예전에 국내에도 번역된 적은 있다. 나쁜 책은 아니지만, 로렌스의 진정한 걸작 중편들 먼저 번역해주기를 기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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