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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블로그는 잉여의 블로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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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블로그는 주로 책에 관하여 다루고 있지만, 다른 분야도 애기할 수도 있습니다.

저는 잉여입니다.

JHALOFF에 대한 발음은 정해진 것이 없습니다. 쟐롭, 쟐로프, 자알로프 등등 원하시는데로 부르시면 됩니다.


사실 JHALOFF란 아이디엔 별다른 의미가 없습니다. 그저 러시아사람처럼 보이게 만든 글자들의 나열입니다.
물론 각각의 글자엔 의미가 있지만, 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하겠습니다.


콘래드 (2) 로드 짐 - 로드 짐의 악몽 독서일기-소설




로드 짐의 악몽은 아이러니하게도 우리가 로드 짐이 누구인지, 아니 무엇인지 알 수 없다는 점에서 온다. 적지 않은 분량 속에서 바다 위를 표류하는 선원처럼 우리는 이런저런 증언들에서 헤매지만, 거기엔 로드 짐이 없다. 어디에도 없다. 결국 이 소설의 호불호는 로드 짐이 누구인가에서 오는데, 우리는 어떠한 확답도 찾을 수 없다. 자연스레 의견은 분분해지고 우리는 계속 표류할 수밖에 없게 된다.
조지프 콘래드의 <로드 짐>은 앞서 언급했던 것처럼 ‘말로우 삼부작’으로 기획된 짤막한 이야기였으나 집필 도중 거대한 장편으로 자라버렸다. 그러나 여전히 상당한 이야기는 우리에게도 친숙한 말로우가 들려주고 있다. 그렇지만 이 책은 어디까지나 ‘로드 짐’ 혹은 ‘짐 나으리’의 이야기다.

‘객관적’으로 보았을 때 그는 비겁자다. 항해사지만, 침몰하는 배에서 직업정신을 저버린 채 다른 선원들과 도주한 비겁자다. 따라서 사람들에게 손가락질 받으며 법의 심판을 받고, 언제나 죄의식 속에서 살아간다.
말로우의 도움을 받아 동남아로 넘어가 사람들 사이에서 일을 하려고 해도 여전히 죄의 대가는 그를 방황하게 만들고, 끝끝내 오지로 들어가 그의 죄를 모르는 자들 속에서 ‘로드 짐’으로 군림하게 만든다. 그리고 끝끝내 다시 몰락한다.

그러나 문제가 있다면, 결국 우리가 알 수 있는 ‘진실’이 이 책에 없다는 데에 있다. 이는 콘래드가 기획한 형식에서부터 아주 적나라하게 등장한다.
이 책은 크게 세 형태로 저술되는데, 초반부에서 짤막하게 전지적 관점에서 진행되며 ‘진실’, 혹은 ‘사실’만을 요구했다면, 그에 대한 답례로 말로우가 들려주는 로드 짐의 이야기가 진행된다. 그러나 이마저도 말로우가 로드 짐으로부터 들은 이야기이거나 다른 이로부터 들은 이야기가 상당수며 심지어 말로우조차 다른 누군가에게 이러한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다. 그리고 마지막 부분은 말로우의 편지를 통한 증언으로 이어진다. [
증언이란 것은 객관성이 결여된다. 적어도 증언만으로, 그것도 한 관점의 증언만으론. 이는 사실의 증거가 될 수는 있으나 사실 자체가 되기에 우리는 의심할 수밖에 없다. 그렇기에 수많은 작가들이 1인칭 증언 속에서 얼마나 많은 속임수들을 감추었던가? 콘래드도 그런 걸 아주 잘 알고 있었을 거다.

이에 우리는 자연스레 의심할 수밖에 없다. 이야기를 들려주는 자, 짐을 직접 보았던 말로우조차 확신할 수 없는 로드 짐을 우리는 어떻게 판단해야하는 것인가? 그는 대체 누구인가?
그나마 증거가 될 수 있는 것은 콘래드와 말로우의 짐에 대한 평가일 거다. 그는 적어도 ‘우리 중 한 사람’이었다. 하지만 이로써 충분하진 않으며 여전히 우리는 로드 짐을 찾아 헤맨다.

