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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블로그는 잉여의 블로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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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잉여입니다.

JHALOFF에 대한 발음은 정해진 것이 없습니다. 쟐롭, 쟐로프, 자알로프 등등 원하시는데로 부르시면 됩니다.


사실 JHALOFF란 아이디엔 별다른 의미가 없습니다. 그저 러시아사람처럼 보이게 만든 글자들의 나열입니다.
물론 각각의 글자엔 의미가 있지만, 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하겠습니다.


레이몽 루셀, <로쿠스 솔루스> - 광기, 오랜 친구여 독서일기-소설



개인적으로 레이몽 루셀을 처음 접했던 것은 오시이 마모루의 애니메이션 <이노센스>에서였다. 보다 정확하게는 <이노센스>에 관한 여러 레퍼런스를 설명하는 한 블로그의 글에서였는데, 거기에서 한스 벨머 등을 처음 접하기도 하였으므로 오늘날 모더니즘을 파는 본인에겐 여러 유익한 정보의 원천이기도 하였다. 하지만 '오시이 마모루'가 굳이 자신의 영화 속에 '인용'하였다는 걸로 알 수 있듯, 레이몽 루셀과 그의 대표작 <로쿠스 솔루스>는 그 자체로 기괴한 컬트에 가깝다.

초현실주의 등에 선구자격으로 평가받는 작가들은 많다. 로트레아몽 백작과 말도로르의 노래가 있고, 또 위뷔왕과 쟈리의 신화가 존재한다. 거기엔 대중적으론 널리 알려지지 않았지만, 작가들에게 컬트적으로 추앙받는 레이몽 루셀을 위한 자리 또한 있다.

레이몽 루셀의 장편 소설 <로쿠스 솔루스>는 라틴어로 된 제목이며 작중 배경이 되는 저택을 의미하면서 '고독한 장소'를 뜻한다. 
이 소설은 얼핏 보들레르로부터 시작되어 위즈망스 등으로 대표되는 '인공낙원 건설기'의 탈을 쓴 것으로 보인다. <거꾸로>에서 주인공이 자신의 인공낙원을 건설하고 챕터마다 여러 향략을 즐기는데에만 집중하듯, <로쿠스 솔루스> 또한 주인공이라 할 수 있는 저택의 주인이자 기이한 발명가인 마샬 칸트랄이 자신의 저택 로쿠스 솔루스라는 일종의 인공낙원에 여러 사람들을 초대하고, 자신의 발명품들을 보여주는 소설이다.
이 소설의 묘미는 그러한 기괴한 발명품들에 대한 장면들이다. 죽은 자들을 부활하여 생전의 모습을 반복시키는 장며닝나 여러 이야기 속 이야기 등 그 자체만으로 괴기 소설에 나올 법한 장면들의 연속이다.

이 소설 속 레이몽 루셀은 <거꾸로>의 위즈망스나 <미래의 이브>와 <악셀>의 빌리에 드릴아당의 직계 후손처럼 느껴진다. 실로 이 두 선구자의 그림자를 (이 모두를 읽어보았다면) 느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루셀의 가장 큰 기이함은 그 진지함에 있을 것이다.

말도로르와 같은 작품에선 로트레아몽은 일부러 과장되고, 광기에 휩싸인 것 같은 문체를 사용하여 읽는 이에게 그러한 느낌을 주고, 인상을 주게 만든다. 그러나 루셀은 정반대다. 그는 시종일관 진지하고, 차분하며 그저 자신이 정말로 그렇게 믿고, 느끼며 생각하는 바를 단촐하게 서술할 뿐이다. 하지만 독자로선 그런 그의 너무나도 진중한 태도가 외려 더욱 기이하고 광인처럼 보일 것이다. 이러한 점이 작가들이 루셀을 주목하고, 컬트적으로 빠지는 점 중 하나일 것이다. 그는 자신의 광기에 누구보다도 진지하며 그 광기를 실재로 받아들인다.

물론 모든 뛰어난 작가가 그러하듯 루셀 자체를 읽지 말아야할 이유는 없다. 그렇지만 컬트적인 것엔 이유가 있는 법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이러한 초현실주의의 선구자이자 너무나도 진지한 광인의 작품을 만나고 싶다면, 루셀의 세계에 온 걸 환영한다.

*루셀의 작품은 여럿 있지만, <로쿠스 솔루스>는 일단 한국어 역본도 있다.

