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상: <죄와 벌>-도끼로 이마까기 독서일기-소설

제가 <죄와 벌>을 처음으로 접한 것은 능인판 만화 <죄와 벌>이었습니다. 아마 초딩 1학년이나 2학년 때였고, 학급문고에 이러한 능인판 만화가 아주 많았습니다. (사실 지금도 능인판에서 제일 간지났던 남캐는 폭풍의 언덕 히스클리프.) 만화 자체는 초딩에게는 굉장히 인상 깊었습니다. 그 당시만 하더라도 아직까지 ‘순수한’ 초딩으로서는 주인공이 ‘살인’을 저지른다는 것이 무척이나 충격적이었습니다. 그것도 도끼로 이마까-!


그 후에 아마 초딩 4학년이나 5학년 때쯤 어린이용 축약판을 다시 한 번 읽었던 것으로 기억납니다. 어느 쪽이든 어렸던 저에게 <죄와 벌>에서 제일 인상 깊었던 점은 주인공이 살인자라는 점이었지만, 라스콜리니코프 자체에게 그렇게 큰 매력을 느끼진 못 했습니다. 그는 결국 ‘돈’ 때문에 노파와 리자베따를 죽이고, 죄책감에 시달리다 소냐에게 구원받는 자에 불과했으니까요.



하지만 <죄와 벌> 완역을 읽고 난 후, 저는 참을 수 없는 분노를 느꼈습니다. 아니, 어떻게 이럴 수가 있는가? 이렇게까지 간지나는 남캐 라스콜리니코프를 그 따위로 거세시키다니-!! 어린이책이 라스콜리니코프를 죽였어-! 이 개쉐키들-!! 나, 나의 로쟈 짱은 그러지 않아-!!



<죄와 벌>은 단순히 ‘죄’와 ‘벌’을 다룬 책도 아니며, 어느 살인자의 죄책감을 다룬 책도 아닙니다. 이번 기회에 <죄와 벌>을 다시 읽으면서, 저는 <죄와 벌>이란 제목 자체가 이 책에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또한 이 책에서 ‘살인’은 그저 시작에 불과하며, 중요한 부분도 아닙니다.

과연 이 책에 ‘죄’와 ‘벌’이 존재할까요? 살인과 시베리아 유형이라는 형식적인 ‘죄’와 ‘벌’말고, 진정한 ‘죄와 벌’말입니다. 우리의 주인공 라스콜리니코프에게 살인과 시베리아 유형은 ‘죄와 벌’이 아닙니다. 말 그대로 아무것도 아닙니다. 라스콜리니코프의 관점에서는 ‘죄와 벌’이란 결코 존재할 수 없습니다. 그런 점에서 <죄와 벌>만큼 말도 안 되는 제목은 없습니다.


<죄와 벌>의 줄거리만 알고 있는 대다수와 달리 라스콜리니코프의 살인은 결국 형이상학적 살인입니다. 작중 그의 표현에 따르면 결국 자신이 ‘비범인’인지, 아니면 단순한 ‘이’에 불과한지를 시험하는 것에 불과하죠. 물론 이번 기회에 다시 한 번 읽으면서, 라스콜리니코프의 살인과 살인 후의 괴로움이 단순히 그의 ‘범인-비범인’ 사상보다 훨씬 복잡하고, 설명할 수 없는 무엇인가라고 느꼈습니다. 그렇다고 라스콜리니코프의 괴로움은 결코 죄책감 때문이 아닙니다. 그는 이 작품에서 결코 죄책감을 느끼지 않습니다. 심지어 자수하는 순간까지 말이죠. 그는 그저 자신의 이상과는 달리 나약한 삶에 절망했을 뿐입니다. 이런 점에서 저도 포함한 많은 사람들이 <에필로그>의 갑작스런 라스콜리니코프의 변화가 실패라고 생각합니다. 확실히 <에필로그>는 실수입니다. 보다 완전한 작품과 인물을 위해서 <죄와 벌>은 비극으로 끝났어야합니다.