도덕적 갈등에서 도망쳤으니 그는 비겁자인가? 그럴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다른 이들과 달리, 죗값을 치르기 위하여 법정에 섰으니 완전한 비겁자는 아닌가? 그럴지도 모른다. 몰락 이후의 로드 짐이 되는 그의 ‘모험’이 낭만적으로 묘사되므로 그는 영웅인가? 그럴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무기력하게 자살에 가까운 최후를 선택하는 그는 반-영웅인가? 그도 그럴지도 모른다.
이처럼 결국 로드 짐은 때때론 모순적이고 증언만으로 그를 판단하기엔 어려워 보인다. 누군가는 로드 짐을 일종의 나약한 현대의 소시민으로 평할지도 모르겠다. 어쩌면 그게 그나마 가까운 답이 될지도 모르겠으나 나로선 여전히 그가 무엇인지 정의하기엔 충분하지 않다고 본다.

어떤 의미에서 객관적으로 일어났던 사실마저도 로드 짐의 이야기가 전개됨에 따라 희미해지고, 주관으로 바뀐다. 때때로 누군가는 로드 짐이 어째서 도망치는지 사뭇 이해하기 힘들 정도로. 그러곤 정작 그에 관하여 아무 것도 모르는 원주민들 사이로 들어가 ‘로드 짐’이 되는 것을 보면 오히려 콘래드의 로드 짐을 향한 은밀한 조롱이 아닐까 의심될 정도다. 그러나 앞서 말했듯 로드 짐에 관하여 확신할 수 있는 것은 없다. 물론 그는 ‘악인’은 아니다. 그는 커츠처럼 군림하지 않는다. 그가 ‘로드 짐’으로 불리는 것은 어떤 의미에선 그의 회복에 가까우니까. 애당초 차라리 확실한 악인이었다면 판단을 내릴 수 있겠지만, 그는 언제나 경계에 걸쳐있다.
콘래드의 세계 속에서 많은 주인공들은 도덕적 시험을 받고, 거기에 실패하여 몰락하고 도피한다. 그런 의미에서 로드 짐은 ‘전형적인’ 콘래드의 주인공으로 보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여전히 로드 짐은 로드 짐이다. 우리는 그에 관한 목소리들에 홀려있을 뿐이니까. 아이러니한 것은 우리는 그의 ‘심리’를 집요할 정도로 듣는다는 점인데, 그럼에도 여전히 로드 짐이 누구인지 다가가긴 힘들어 보인다. 결국 소설 평가의 상당수는 로드 짐을 어떻게 받아들이는가에 달려있다. 이는 그가 행한 ‘객관적인’ 행적들을 의미하는 게 아니다. 

허나 우리는 알지 못할 로드 짐에게 너무 많은 관심을 주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렇다면 열심히 그에 관한 이야기를 들려준 말로우는 어떠한가? <로드 짐>을 말로우 삼부작의 마지막 이야기로 생각한다면 분명 좋은 마지막 이야기일 거다.
<젊음>에서 말로우는 젊을 적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여기에서 이야기하는 자나 행하는 자, 모두 말로우며 그는 모든 것의 주인이었다.
<암흑의 핵심>에서 말로우는 여전히 자신이 겪었던 일을 들려준다. 그러나 여기에서 말로우는 여전히 이야기하고 행동하는 자이나 커츠라는 유령에 홀린 배우와도 같다.
그렇다면 <로드 짐>은 어떠한가? 그는 여전히 말하는 자이다. 그러나 자신의 이야기를 말하지 않는다. 물론 로드 짐과 관련하여 말로우의 이야기 속 역할도 충분히 있다. 그러나 모든 것은 짐의 이야기이며 말로우는 짐에게 들은 이야기를 전달하는 자에 불과하다. 이제는 육신도 사라지고, 목소리마도 희미해진 그런 유령처럼.

어쩌면 여기에 실마리가 있을지도 모르겠다. 말로우는 그저 로드 짐을 우리들 중 하나로 여긴다. 온전한 우리로 여기지 않는다. 우리가 온전히 가지고 알 수 있는 우리 자신이 아니라, 헤매고 찾아야하는 우리들 중 일부다.


콘래드(1) <암흑의 핵심> 外 - 심연을 향한 순례 독서일기-소설




<청춘과 두 이야기>는 세 편의 중단편으로 구성된 책인데 <청춘>, <암흑의 핵심>,  그리고 <밧줄의 끝>을 수록하고 있다. 제목에서 알 수 있듯 콘래드의 가장 유명한 작품이 담겨 있고, 그 작품의 화자가 처음으로 등장하는 단편집이기도 하다.