앤 카슨, <빨강의 자서전> 독서일기-시



<빨강의 자서전>은 오늘날 앤 카슨의 대표작으로 인식된 작품이다. 물론 앤 카슨은 아직 살아있고, 미래에 그녀의 작품군에 대한 평가에 변화가 생겨서 다른 작품이 대표작으로 재인식되거나, 이 작품이 오히려 잊혀지는 가능성도 무시할 순 없지만, 어찌되었든 아직 살아있는 우리에게 있어 앤 카슨의 대표작이라고 봐도 무방하다, 마치 과거와 미래 사이의 현재를 다루는 이 시처럼.

'시-소설'이란 명칭만큼, 사실 이 작품은 조금은 어중간한 위치에 놓여있다. 시라고 하기엔 소설에 가깝고, 소설이라고 하기엔 시에 가깝다. 물론 이는 앤 카슨에게 익숙해져야하는 독자의 몫이다. 앞서 말했듯 카슨은 무언가 한 가지 틀에 쓰기 보단 이리저리 뒤섞는 작가 쪽이다.

<빨강의 자서전>은 앤 카슨의 본업이기도 한 희랍 문학에 대한 그녀의 비평으로 시작된다. 그녀의 관심사는 희랍 서정시인이었던 스테시코로스의 작품군과 그의 작품 중에서도 헤라클레스와 게리온을 다룬 서정시다.
호메로스나 헤시오도스가 명사와 동사를 '만든 자'였다면, 카슨이 평가하는 스테시코로스는 '형용사'를 거기에 덧붙인 자다. 번역-연구자답게, 그녀는 형용사의 희랍어적 어원에 주목하며 '형용사'가 덧붙인 존재란 점에 주목한다.
거기에 그녀의 관심을 끄는 것은 게리온에 관한 스테시코로스의 파편 모음이다. (거의 모든 희랍 시인들이 그러하듯, 스테시코로스 또한 파편 모음집만이 전해진다)
헤라클레스의 12 과업 중 하나인 게리온의 소떼를 훔치는 이 과업을 스테시코로스는 노래했지만, 기이하게도 영웅이었던 헤라클레스가 아닌, 게리온의 시점에서 노래하였다. 붉은 괴물 게리온에 관한 스테시코로스의 노래와 덧붙여진 존재인 형용사. 이러한 소재를 밑바탕으로 카슨은 자신의 스테코로스-론을 마친 후 자신의 게리온에 관한 서사시를 재창작하기 시작한다. 말 그대로 붉은 괴물이 서술하는 자서전, 빨강의 자서전이다.

이러한 신화의 재창작은 두 부류로 나뉜다. 그 시대를 배경으로 다시 들려주든가, 아니면 아예 모든 걸 바꾸든가. 카슨은 후자다. 게리온이라 이름 붙인 한 날개 달린 소년의 성장소설이라고 볼 수 있는 이 시-소설은 희랍 세계의 괴물과 영웅의 투쟁기와는 다르다. 물론 카슨은 모든 경계를 무너뜨린다. 게리온이란 소년이 적는 자신의 자서전은 스테시코로스의 시 그 자체이면서도 그는 독일 철학을 공부하고, 작가를 꿈꾸며 우정과 사랑에 고뇌하기도 하는 그런 현대의 인간이다.
이 작품의 묘미는 그러한 혼돈에 있다. 한 예술가의 전통적인 성장 소설이면서도 동시에 희랍문학론이며 스테시코로스에 관한 이야기이거나 (카슨이 오버랩하는) 거트루드 스타인의 목소리를 내는 스테시코로스-카슨의 인터뷰이기도 하다. 그녀가 여러 작품에 걸쳐 집중하는 시간(혹은 시기, 시대)에 관한 글일지도 모른다. 말 그대로 덧붙여진 존재, 전통이 아닌 이질적인 존재가 서술하는 자서전, 그것이 바로 <빨강의 자서전>이다.

물론 책 자체로도 충분히 즐길 수 있다. 하지만 조금 더 이 시-소설을 깊게 즐기고 싶다면, 스테시코로스의 시를 읽거나(카슨 본인이 번역 일부를 수록하기도 하지만) 카슨이 '언어'를 다루는 측면에서 오버랩하는 거트루드 스타인 등에 친숙해지는 것도 좋은 선택일 거다.


*최근에 국내에도 소개되었다



주나 반스 독서일기-시


주나 반스의 가장 널리 알려진 작품이자 대표작인 <나이트우드>가 문학동네 세계문학 전집판으로 번역되었다.
<나이트우드> 같은 작품이 번역되어 소개될 것이라곤 생각조차 못했기에 놀라지 않았다면 거짓말일 거다. 사실 주나 반스의 위치를 생각해보면 조금 이중적일 수밖에 없다.