이번에 다시 읽으면서, 라스콜리니코프의 진정한 비극은 ‘살인’이라는 시험 자체가 그의 의지와 달리, ‘우연’에 의하여 이루어졌다는 점에 있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그는 이성으로 계획을 세우지만, 결국 살인을 실행하기로 마음먹고, 노파의 살해 이후 도피하는 과정에서도 끊임없이 우연의 도움을 받습니다. 결코 비범인이 되지 못한 상태에서의 미숙한 살인은 후에 라스콜리니코프를 끊임없이 괴롭게 만듭니다. 그러나 저는 이러한 ‘살인’이란 과정 후 그가 겪는 모든 고통이 결국 자신의 추구했던 비범인으로서의 과정이란 생각까지 들더군요.


라스콜리니코프는 <죄와 벌>의 중심 인물입니다. 모든 인물들이 그를 중심으로 그물처럼 형성되어있습니다. 무엇보다 우리의 비범인 라스콜리니코프에게는 두 명의 정신적인 쌍둥이가 있습니다. 바로 루쥔과 스비드리가일로프죠. 라스콜리니코프의 사상, 비범인 사상은 결국 ‘비범인에게 모든 것은 허용된다.’입니다. 루쥔과 스비드리가일로프 두 사람은 이러한 라스콜리니코프의 또다른 확장판과 같은 캐릭터들이고요. 둘 모두 결국은 자기자신에게 모든 것은 허용된다,란 생각을 가지고 행동합니다. 스비드리가일로프는 욕망의 화신이며, 여러모로 주인공 로쟈와 비교되는 인물입니다. 둘 모두 누군가를 죽였으며, (자기자신에게) 모든 것은 허용된다, 란 사상을 가지고 있고, 한 여자에게 집착하죠. 스비드리가일로프는 자기와 정신적 쌍둥이인 라스콜리니코프의 말로를 예견하며, 라스콜리니코프는 스비드리가일로프의 자살을 생각하며, 자기 자신은 자살하지 못 했다는 것에 괴로워합니다. 루쥔의 경우도 결국은 ‘모든 것은 허용된다’란 생각을 가지고 행동하는 인물입니다. 개인적으로 그가 자신의 미래의 아내에게 행동하는 것을 보며 로쟈와 소냐의 관계가 연상됩니다. 물론 아직까지 순수하고 젊은 로쟈와 루쥔은 그 차이가 있지만, 로쟈 또한 미래의 루쥔처럼 될 가능성을 지닌 인물이죠.


개인적으로 소냐란 인물은 원래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마지막 에필로그의 충격 때문에 결국 라스콜리니코프를 망친 인물이란 생각을 가졌지만, 다시 읽으면서 저는 라스콜리니코프의 가장 정반대면서, 똑같은 인물이 바로 이 소냐란 것을 느꼈습니다. 둘 모두 일반적인 범인을 초월한 비범인입니다. 다만 서로 그 방식이 다를 뿐이죠.


로쟈는 확실히 매력적인 인물이지만, 그의 ‘비범인 사상’ 자체는 불완전하다고 느껴집니다. 무엇인가가 빠진 듯 해요. 더군다나 로쟈의 괴로움과 살인의 원인 자체가 완벽하게 이 사상 때문이라고 저는 장담 못 하겠습니다. 제대로 표현되지 않았지만, 좀 더 근원적인 무엇인가가 있는듯해요. 다만 <죄와 벌>은 5대 장편의 시작에 불과하며, 모든 것은 <까라마조프 가의 형제들>까지 쭉 이어진다는 것을 알고 있어서 다행입니다.