본래 이 단편집을 콘래드는 ‘말로우 삼부작’으로 기획했다고 한다. <청춘>과 <암흑의 핵심>을 들려주는 화자는 그 유명한 찰스 말로우인데, 본디 <밧줄의 끝> 대신 <로드 짐>을 넣을 예정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처음엔 단편으로 구상했던 <로드 짐>이 거대한 악몽으로 자라나면서, 콘래드는 다소 급하게 다른 이야기를 찾아야했고, <밧줄의 끝>을 단편집 출간을 위해 빠르게 써내려가서 그 빈자리를 메꾸게 된다. 

 

<청춘>은 말로우가 처음 등장한 이야기이자, 말 그대로 청춘에 관한 짧은 단편이다. 여기에서의 말로우는 말 그대로 콘래드의 자전적인 인물이다. 이제는 중년의 말로우는 자신의 친구들에게 청춘 시절의 자신의 항해에 대해서 들려주고, 청춘 시절의 불멸을 꿈꾸는 풋풋함과 이제는 늙어버린 자신을 대조한다. 콘래드의 장기인 바다 이야기이며 다른 작품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가볍게 즐길 수 있다.


<밧줄의 끝>은 다소 실망스러운데, 우선은 그 분량의 애매함에서 문제가 있다. 이 소설은 분량으로 따지면 경장편에 가깝지만, 내용을 보자면 단편이 더 어울리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담고 있는 요소들은 단편에 어울리진 않다. 소설 자체는 한 노인의 몰락을 다루는 콘래드스러운 이야기다. <청춘>이 젊을 시절을, <암흑의 핵심>이 중장년 때를 다룬다고 했을 때 단편집의 구성을 위하여 ‘노년 시절’을 다루는 것은 균형에 맞는 선택으로 보인다. 실제로도 나쁘진 않으나 아무래도 말로우의 또 다른 이야기였으면 더 좋지 않을까, 그런 아쉬움이 더 앞선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이 단편집에서 가장 중요하며 이야기해야할 것은 역시 <암흑의 핵심>일 거다.


<암흑의 핵심>/<암흑의 심장> 등 여러 가지 제목으로 번역될 수 있는 이 중편은 너무나도 유명하지만, 여전히 너무나도 난해한 작품이다.

흔히 일컫는 콩고에서의 벨기에의 끔찍한 학살을 다루는 조지프 콘래드의 작품은 이 중편과 함께 그의 또 다른 단편 <진보의 전초기지>가 있다. 그렇지만 같은 주제와 장소, 비슷한 일을 다루지만, 그 양상은 확연히 다르다.


<진보의 전초기지>의 경우, 이 작품이 수록된 <불안의 이야기>를 다룰 때 조금 더 이야기할지도 모르겠지만, 끔찍한 악몽을 다루는 소설이다. 전지적 관점에서 진행되는 이 몰락을 다루는 악몽은 큰 논쟁이 없어 보인다. 레오폴드의 유령은 고리타분한 소시민들마저 타락시키는 천인공노할 일이었고, 콩고에서의 모든 것은 악몽 그 자체였다.


하지만 <암흑의 핵심>은 그 방향성이 조금 다른데, 이는 전적으로 찰스 말로우란 인물의 존재일 수밖에 없다. 말로우 덕분에 모든 것은 안개 속으로 사라지고 만다. 그래, 순례다. 그로 인하여 이야기는 단순한 악몽이 아닌, 여정이자 순례로 바뀐다.

<청춘>에서도 그러했지만, 찰스 말로우는 콘래드 본인의 자전적인 주인공이다. 이를 부정하긴 어려워 보인다. 그는 콘래드가 그러했던 과정을 통하여 콩고를 갔고, 콘래드처럼 ‘선원’이었으니까.

하지만 자전적인 인물을 작가와 완벽하게 동일시하는 것은 매우 위험한 일인데 콘래드 또한 말로우를 자신과 완전히 동일시하진 않는다. 이미 <청춘>에서도 그러했지만, 말로우가 배를 탄 나이는 콘래드와 다르며, 무엇보다도 말로우 본인은 콘래드와 달리 ‘영국인’이다. 어쩌면 콘래드 자신의 ‘괴리감’을 줄이고자 하는 소망일지도 모르겠다. 영어로 유창하게 글을 써도, 정작 콘래드는 여전히 러시아로부터 망명한 폴란드인으로 남을 수밖에 없었으니까.

