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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블로그는 잉여의 블로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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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잉여입니다.

JHALOFF에 대한 발음은 정해진 것이 없습니다. 쟐롭, 쟐로프, 자알로프 등등 원하시는데로 부르시면 됩니다.


사실 JHALOFF란 아이디엔 별다른 의미가 없습니다. 그저 러시아사람처럼 보이게 만든 글자들의 나열입니다.
물론 각각의 글자엔 의미가 있지만, 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하겠습니다.

도끼는 어머니 러시아의 위대한 수구꼴통 슬라브주의자이자 작가인 도스토예프스키의 애칭입니다. 오오 도끼 오오

만화책도 많이 읽습니다. 죠죠는 저의 인생의 만화입니다. 만화책은 없지만, 화집은 소장하고 있습니다. 만화책도 언젠가는 소장할 예정입니다.

WRYYYYYYYYY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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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와의 이별 1 - 말하라, 나보코프여 ???


나보코프의 대표작이 <롤리타>지만, 사실 <롤리타> 하나만으로 파악하기는 조금 힘든 작가다.

우선 나보코프란 인간 자체가 굉장히 특이한 인간이다.

러시아인이면서, 유럽과 미국으로 망명했고,

러시아어와 영어, 모두를 사용해 소설 활동을 했으면서, 이 두 개의 다른 언어에서 모두 큰 성공을 거두어 '고전' 작가가 되었다.*
(러시아어쪽은 로쟈 블로그에서 얻은 정보지만, 꽤 권위있는 연구가가 뽑은 20세기 러시아소설 20대 걸작에 나보코프의 <재능>이 있다. 그의 러시아 소설들도 상당히 연구되고,
굳이 <롤리타> 없고, 러시아어로만 활동했어도 사라질 작가는 아니었다고캄.)

나와 나보코프의 첫만남은 역시 민음사 <롤리타>였다.

처음 <롤리타>를 읽었을 때는 중 2무렵으로 기억하고, 고백하자면, 읽었을 당시 그렇게까지 인상 깊은 책은 아니었다. 조금 혼란스러웠던 것은 기억난다.
물론 <롤리타>를 구입할 당시, 이 책의 '악명'은 알고 구입했지만, '야설'을 바라진 않았다. 소위 '고전'이 되어버린 '야설'에서 '야한 것'을 기대하며 읽는 것 자체가 어리석은 행위란 것은 이미 예전에 깨달았기 때문에.

생각해보면 <롤리타>를 후에 다시 영어로 읽었을 때, 이 책의 진가를 깨달았던 것 같다.
물론 이때도 나보코프란 작가 자체에게 그렇게 관심있는 것은 아니어서, <롤리타>만 읽었다.

훗날 본격적으로 나보코프란 작가에 대해서 덕질을 시작하게 된 계기는 수업시간에 그의 러시아어 소설 중 하나인 <루진의 방어>를 읽으며, 점차 관심이 가지게 된 것이 시초일 것이다.

<롤리타>를 읽을 때도 어렴풋이 깨달았지만, 나보코프에게 문학은 말 그대로 '게임'이다. 그것도 자신이 창조한 미로에서 고생하는 독자의 모습을 조롱하는 아주 사디스트적인 변태 작가의 게임.

'문학은 곧 독자를 조롱하는 게임'이란 나보코프만의 공식을 그의 모든 작품에서 나타난다. 다만 한가지 다행인 것은 그 조롱이 결코 불쾌하지만은 않은, 자신 안에 숨어있는 마조 성향을 일깨우는 조롱이란거겠지.

<루진의 방어>에서 나보코프는 체스 천재 루진을 등장시키고, 그의 파멸을 조종한다. 비록 그의 젊은 시절에 쓰인 소설이지만, 여러모로 <롤리타> 속 험버트 험버트를 연상시키게 만드는 주인공은, 비록 소설 자체는 정상적이지만,
여러모로 아직 깨어나지 않은 무엇인가를 짐작하게 해주었다.

이에 나는 나보코프에 대해 더 알고 싶어했고, 그의 또다른 대표작이자 그의 최고 걸작인 <창백한 불꽃>을 구입했다.

<창백한 불꽃>을 산 이유는 우선 그 특이한 구성에 호기심을 느꼈기 때문이다. 999행의 <창백한 불꽃>이란 장시와 그 장시에 주석을 붙이면서 이야기를 전개하는 방식.

설명만 들었을 때는 도무지 상상조차 되지 않았지만, 그것을 실현시키는 나보코프의 필력에 감탄하며, <창백한 불꽃> 속 4 명의 예술가들의 삶에 몰입하였고,

마침내 이 작가의 다른 작품들도 마저 읽고자 결심했다.