가장 유명한 모더니즘 작가들, 가령 조이스나 엘리엇, 울프와 같은 라인과 비교하면 반스는 덜 알려진 작가인 것은 분명하다. 이는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렇다면 반스가 완전히 무명이며 국내에 소개될 가능성이 아예 없는 작가인가? 라고 묻는다면 생각해보면 꼭 그렇지도 않다. 애당초 무명이면 알려지지도 않았을 것이고, 주나 반스의 위치나 유명세를 생각해보면, 가장 널리 알려진 작가까진 아니더라도, 모더니즘에 조금 관심을 기울이는 독자라면, 쉽게 접할 수 있는 작가 중 하나니까. 더군다나 그녀가 요 근래 다시 재발굴되는 엘자 폰 프라이타그-로링호벤 같은 작가와 비교하면, 적어도 대표작은 꾸준히 절판되지 않고 판매되어왔다.

아무튼 <나이트우드>는 일단은 소설의 카테고리에 있지만, 산문시에 더 가까운 작품이다. <나이트우드>에 대한 감상은 아니므로 여기까지만 마치겠지만.

반스는 천성적으로 시인이었고, 스스로를 시인으로 여겼고, 어찌되었든 시인이다. 물론 그녀는 난해하다. 과작을 한 작가기도 한데, 최근에 정리되어 출간된 <시 모음집>을 참고하여도, 그녀는 늘 여러 원고 사이에서 고민하고 또 반복하고 변주하는 작가였으므로 더더욱 일반적인 독자가 다가가기는 사뭇 어려운 그런 작가다.
초기작인 <나이트우드> 자체도 빈말로도 쉽다고 할 수 없는데, 말년의 그녀는 노년의 거장 시인들이 그러하듯 신화적인 존재로 승화하였고, 자연스레 간결하고 짧으면서도 그렇기에 다가가기 어려운 세계로 발걸음을 옮겼다.


카인의 칼이 찌르기 위해 들어올려진다.
아벨은 먼지 속에서 일어난다.

빌라도는 자신의 혀를 찾을 수 없다.
유다가 목멘 나무가 헐벗었다.

루시퍼가 대지에서 포효한다.
그리스도가 자신의 죽음으로 추락한다.
- <변신> 中

이처럼 간결하면서도 그 시를 파헤치긴 난해하다. 오히려 너무나도 간결하기에 우리는 그 숨겨진 행간을 읽는데 더욱 몰두해야한다.

<봄의 제전> 

인간은 자신의 주제의 육신을 몰아낼 수 없다, 
자아내는 실 위의 누에가 
다시 생각하기 위해 수의를 잣는 것처럼. 

그런 반스가 일생을 몰두한 것은 위의 3행으로 이루어진 짧은 시를 완성하기 위해서였다고 <시 모음집>의 연구자는 밝힌다. 정확하게는 저 3행으로 시작된 시의 완성을 보기 위하여. 물론 수많은 버젼과 여러 분량의 초고를 남길 뿐, 여전히 미완성에 가깝지만.
반스의 세계는 저 시를 생각해도 틀린 말은 아닐 거다. 다시 생각하고, 숙고하기 위하여 수의를 잣는 일. 자신의 불운한 가정사나 연애 등을 다시 생각해보며 주제 속 육신을 몰아내려는 불가능한 시도. 
본래 <나이트우드> 번역에 대한 소개로써 시작한 글이므로, <나이트우드>에서 그러한 시도를 만나볼 수도 있을 거다.


*반스의 작품군을 생각하면, 사실 <나이트우드> 하나만 읽어도 일반적인 독자들은 충분하긴 할 거다. 장편으론 나이트우드가 완성본에 가깝고, 단편집도 한 권 분량에 나머지는 불완전하게 편집된 시 모음집(난잡한 원고 정리를 아직도 한참 기다려야하는), 번역될 가능성이 있으면 놀라울 시극 안티폰과 단막극들, 기자로 일할 때 인터뷰집이나 짧은 산문집 정도가 현재로선 만날 수 있는 거의 전부다. 그것도 상당수는 중고를 노려야한다.