물론 편하게 말로우를 콘래드로 생각하는 게 나을지도 모른다. 그의 국적은 영국인이지만, 여전히 이야기를 들려주는 말로우를 ‘영국적인 사람’으로 생각하긴 어렵다. 그는 기괴한 인물이다. 뱃사람이지만, 마냥 육체적인 노동자는 아니다. 단순하지 않고, 오히려 시종일관 냉소적이며 문학에도 조예가 깊다. 

콩고 한복판으로 커츠를 찾아 떠나는 그의 여정 자체는 낯설지 않다. 말로우에겐 이미 많은 선배들이 있었다. 테이레시아스를 찾아 저승으로 내려간 오디세우스와 아이네이아스, 지옥 밑바닥으로 순례를 떠난 단테의 전례를 그도 밟고 있는지도 모른다.


콩고 원주민들과 사투를 벌이며 강을 계속 건너는 모습에서 누군가는 기사도 문학에서의 기사의 여정을 찾을지도 모른다. 이러한 면만을 보면, 누군가는 이 작품 속의 제국주의적인 요소를 비판할 지도 모르나, 다르게 여지는 충분하다. 적어도 말로우는 그들을 자신과 같은 인간으로 여긴다. 이런 점을 제외하더라도 말로우는 전통적인 영웅들과는 분명 다르다. 

전통적인 신화와 소설이라면, 이러한 여정 끝에서 기다리는 것은 영광이다. 말로우가 기사나 조금 더 이른 시기의 소설 속 영웅이었다면, 그는 신비로운 인물을 만나 조언을 얻고, 쟁취를 했을 거다. 그러나 말로우는 그럴 수 없다. 그가 본 것은 영광이 아닌 진실이었으니까. 하지만 진실 자체는 이 소설에서 ‘생각보다’ 크게 중요하진 않다. 콘래드의 시대에선 그 자체만으로 충격적일지도 모르나, 우리에게 그 진실 자체는 익숙하다. 무엇보다도 소설의 처음부터 드문드문 진실과 거짓의 괴리감은 충분히 뿌려졌으니까. 

그 여정의 끝까지 함께하여 말로우와 함께 진실을 목격해도 우리는 여전히 물을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대체 말로우는 누구인가?


말로우와 달리, 커츠를 탐구하는 것은 상대적으로 쉬워 보인다. 가장 노골적으로 뿌려진 밑밥으로 알 수 있는 건 커츠가 파우스트 박사란 점이다. 괴테의 구원받는 파우스트가 아니다. 크리스토퍼 말로우의 지옥으로 끌려가는 파우스투스 박사다. ‘말로우’란 이름뿐만 아니라, 지나가는 투로 작중 한 인물이 ‘메피스토펠레스’에 비유되며 어떤 이상을 가지지만 결국 ‘암흑’에 완전히 먹혀서 구원받을 수 없다는 점에서 커츠는 충분히 훌륭한 파우스트다. 

(물론 이는 너무나도 노골적인 떡밥을 입이 문 것이므로 다르게 생각할 수도 있지만, 일단 넘어가보자)


그럼 말로우는 무엇인가? 이 소설이 재해석된 파우스투스의 몰락이라면, 말로우의 위치는 무엇인가? 메피스토펠레스? 그레트헨이나 헬레네? 혹은 다른 무언가? 하지만 쉽게 답은 나오지 않는다. 직관적으로, 적어도 파우스투스 박사의 전설 속에서 ‘말로우’가 맡을 역은 없어 보인다. 차라리 그는 이러한 전설을 들려주는 ‘크리스토퍼 말로우’의 역일지도 모른다. 콘래드의 입을 빌어서 독자들에게 전설을 이야기해주듯.


정말로 단순히 말로우는 무대 밖에서 이야기를 들려주는 자에 불과한가? 그렇지 않다. 그는 명백히 이야기에 참여하고, 이야기를 이끌며 동시에 들려주는 자다. 우리는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야 한다.