아버지의 정치적인 죽음 이후, 정치에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는 나보코프의 소설을 이해하기 위한 좋은 방법은 그의 소설들이 언제나 '예술가와 그의 피난처'를 다루고 있다는 것을 알면 한결 쉬워진다.

언제나 그의 소설 속에서는 '험버트 험버트'와 같은 예술가들이 등장하며, '롤리타'와 같은 그의 피난처가 존재한다. 그리고 진짜 예술가 나보코프는 이러한 자신의 창조물들을 조롱하며 파멸로 내몬다.

나보코프는 예술지상주의자이며, 퍼즐과 수수께끼에 집착하며 귀족주의자이자 엘리트주의자고, 천재를 숭상하며, 스스로를 천재라고 믿고, 실제로도 그러한 인간이고, 과거의 러시아를 그리워하지만, 혁명 이후의 러시아는 철저하게 경멸하는 인간이다.

이 정도가 나보코프란 작가의 작품들을 읽어볼 때, 알고 있으면 유용한 사실이라고 본다.

민음사 판 <롤리타>의 해설의 제목은 '저자의 죽음'이지만, 나보코프의 소설 속에서는 '저자'의 죽음은 없다. 오히려 '저자'는 군림한다.

그는 철저하게, 그의 소설 속 표현처럼, 세상과 현실을 창조하고, 그것을 갖고 놀며, 할리퀸을 보는 예술가다. 
'서문'부터 소설을 시작하지만, 소설의 끝에는 '롤리타란 책에 관하여'란 진실을 보여주고, 스스로를 모델로 소설을 쓰지만, 끝없이 현실과 소설의 차이점을 일깨워주는 그의 작품속에서 어떻게 저자의 죽음이 존재하는가?

물론 나보코프의 소설들이 상당히 일관된 소재들을 가지고 있지만, 그의 소설들은 제각기 각자만의 고유한 개성이 있고, 결코 지루하지 않다. 오히려 비슷한 주제나 소재가 등장해도, 그것을 만화경처럼 화려하게 변주시키는 작가가 나보코프다.

다만 역시 그의 한계는 '예술의 세계'에 갇혀있다는 것이다. 아버지의 정치적인 죽음 자체가 이 작가에게 트라우마가 된 것은 아닐까? 물론 정치적인 문제를 다루지 않을 수도 있지만, 나보코프의 경우는 오히려 의식적으로 너무 피한다는 느낌이다.

정치적인 주제로 이어질 수도 있었던 <벤드 시니스터>의 경우에도 그는 오히려 의식적으로 문제 거론을 피한다. 그렇기에 소설들 자체는 다양하지만, 오히려 그 주제면에서는 거의 한계가 있다고 생각한다.

물론 나보코프의 소설들을 읽었다고 해서, 세바스찬 나이트, 아니 블라디미르 나보코프의 진짜 인생을 알았다고는 할 수 없을 것이다. 나보코프는 독자를 낚기 위한 출구 없는 미로를 만들었고, 
내가 읽은 것은 그저 유리창에 비친 태양에 의하여 살해당한 황여새의 그림자에 불과할테니까.

나보코프의 최고작을 3개 정도 꼽자면, <롤리타>, <창백한 불꽃>, <아다, 혹은 열정: 가족의 연대기> 를 꼽을 수 있을 것 같다.

<롤리타>야 말할 필요가 없을 정도로 이미 유명한 작품이며, <창백한 불꽃>은 시와 소설로 이루어진 나보코프의 환상적인 최고 걸작이며, <아다>는 나보코프 스타일로 쓰여진 러시아 가족소설이라고 볼 수 있다.

거기다가 추가로 러시아어로 쓰여진 최고 걸작 <재능>이나 <세바스찬 나이트의 진짜 인생> 정도를 뽑을 수 있을까.

사실 이렇게 말하지만, 내 개인적인 의견으로는 나보코프가 영어로 쓰인 소설들은 대부분 읽어도 손해볼 것은 없다고 본다. 그만큼 매력적인 작가이고, 색다르며 재밌으니까.

나보코프를 읽기 전에 그가 사랑했던 러시아의 작가들의 책들을 먼저 읽는 것도 좋지 않을까? 전반적으로 러시아 작가들에 대한 그의 경외나 조롱 등이 상당부분을 차지하고 있으니까. 푸슈킨이나 레르몬토프, 고골 정도는 읽으면 편하지 않을까 싶다. 추가로 그의 조롱의 대상이 되는 도끼도.

앞으로 문동이나 다른 출판사에서 점점 더 많은 나보코프의 책들을 번역하여 더 많은 사람들이 나보코프를 즐길 수 있었으면 좋겠다.

이것으로 나보코프의 소설들과는 결별이다. 

새로운 작품, 작가와의 만남이 필요한 시점이다.