허먼 멜빌 (2) <모비딕, 혹은 고래> - 나는 그저 배를 탄다 프로젝트 - 허먼 멜빌




<날 이스마엘이라 부르라. Cal me Ishmael>

<모비딕, 혹은 고래>

이 괴물 같은 작품은 말 그대로 작가였던 멜빌 본인 조차도 파멸로 몰아넣은 괴물 같은 녀석이지만, 우리는 여전히 모비딕에 대해 명확한 답을 내릴 순 없을 거다.
피쿼드 호를 미국의 상징으로 해석할 수도 있을 거다, 그런 해석이 실제로 많기도 하니까. 우연치 않게도 피쿼드 호의 선원의 숫자가 당시 미국의 주 숫자와 일치한다는 사실이나 다양한 국적으로 구성되었다는 사실은 이 모든 걸 멜빌의 세계에서의 아메리카로 볼 수도 있을 것이며 에이허브를 그러한 미국을 이끄는 지도자로 볼 수도 있을 거다. 혹은 고래에 관한 자연적인 소설이나 형이상학적인 투쟁으로 볼 수도 있을 거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경악스러운 것은 그저 평범한 모험소설이자 해양소설이 될 수도 있었을 이 책이 고래와 인간의 싸움을 형이상학적 투쟁으로 바꾸어버린다는 점에 있을 거다.

<날 이스마엘이라 부르라. Cal me Ishmael>
영문학에서 가장 유명한 첫문장 중 하나인 이 문장은, 스스로를 추방된 자로 부르는 한 '잘못된 고아'의 회고록임을 알려주며시작된다. 이스마엘, 혹은 에이허브나 피쿼드의 모든 선원들, 그리고 멜빌의 고뇌는 대체 무엇일까?
배를 타는 것은 일종의 자살과도 같은 행위로 모비딕은 첫 장에서부터 묘사한다. 안식이 있는 뭍이 아닌, 떠돌아다니는 바다로 나가는 행위.

<입가가 일그러지는 걸 깨달을 때, 내 영혼이 축축하고 비 내리는 11월이 될 때, 관 파는 가게 앞에 나도 모르게 발걸음을 멈추고 만나는 장례 행렬마다 그 끝을 쫓을 때, 무엇보다도 길가로 달려나가 지나가는 이의 모자를 보는 족족 후려쳐 시비를 걸고 싶은 충동을 도덕심으로 강하게 자제할 때, 그럴 때 나는 가능한 빨리 바다로 가야할 때가 되었다는 걸 깨닫는다. 그게 내겐 권총과 총알을 대신한다. 철학적인 수사 속에서 카토는 칼 위로 자신을 던졌다. 나는 그저 배를 탄다.>

이스마엘로 시작하여 바다로 나가는 자신의 선택을 일종의 자살 행위로 묘사하는 이 대목은 가장 멋진 도입부 중 하나일 거다. 무엇보다도 모비딕의 고뇌를 제일 잘 드러나는 장면 중 하나다. 스스로 목숨을 중단하는 걸 미덕으로 여긴 로마인들과 달리, 기독교적 세계관에서 자살이 금기시되는 세계에선 추방된 자조차 그러한 금기를 지킨다. 그러나 뭍에서 생육하고 번성하는 것과 달리, 추방된 자는 바다로 향하여 죽음과 대면한다. 그리하여 이스마엘이 된 이방인은 배를 타고, 피쿼드 호의 부분이 되며 에이허브가 되고, 흰 고래와 장대한 투쟁을 시작한다.

이스마엘이든, 에이허브든, 멜빌이든, 그는 본질적으로 패배자였고, 고뇌하는 자였으며 투쟁하는 자였다. 이는 모두 같은 말이다. 멜빌에게 있어 고뇌는 곧 투쟁이며 이는 곧 패배로 이어졌다. 시대적인 그의 가장 큰 고뇌는 역시나 종교적인 회의였을 것이다. 자살을 하지 않으면서도 편법을 사용하는 기독교인처럼, 멜빌의 세계는 이러한 믿음에 고뇌하는 이의 투쟁을 밑바탕으로 한다.
<모비딕>에서 가장 유명한 대목 중 하나이자 에이허브가 자신의 포부를 밝히는 대목에선 이러한 투쟁이 무엇보다도 잘 나타난다.

<"우둔한 짐승에게 복수라니!" 스타벅이 외쳤다. "놈은 그저 눈먼 본능으로 당신을 쳤을 뿐이요! 미친 짓이야! 에이허브 선장, 우둔한 것에게 분노하는 것은 감히 신성모독으로 보이요.">

모비딕을 향한 에이허브와 멜빌의 증오와 투쟁은 당연한 섭리에 대한 반란이자 신성모독이며 보이지 않는 투쟁으로 나타난다. 멜빌은 에이허브의 입을 빌어 자신의 고뇌에 대해, 그리고 자신의 증오를 연설한다.