좋다, 말로우의 목적은 결국 커츠를 찾는 거다. 이게 그의 여정의 목적이다. 그리고 말로우가 커츠에게 ‘영향’을 받은 것은 분명해 보인다. 그렇지만 이 점이 우리를 더욱 더 미궁 속으로 몰아넣는다.


말로우가 찾는 커츠는 악명 높지만, 막상 <암흑의 핵심>에서 커츠의 크기는 ‘생각보다’ 크지 않다는데 그 문제가 있다. 정작 커츠는 거의 끝에서야 등장하며 그마저도 말로우 본인과 나눈 대화의 분량은 (아마도) 한 문단 정도에 불과하다. 물론 말로우가 커츠를 보았을 때 강한 인상을 받은 것은 사실이다. 그렇지만 정말로 삶에 영향을 끼칠 정도로 커츠가 말로우에게 중요한 존재인가?

다시 소설의 시작부분부터 생각해보자. 말로우는 시종일관 커츠에 대한 ‘소문’들을 듣는다. 커츠에 관한 목소리들을 듣는다. 처음엔 단순히 찬양 정도에 그치지만, 때때론 불화나 석연치 않은 목소리도 있고, 광신에 가까울 정도로 열광하는 목소리도 있다.

하지만 앞서 말했듯 말로우는 본질적으로 냉소적인 인간이며 이러한 목소리들 자체에 크게 감화되진 않는다. 오히려 그는 이러한 ‘환청’들을 괴롭다고 여기며 목소리들로 판단을 하지 않으려고 한다. 이미 말로우의 냉소를 통하여 우리는 커츠의 석연치 않음을 커츠를 만나기 전부터 느낀다. 말로우의 냉소가 판단하기에, 같은 사람들을 때리고, 착취하는 자들이 찬양하는 자를 곧이곧대로 믿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니까.

그럼에도 말로우는 커츠를 만나게 되고, 그의 마지막 목소리, 그 유명한 ‘그 공포, 그 공포’의 속삭임을 듣곤 커츠에게 도망칠 수 없게 된다. 이 자체는 놀랍지 않은 일이다. 소설 내내 말로우는 커츠의 여러 목소리들로부터 벗어날 수 없었으니까.


커츠는 공허한 존재로 묘사된다. 공허하다는 것은 다른 무언가로 채울 수도 있다는 뜻이다. 적어도 커츠 본인은 그걸 채우지 못하였다. 그렇기에 그는 몰락했고, 죽음을 맞이하여 육신을 잃어버린다. 마치 유령처럼 목소리만 남긴 채.

그리고 그 유령에게 말로우는 홀리고 만다. 커츠라는 공허한 존재, 텅 빈 공간에 자신을 끼워 넣고 만다. 그래서 그는 ‘공포’로부터 도망칠 수 없게 되고, 거짓 속에서 살고 있는 커츠의 약혼녀나 자신의 이야기를 듣는 온전한 영국인 친구들과 다를 수밖에 없다.

‘개인 individual’은 본디 나눌 수 없음을 의미하지만, <암흑의 핵심>에서 개인은 분열된다. 아니, 콘래드의 세계에선. 분열된 자아란 그럴싸하며 평론가들이 좋아할 만한 단어로 표현해도 좋다. 그렇기에 이는 말로우의 지옥 순례이자 공포와 목소리에 홀리는 자의 악몽이 된다. 그렇기에 말로우는 자신의 대본을 들려주면서 동시에 무대 위 배역을 맡을 수밖에 없게 된다.

따라서 이 소설은 제국주의의 야만을 폭로하는 소설이면서도 동시에 한 내면의 가장 어두운 곳, 제대로 표현될 수 없기에 애매모호하며 그렇기에 우리를 괴롭히는 암흑의 핵심으로 우리를 인도한다. 콘래드는 우리에게 확실한 답을 주지 않을 거다. 아마 그 자신도 줄 수 없을 테니까.


이 작품을 둘러싸고 여러 논쟁이 있고 분명 시대의 한계도 있다. 

말로우가 이야기에 앞서 언급하였던 과거 ‘문명을 가진’ 로마인들의 영국의 야만족들을 살육하는 것은 벗어날 수 없는 역사의 굴레라도 암시하는 걸까? 아니면 결국 영국인들도 ‘야만인’이었다는 걸 뜻할까? 혹은 커츠의 흑인 여자는 무엇을 암시하는가? 냉소적인 말로우는 야만/문명의 이분법을 받아들이는 건가, 비웃는 건가? 