물론 완전한 이별은 아니다. 나보코프의 다른 책들 또한 남았으며, 언젠가는 나보코프한테 돌아올 때도 있을 것이다.

그때까지 이별이다, 나보코프의 소설들아, 나보코프는 롤-리-타처럼 세 번의 혀놀림이 안 되니까 아쉽구나. 

근데 이렇게 말하는데, 나보코프 논픽션들을 질러부려서 FAIL.

3줄요약
1. 헉헉 롤리타 헉헉
2. 사실 문동 안 나와도 난 상관없다. 걍 계속 연기해라.
3. 나보코프 강의들 질러버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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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셉 콘라드 <어둠의 심연>- 지옥의 묵시록 독서일기

괴물과 싸우는 사람은 그 싸움 속에서 스스로도 괴물이 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네가가 심연을 들여다 본다면, 그 심연 또한 너를 들여다본다. - 니체

조셉 콘라드의 <어둠의 심연 Heart of Darkness>는 단편이나 장편, 어느 한쪽에 포함되기 애매한 100 여쪽 분량의 짧은 소설이지만, 끝까지 읽는 것은 매우 고통스러운 과정이었다.

그러나 이것은 이 소설이 지루하거나, 못 쓰여졌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재밌다. 또한 너무나도, 너무나도 잘 썼다. 책의 재미를 넘어서, 읽는내내 잘 썼다고 감탄하는 작가가 몇 명있지만,

콘라드 또한 그런 부류였다. 더군다나 이 작가가 폴란드 태생이며 20대 후반에 가서야 영어를 배우기 시작했는데도, 왠만한 본토 작가들보다 뛰어나다는 것을 생각하면, 정말로 넘을 수 없는 4차원의 재능의 벽을 실감하게 된다.

그럼에도 읽는내내 머리가 아프며, 마음 어딘가가 고통스러웠다. 주인공 말로가 커츠를 찾아, 어둠의 심연으로 들어가면 갈수록 더욱 그 과정은 험난해졌다.

<어둠의 심연> 자체는 현대의 유명한 영화 한 편으로도 각색되었다. <지옥의 묵시록>이 바로 그 영화다. '지옥의 묵시록'이란 또다른 제목만큼 이 책에 어울리는 제목이 있을까?
(물론 원제는 Apocalypse Now지만.)

베트남과 달리, 원작은 19세기 콩고를 무대로 하고 있지만, 사실 이 작품에 굳이 배경이 중요할까?

아, 물론 커츠의 몰락 등을 통하여, 제국주의의 열강들의 추악한 모습을 비판한다, 는 식으로 해석될 수 있고, 실제로도 그렇게 많이 해석되고 있다.

그러나 단순히 그쪽으로만 해석되는 것은 이 책의 진가를 너무 축소시키는 짓이다.

커츠의 몰락은 영웅의 몰락이자 서구 제국주의의 추악한 진실이며 인간의 본성의 고발일 것이다.

어둠의 심연은 아프리카 대륙의 정글이면서도 인간의 모든 것이 그대로 벗겨지는 곳이다.

그곳은 욕망과 증오, 야만이 지배하는 땅이다.

한때는 영웅적이었던 커츠 또한 어둠의 심연으로 들어갔고, 몰락했기에 그는 비극적이다.

독자는 소설 속 말로의 주절거림을 통하여 이성과 과학의 사도인 커츠가 야만과 잔임함의 괴물로 변해버린 것을 목격한다. 그리고 작가는 이러한 변화를 목격하기까지의 과정을 모험으로 빙자하여 고통스러울정도로 치밀하게 글로 풀어쓴다.

마치 글을 통하여 우리 자신이 커츠처럼 어둠의 심연으로 들어가는 것처럼.

그러나 더욱 무서운 사실은 커츠나 말로 또한 그저 평범한 한 사람에 불과하다는 사실이다.

어둠의 심연에서 제대로 빠져나오지 못한 채 그저 "끔찍해! 끔찍해! The horror! The horror!"를 외친 커츠의 최후는 당연한 것이다. 그는 평범한 인간에 불과하니까. 문명인이라고 믿었던 자신이 어둠의 심연에 의하여 괴물로 변해버리고, 모든 것을 지옥으로 만들었다는 것을 깨달았으니까.
평범한 인간이 지옥을 견딜 수는 없다. (저 The horror! The horror!를 솔직히 딱히 대체될 말은 없는 것 같은데 보통 저렇게 번역하는 것 같다.)