<모든 보이는 사물들은, 이 사람아, 그저 마분지 가면에 불과해. 하지만 일어나는 일들 속엔, 그 살아 숨쉬는 움직임 속엔 의심할 수 없는 행위가 있지.  거기엔 알려지지 않았지만 분명 계획된 존재가 자신의 형태를 무심한 가면 뒤에서 뽐내고 있어. 만약 인간이 쳐부순다면, 그 가면 너머를 부셔야해! 벽을 뚫고 가는 것 외에 죄수가 어찌 자유로워질 수 있겠는가? 내겐 그 흰 고래가 바로 날 뭉개는 벽이야, 어떨 때엔 그 너머에 아무 것도 없지 않을까 싶지. 하지만 됐어. 그가 나를 고되게 만들어, 그가 나를 짇밟고 있어. 난 그놈 속에서 알 수 없는 악의가 온 힘을 다하고 있는 터무니없는 힘을 볼 수 있어. 그 알 수 없을 것이야말로 내가 증오하는 것이야. 그 흰 고래가 그것의 대리인이든 그 자체든 난 그놈에게 내 증오를 퍼부울 거야. 내게 신성모독을 말하지 말게, 이 사람아. 날 모욕한다면, 태양이라도 부술 테니까. 태양에게도 그럴 수 있다면, 다른 것도 마찬가지겠지.>

보이지 않지만, 너머에서 우리에게 관여하는 힘에 관한 투쟁. 이러한 형이상학적 투쟁이 곧 모비딕의 본질이 되며, 그저 고래와 포경선에 관한 해양소설을 멜빌은 순식간에 인간의 형이상학적 투쟁으로 바꾸는 괴물로 바꾸어버린다. 무엇보다도 에이허브라는 이 반란자이자 프로메테우스는 희망차게 선언한다.

<누가 내 위에 있는가? 진리엔 한계가 없다!>


<그리고 하나님께선 거대한 고래들을 만드셨다> - 창세기 (KJV 기준)

이러한 보이지 않는 힘, 혹은 신이나 그 대리인, 그것도 아니면 그저 불합리함 자체를 향한 도전은 다소 모순적으로 나타난다. 이러한 모습이야말로 모비딕아란 괴물이 더욱 우리를 혼란 속에 빠뜨린다. 멜빌은 끝없이 당시 기준으로 고래에 관한 모든 것을 서술한다. 반쯤은 고래를 향한 애정어린 백과사전이라고 부를 만큼 모비딕은 '고래'에 대해 알고자 하며, 탐구하고자 하고 무엇보다도 그걸 알 수 있을 거라 믿는다.
그러나 그 반대편엔 역시나 흰 고래가 자리잡는다. 에이허브를 부순 것처럼, 읽는 독자로 하여금 모든 것을 의문으로 남긴 채 그저 부술 뿐인 그러한 흰 고래가.
멜빌 본인조차도 모든 걸 의문으로 남겨두었을 뿐이다. 그저 레이첼, 혹은 라헬은 자신의 아이들 대신, 길 잃은 고아를 건져내었을 뿐이다.
그는 자신의 신화를 만들어내는데엔 성공했다. 모비딕은 미국 문학이 낳은 가장 괴물 같은 책으로 남을 것이며 아마도 <미들마치>와 더불어 가장 위대한 영어소설로 남을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명성을 멜빌은 결코 알지 못할 거다. 이미 멜빌 본인조차 이 책이 자신을 집어삼키고, 패배로 몰아넣을 책이란 걸 직감했으며 동료들에게 호소하기도 하였으니까.
그러나 에이허브, 혹은 멜빌은 자신이 패배할 것을 알았고, 투쟁할 것을 알았으며 그걸 받아들여서 패배하고 사라진다.

물론 <모비딕>은 거대한 괴물이므로 여기 적힌 면은 이 거대한 책의 극히 부분에 불과하다. 각각의 선원들의 이야기나 모비딕 속 멜빌이 그리는 아메리카의 모습 등 누군가는 이미 그런 걸 이야기하고, 또 이야기할 것이다. 그나마 가장 확실한 것, 마분지 가면 너머를 부수려는 주먹질을 하는 것은 바다에 나가는 것처럼 이 괴물과 만나는 것일 거다.



p.s. 사실 <미들마치>와 <모비딕>의 대결은 아무리 봐도 영미의 자존심 싸움에 가까울 거다. 둘 중 어느 게 '더' 위대한 영어 소설인가>? 그 답은 대게 답하는 이의 국적에 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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