몇몇 부분, 대체적으로 커츠의 약혼녀와의 만남 부분은 감상적으로 늘어진다든가, 묘사의 한계, 혹은 콩고인이 보기에 느껴지는 불편함 등 이와 관련된 논쟁은 계속될 거다. 어쩌면 여전히 안개 속을 헤매는 인물들, 커츠나 말로우, 혹은 이름 없는 말로우의 흑인 여자 등 너무나도 많은 의문들은 여전히 풀릴 수 없다.

그럼에도 위대하기에 읽을 만한 가치가 있다, 같은 말을 하고 싶진 않다. 어쩌면 커츠의 말이 이 책을 읽으려는 독자들에게 해줄 수 있는 전부일 지도 모르겠다. (무엇보다도 올바른 번역을 찾을 수 없다는 점에서 더더욱 우리를 미궁으로 빠뜨린다는 점에선 비슷하다) 


말로우의 또 다른 목소리는 그저 우리에게 언제까지고 속삭일 뿐이다.

그 공포, 그 공포(The horror, the horror). 


데이빗 존스 <괄호 사이> - 참호전과 신화 독서일기-시

(존스 본인이 그렸다는 표지)


데이빗 존스는 영국 모더니즘 화가이자 작가로 활동했던 인물인데 살아생전 당시엔 T.S. 엘리엇이나 오든, 혹은 예이츠 등으로부터 인정을 받았으나 잊혀졌던 작가 중 하나였던 걸로 보인다. 그러나 최근 들어 다시 재발굴되어 관련된 행사나 출판물도 다시 나오고 있는 실정이다.

화가이자 시인이란 점에선 역시 영국의 윌리엄 블레이크를 연상케 하는데 종교적인 작가란 점에선 어느 정도 연장선에 있을지도 모른다. 특히나 존스의 경우, 자신의 혈통에 웨일즈 계열이 있다는데 이런 점 때문인지 웨일스의 신화를 작품 속에 녹여낸다.

<괄호 사이>/<여담으로>/<괄호에 넣어서> 등으로 번역할 만한 그의 첫 작품 <In Parenthesis>는 그 제목부터 알맞은 번역을 찾기 난감하다. 말 그대로 '( )' 사이의 넣을 말이나 인용구를 의미하는데, 존스 본인조차 서문에서 자신은 이러한 괄호 사이에 넣을 알맞을 말을 찾지 못했다고 적고 있다.

이는 이 '시'의 특성상 그러할 지도 모른다. 이 작품은 1차 대전 한복판으로 독자를 끌어들이니까.

1차대전에 참전한 작가들도 많고, 그에 관한 글을 쓴 작가들도 많다. 오웬이나 루퍼트 브룩 등도 유명하지만, 존스는 몇몇 평에 의하면 '1차 대전을 다룬 가장 뛰어난 작품'을 썼으니 그의 책을 이 목록에 넣어도 문제는 없을 거다.

약 2백 쪽 분량의 이 거대한 '시'는 '서사시'로 분류되긴 하지만, 사실 시라고 보긴 힘들다.

기묘한 작품인만큼 그 분류조차 난해한데, 굳이 따지자면, 모든 것의 집합에 가깝다. 이 책은 부분적으론 서사시이자 부분적으론 서정시이며 어떤 때는 담담한 보고서, 또 어떤 때는 병사들이 쓰는 구어와 사투리가 난무하는 소설이었다가 연극으로 변한다.

그런 형식상의 특이함 만큼 이 책이 다루는 것도 단순히 1차 대전의 솜에서의 한 전투에 참여한 영국인들에 관하여 다루지 않는다. 물론 어디까지나 주인공적 인물인 존 볼과 동료들이 그 주체이나 이들의 여정과 전투는 과거의 신화들와 설화들과 일치되기 사작한다. 거기엔 아서왕의 죽음이나 롤랑의 노래, 혹은 웨일즈의 영웅들의 설화나 헨리 5세 등 다양하다.