이러한 영문학사에서 가장 유명한 유언 중 하나인 커츠의 외침은 그렇기에 마치 읽는 독자의 머릿속을 후려갈기는 망치질과 같다. 커츠는 영웅이나 괴물과 같은 초월적인 존재가 아니다. 지금 이 글을 읽는 너와 똑같은 평범한 인간이다. 
그렇기에 영웅이나 괴물의 모습으로서 나온 커츠에게 홀릴 수밖에 없는 것이다. 말로처럼, 이 책을 읽은 나처럼.

콘라드와의 만남은 즐거웠다. 이걸로 또다시 더 읽을 작가리스트에 한 사람이 추가되었다. 로드짐이나 노스트로모, 비밀 요원 등도 조만간 읽어봐야겠다.

똥폼 잡으니까 어색하다.

1줄 요약:

이히히 인간은 똥이야 똥-!! 이히히 오줌 발사 발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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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은 책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나도 크고, 아름다웠다 지름


그것은.....훌륭한 벽지였다.

번역본이 훨씬 싸서 좋다

크고 아름답다

흉기로 쓰기 딱이네.

제목 번역을 잘 했네, 잘 팔리게.

로쟈 블로그에서 봤는데, 이런 책 필요해서 샀다

틈날 때마다 읽어야지

퀴어 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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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인즈버그, 오하이오- 기묘한 사람들의 기묘하지 않은 이야기들 독서일기

<와인즈버그, 오하이오>는 미국 작가 셔우드 앤더슨의 단편집으로, 오하이오주 와인즈버그라는 가상의 마을을 배경으로 하는 일종의 연작 단편집이다.

작가의 서문에서처럼 이 와인즈버그는 '기괴한' 사람들이 모인 작은 시골마을이며, 앤더슨은 20 여개의 단편들에서 기괴한 마을 사람들에 대하여 묘사하고 있다.

펭귄판 서문에서 맬컴 카울리는 이 책이 산업화 되기 이전의 순수한 시절에 대한 향수라고 표현하고 있다. 책을 읽은 후에는 어느 정도 공감이 되었지만, 사실 그렇지도 않다.

확실히 단편들은 와인즈버그의 기괴한 사람들에 대해 다루고 있다.

'더러운 손'으로 '미트스핀'을 암시하는 짓을 하였다는 누명을 써서 추방되었지만, 오히려 와인즈버그에서는 누구보다도 베리 채취를 잘 하는 유능한 손이기에 사랑받는 남자의 이야기나,

도시로 떠나간 연인을 그리워하다가, 다른 이와의 소통을 원하여 나체로 거리를 질주하는 여자라든지, 술에 취한 환상으로 행복을 얻는 남자라든지, 등등 상당히 기묘하고, 기괴하다.

이러한 기괴한 자들의 소소한 일상은 그들이 기괴해서 남들과 소통할 수 없거나, 소통할 수 없어서 기괴하게 되어버리는, 일종의 희비극적인 상황의 연속이다.

다만, 와인즈버그는 이러한 다른 이들과 '소통'할 수 없어 소외된 기괴한 자들의 피난처처럼 그려지고 있으며, 이러한 기괴한 사람들은 '기괴'하지만, 오히려 그 누구보다도 '순수'하기에 냉혹한 현실에 동화될 수 없는 자들일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기괴한 사람들의 이야기는 기괴하지 않고, 오히려 우리의 삶과 상당부분 관련이 깊다. 특수성에서 보편성을 추구한다는 말이 있듯이, 작가 또한 어느 정도 그러한 부분을 추구한 것이니라.

작중 상당히 '손'에 대한 묘사 등이 강한데, 첫번째 단편 또한 손에 관한 이야기고, 손이 가질 수 있는 다양한 의미들, 남을 성추행할 수도 있고, 경제적 활동에 쓰일 수도 있고, 글을 쓸 수도 있는 등등,을 생각하면, 작가가 이 점에 의미를 둔 것이 아닐까 싶다. 

또한 <와인즈버그, 오하이오>는 개별적인 단편들이 모인 단편집이지만, 전체적으로 보면, 조지 윌러드라는 한 청년의 성장기이기도 하다. 마을의 신문기자인 그는 여러 기괴한 마을 사람들과 접촉을 하며, 작중 마지막에는 피난처인 와인즈버그를 떠나,
냉혹한 현실을 경험하러 바깥세상으로 나아간다. 그 미래 자체에 대해서는 아무도 모른다고 작가는 묘사했지만, 그가 높이 사는 것은 직접적으로 모험을 하려는 그 정신이겠지.

문체면에서는 상당히 간결한 문장을 사용하는데, 설명에 따르면 후에 헤밍웨이와 같은 작가들에게 영향을 주었다고 칸다. 어느 정도 문장에서 인간 그 자체에 대한 따스함이 느껴지는 것 같기는 하지만, 사실 그렇게까지 인상깊은 책은 아니다, 개인적으로.

다만 남에게 추천할 정도는 된다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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