그와는 별개로 확실히 다시 읽으니 새로운 면을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예전에는 몰랐는데 스비드리가일로프란 인물 자체고 매력적이고, 라주미힌은 로쟈의 훝장을 빠는 게이고, 뽀르삐리도 굉장히 마음에 들고, 무엇보다 소냐의 매력을 다시 발견하게 되었네요. 개인적으로 이 소설에서 제일 감명 깊은 부분은 라스콜리니코프가 소냐에게 자신의 모든 것을 고백하는 부분이라고 생각합니다. 로쟈의 고백도 매력적이지만, 그런 그의 손을 잡아주는 소냐도 너무 예쁘네요, 헉헉-!! 아 진짜 도끼가 창조한 무수한 매력적인 캐릭터들은 언제나도 좋습니다. 아으 진짜 도끼 소설의 8할은 캐릭터들입니다 헉헉-!!!! 그리고 제가 도끼의 매력적인 남캐들을 발끝까지 핥기는 하지만 게이는 아닙니다. 그저 좋아한 캐릭터들이 남자였을 뿐이에요! 아, 그래도 좋아하는 도끼 여캐들도 있으니까.

다음에는 도스토예프스키의 삼각관계 순애소설 백치를 읽을 차례입니다. 아름답고 순수하고 건전한 순애 소설이죠.




이글루스 가든 - 천 권의 책읽기

덧글

  •  CR 2011/12/06 22:41 # 답글

    으흠. 확실히 도끼를 좋아하시긴 좋아하십니당. 애정이 묻어나는 포스팅이예요. 캐릭터성이 그렇게 죽인다니...ㅡㅡ 무척 손대보고 싶습니다.
  • JHALOFF 2011/12/07 16:31 #

    캐릭터들 매력이 아주 다분합니다.
  • 셸먼 2011/12/06 22:56 # 답글

    아아, 능인판 만화! 저 추억의 물건이라니!
    저 시절에 저걸로 한국고전/세계명작 엄청나게 읽었지요. 그런데 정작 커서 정역본을 읽으려니 "이미 스토리를 알고 있다"는 것 때문에 손해 보는 느낌(...)
  • JHALOFF 2011/12/07 16:31 #

    스토리 알아도 재밌는 것들도 많으니까 그렇게 손해는 아니죠.
  • LightBringer 2011/12/07 00:33 # 답글

    능인판 만화 참 재밌었는데, 이제와선 구할수도 없고...
  • JHALOFF 2011/12/07 16:32 #

    재밌었죠.
  • 시무언 2011/12/07 09:12 # 삭제 답글

    능인판 만화가 여러모로 재밌었죠. 축약하고 수정된 부분이 많긴 하지만 그래도 원작의 큰 줄기는 따라간다는 점에서 괜찮았던거 같습니다. 삼총사 같은 경우는 능인판으로 알고보니 추기경이 대인배였구나-하는걸 안 예죠
  • JHALOFF 2011/12/07 16:31 #

    ㅋㅋㅋ 추기경은 진짜 ㅋㅋㅋ
  • 무중력고기 2011/12/17 13:52 # 삭제 답글

    쓰신 글 재밌게 읽었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같은 책을 읽고 어떻게 느꼈는지 궁금해서 검색해 들어와 봤어요 ㅎㅎ
    동감 가는 부분이 많네요.
  • JHALOFF 2011/12/17 17:51 #

    감사합니다.
  • 재윤 2012/01/23 15:53 # 답글

    인생에 제대로 타당히 이뤄지는 요소가 눈꼽만치 있는 반면

    불합리 부조리는 널렸다는 진실을


    제가 이 죄와벌을 세로읽기 책으로 읽던 시점에만 해도 머리로만 알았죠.

    2009'엔 온몸의 세포로 두들갸맞았답니다.
  • JHALOFF 2012/01/24 01:05 #

    세로읽기 책이면 꽤 옛날 책이었겠네요.
  • 도끼 2013/02/16 16:39 # 삭제 답글

    죄와벌에서 초인사상(비범인)이 드러나는 건 신의 존재와 결부되는 문제입니다. 좀 더 확장해서 생각하시면 많은 도움이 되실 겁니다.
  • JHALOFF 2013/02/16 17:55 #

    아 네 조언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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