허나 이러한 '영웅적인 일화'들은 1차대전에서 재현되진 않는다. 재현되는 것은 살육과 일개 병사의 고통일 뿐이다. 이런 점에서 존스는 흔히 무언가를 낭만적으로 묘사하거나 영웅화시키는 실수를 범하지 않는다. (물론 그가 직접 그 현장에 있었음을 생각해보면 당연할지도 모른다)

어떤 면에서 이 책은 <황무지>를 연상케 한다. 작가 본인이 엘리엇에게 강한 영향을 받았음이 느껴진다. 심지어 주석을 다는 형식조차도. 엘리엇 본인이 극찬을 한 것엔 자신의 그림자 때문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존스는 단순히 엘리엇의 그림자에 머물진 않는다. <황무지>가 여러 생각들에 가깝다면, 존스는 이 모든 걸 하나의 이야기로 탈바꿈한다. 그 끝엔 '구원'이 있을지도 모른다. 구원이라기 보단 일종의 자기 위안에 가깝다. 적어도 신화를 끌어들이는 것은 꿈으로서 현실을 대체하려는 시도니까. 하지만 이 책이 다루는 전투조차 크게 보면 하나의 전투에 불과하므로 어쩔 수 없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여러모로 피곤한 작품이다. 어째서 이런 책이 한동안 잊혀졌는지를 생각하는 건 그리 어렵진 않다. 말 그대로 어렵고 기괴하니까. 그래도 관심이 있는 자라면 읽어보았을 때 그 노고에 대한 대가는 얻을 것이다.

괄호 안에 무엇이 있을지는 존스 본인조차 모른다. 그는 그저 <롤랑의 노래>의 한 구절을 인용할 뿐이다.

<무훈은 이를 말하고, 전장에 있던 자들 또한 그러하다...그리고 책을 쓴 자들도....이를 모르는 자는 어떠한 것도 이해하지 못했으리라.> 


* 책 자체는 구입한지 몇 년 되었는데 그 사이 군대도 있고, 여러 이유로 끝까지 읽지 못하였다. 책의 특성상 흐름이 끊기면 다시 처음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다행히 이번엔 끝까지 읽을 수 있었다. 

 


버지니아 울프 ,<막간> - 과거와 미래 사이에서 독서일기-소설




누가 버지니아 울프를 두려워하는가? 버지니아는 10점 만점의 12점인 진짜 울프!




희한하게도 버지니아 울프에 대한 감상을 하나도 쓰지 않았다는 걸 깨닫고, 이번에 <막간>을 다시 읽으면서 첫 발걸음을 옮겨보고자 한다.

울프를 좋아하는가, 싫어하는가를 묻는다면 아마도 좋아하는 쪽일 거다. 사실 좋아하지 않는 작가를 에세이집, 편지, 일기 모음집까지 굳이 모아서 소장하진 않을 테니까. 그래도 역시 애매하다.

사실 위의 문단은 장난이다. 점잖게 내빼는 척 한 거고 좋아한다.

이유야 많지만, 나 개인적으론 당연히 그녀가 좋은 모더니즘 작가라서 그렇다. 사실 그녀야말로 영국 모더니즘의 거의 유일한 선봉장이 아닌가? 전통과 역사를 자랑하는 영국 문학의 기이한 침체기는 아이러니하게도 모더니즘 시대이지 않을까?

이 시대를 대표하는 영문학 작가들은 많다. 하지만 순수한 영국인이 거기에 얼마나 있냐고 묻는다면 생각 외로 없다.

조이스? 아일랜드 술꾼이다. 버나드쇼나 예이츠, 베케트도 아일랜드 출신인 건 두말할 잔소리다.

T.S. 엘리엇? 영국인보다도 더한 영국 성공회 보수지만, 미국에서 이민 왔기에 순수한 잉글랜드와는 거리가 멀다.

에즈라 파운드는 당연히 미국 촌에서 온 이방인이었고, 캐서린 맨스필드조차 뉴질랜드 출신이며 그 밖의 많은 영국 밖의 영어를 쓰는 자들은 제외하자.

기껏해야 D.H. 로렌스나 E.M. 포스터, 버지니아 울프 정도만이 남는데, E.M. 포스터는 재미가 없으므로 제외하자. 결국 잉글랜드 모더니즘을 수호하는 작가는 로렌스와 울프, 두 사람 정도 밖에 없다.





허나 이런 식의 논리를 버지니아 본인은 매우 달가워하지 않을 거다. 그녀가 보기에 이러한 관점은 매우 위험하다. 특히 <막간>을 읽고 났다면, 이런 식의 국가관에 대한 비판을 생각할 수밖에 없다.

<막간 Between the Acts>는 버지니아 울프의 마지막 장편이자 ‘미완성’의 작품이다. 원고를 끝낸 직후 그녀가 비극적으로 목숨을 끊었기에 편집과 수정 문제가 우리에게 남아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런 건 연구자들의 문제고, 남아있는 텍스트들로 우리가 이 글을 즐기기엔 충분하다.

이야기 자체는 거의 없다. 이전의 울프의 많은 소설들처럼 하루 동안 벌어지는 ‘작은’ 일에 불과하다. 하지만 댈러웨이나 등대로 등에서 울프가 ‘개인’에 몰두했다면, 말년의 그녀는 집단에 관심을 가진다는 점이 핵심이다. 우리는 무엇을 해야하는가?

소설은 전쟁 직전의 영국 한 시골 마을에서 열리는 야외극을 다룬다. 그리고 그 야외극의 막간에 해당하는 마을에서의 가족의 삶을 다룬다.

야외극은 이 소설의 핵심이다. 사실 읽어보면 자연스럽게 알 수밖에 없다. 결국 모든 것이 이 야외극에서 나오고, 연결되며 지배하니까. 잉글랜드의 전반적인 역사를 개괄하는 이 야외극은 말 그대로 영국의 ‘찬란했던’ 과거다. 셰익스피어의 작품들의 패러디되고, ‘전원적’이다. 울프 본인의 시적인 문체가 이 소설 전반을 지배한다.

자연스레 소설 속 관객들, 혹은 막간을 지배하는 관객들은 이 야외극에서 ‘과거의 영광’을 기대하지만, 그 기대는 조금 엇나간다. 극이 막을 내리고, 남은 자들이 막간에서 읊조리는 걸 보고 있자면 우리는 자연스레 이러한 과거에 대한 그리움, 인위적으로 조장되는 집단 자체에 대해 거리를 둘 수밖에 없다. 가령 무적함대를 부수거나 인도를 착취하여 영광을 이룩한 것, 그런 과거가 현대에 되풀이되어야하는가?

시대상을 생각하면, 이러한 ‘과거에 대한 영광을 그리는 행위’에 대한 경계는 파시즘에 대한 경계를 생각하게 한다. 결국 이러한 행위가 언제 파시즘의 탈을 쓰고 우리에게 다가올지, 혹은 그 속내를 감추고 우리를 속이고 있는지, 그러한 불안이 소설 속 한 축을 담당한다.

그렇다면 현재의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며, 무엇을 할 수 있는가? ‘우리’는 무엇을 하는가?

여전히 개인들은 방황하고, 각자의 문제가 해결되지 않은 채 살아갈 수밖에 없다. 막간에서 답은 나오지 않는다.  당연할지도 모른다. 이 모든 건 고작해야 하루 동안 일어나는 일에 불과하다. 삶과 역사 속의 작은 하루.

그러나 이러한 모든 문제에 대한 답은 명확하지 않다. 어쩌면 극을 만들어가는 것은 관객의 참여이므로 관객은 극을 거부하거나 바꾸고자 노력할 수도 있을 거다. 어쩌면 그대로 짜인 각본과 극작가의 의도 아래 환호하고 울지도 모른다. 선택은 막간에서 일어난다. 어쩌면 이러한 인위적으로 조장되는 과거의 푸른 땅에 대한 그리움을 거부하고, 현재의 인간이 살아가는 이 시대와 장소가 답일지도 모른다. 

이런 점에서 울프의 후기 소설들은 하나 같이 난해하다. 한 개인으로 하여금 명확히 표현하기 어려운 인상들 속에서 우리는 찾아야한다. 그건 더 이상 댈러웨이와 같은 한 개인의 문제가 아니기에. 역사와 시간의 흐름이라는 파도 속에서 ‘우리’는 좋든, 싫든 같이 흘러갈 수밖에 없다.

그런 점에서 버지니아 울프를 두려워할 수밖에 없다.

  

여담이지만 <막간>이 원제의 번역인 것은 맞지만 조금 마음에 들지 않는다. 영제는 ‘Between the Acts’인데 ‘막간’이라고 하면 갑작스럽게 제목이 줄어든 느낌이다. 언어의 차이지만,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은 변하지 않는다. 아쉬운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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