헌책 찬가 일상

헌책 찬가

 

           매일 아침 템스 강을 바라보며 워털루 다리를 건너는 일상도 어느덧 익숙해졌다이곳 런던에 살기 시작한 지 한 달이 조금 넘었음에도 나는 이 이국의 대도시가 무척이나 마음에 든다물론 앞으로 몇 년은 살 곳이라 긍정적인 부분만 찾으려고 애쓴 결과일 수도 있다그래도 내가 이 런던에서 가장 즐거움을 느끼는 것은 도처에 가득한 헌책방들이다어느새 버릇처럼 헌책방들을 둘러보는 것이 하루의 일과가 되어버렸다조금 귀찮을 때 기숙사로 돌아가면서워털루 다리 아래 매일 열리는 중고 책 장터를 둘러보거나조금 걸을 여력이 있으면 레스터 스퀘어 쪽 헌책방들을 둘러보는 것이 일상의 부분이 되어버렸다또한토요일에 가끔 포토벨로 시장에 들르기도 한다물론 헌책방을 매일 간다고 해서매일같이 헌책을 사는 것은 아니다왜 이렇게 자주 헌책방을 들락날락 거리냐란 질문에 나는 언제나 가도 같은 자리에서 먼지가 쌓이며 나를 맞이하는 희귀하며 값비싼 책들과 운이 좋아 누군가의 손에 들어가기 전에 먼저 살 수 있는 책들이 있기 때문이다,란 옹졸한 변명을 할 수밖에 없다자주 헌책방을 가는 것은 이렇게 두 가지 이유에 있다.


           내가 가는 헌책방의 광경은 언제나 비슷하다수많은 책이 책장과 바닥을 장식하고대개 안경 낀 영국 노인이 카운터를 지키며 상당히 많은 사람이 이런저런 책들을 보고 있다더러 주인에게 이런저런 질문을 하거나 서로 책에 관해 얘기하는 광경도 보인다물론 노부부가 같이 헌책방을 운영하거나여러 젊은 직원들이 일을 돕는 때도 있다런던의 헌책방들은 그 종류 또한 다양하다음악이나 동화와 같이 어떤 한 분야만 전문적으로 다루는 곳도 있으며 우리가 흔히 아는 헌책방도 있고초판이나 고서들만을 다루는 고서점도 있고헌책방과 고서점 두 역할을 모두 하는 곳도 존재한다.


           이렇게 상당히 자주 들락날락 거리고특히 몇 번 책을 구입했던 곳에서는 어느 정도 나를 알아보기도 한다내가 동양인이고 언제나 빵모자를 쓴 채 염소수염을 길러서 더 잘 기억하는 것일 수도 있다물론 그냥 인사나 하는 정도고 가끔 책에 대해 문의만 할 뿐한 달이라는 짧은 시간 동안 그렇게 큰 교류는 없었다하지만 이렇게 들락날락 거리며 어느새 상당히 많은 양의 책들이 내 방을 채우기 시작하였다.


           누군가가 나에게 이렇게 물었다헌책방을 가는 이유가 뭔가요헌책방에 가서 무엇을 하죠이에 나는 그저 웃으며 이렇게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가서 책 보는 거죠물론 구입을 아예 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특히 런던의 몇몇 고서점의 경우그저 책을 구경하기 위해 가는 것은 사실이다유명 작품들의 초판들이나 희귀본을 살 돈은 유학생에게 없으며 평범한 사람도 취미 생활이라고 하기에는 버거울 것이다그렇지만 버지니아 울프나 헤밍웨이헉슬리엘리엇루이스 캐롤 등 유명한 작가들의 고전들의 초판을 직접 두 눈으로 보고두 손으로 직접 만지고책장을 넘기고구경하는 것 자체만으로 이런 헌책방을 방문하는데 충분한 이유가 되지 않을까자신이 좋아하는 작가나 좋아하는 책의 초판을 직접 볼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독서 인으로서는 충분한 기쁨이라고 생각한다.


           또 누군가는 이렇게 물었다헌책방에 가면 어떤 책들을 사나사실 헌책방을 방문할 때 개인적으로 어떤 을 사겠다고 방문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그저 가끔 원하는 책이 있는지 주인에게 묻는 정도 없는 경우가 더 많다이러한 헌책방의 진정한 진가는 도박과 비슷하다고 생각한다자신이 갖고 싶거나직접 두 눈으로 본다면 반드시 살 책이 올 수도 있고안 올 수도 있다또한어떤 상태로 올지도 모른다온다고 하여도그 책을 반드시 발견하거나 구입할 수 있는 기회가 온다는 법도 없다도박이라는 표현은 너무 과한 것 같다보물찾기가 좀 더 알맞은 표현이겠지헌책방을 간다는 것은 책의 보물찾기와 같은 것이다이런저런 헌책방을 다닐수록 더욱 그러하다내가 전부터 사고 싶으나 절판된 책이 어떤 헌책방에서는 그럭저럭 상태지만다른 헌책방에서는 훨씬 좋은 상태에 훨씬 싼 가격에 판매할 수도 있다이러한 보물을 찾을 때마다 얼마나 기분이 좋은지는 직접 경험해봐야 알 수 있을 것이다.


           또 누군가는 이렇게 묻는다도대체 헌책이나 초판에 집착하는 이유가 뭐냐결국책은 다 같은 책들이 아닌가거기에 특별한 이유가 있느냐물론 맞는 말이다책은 결국 전부 같은 책이다헌책이나 초판이 실질적으로 이라는 도구적 측면에서 더 큰 가치를 지니진 않는다또한오히려 더러 비싼 값을 주고 초판이나 헌책을 구입하는 것은 비경제적인 것 또한 사실이다이러한 헌책이나 초판은 대개 펼칠 염두도 내지 못하고 조심스레 보관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이런 행태를 단순히 책 자체에 집착하는 행위라고 비난할 수도 있다이에 나는 변명할 마음은 없다나 또한 머릿속으로나의 이성으로 이렇게 헌책과 초판을 구경하거나 사는 것 자체가 지극히 비이성적이고 쓸데없는 짓이란 것을 잘 알고 있다그러나 이것은 이미 이성의 영역을 벗어난 것이라 나는 생각한다나는 책을 사고 싶은 이유가 있어서 지르는 것이 아니다책이 있기 때문에 좋아하고책이 있기 때문에 우선 내 소유로 만들고그 다음에 이유를 붙여서 내 마음속에서 정당화하는 것이다언제나 책을 구입할 때마다 두 가지 감정이 동시에 마음속에 교차한다과연 이만한 돈을 주고 살 가치가 있는 짓일까솔직히 그렇게 필요하지도 않는데 낭비가 아닌가란 불안과 마침내 이 책을 내가 소유하게 되었다내가 이 책의 주인이 되었다는 기쁨이 두 가지 감정이 교차하면서 주인에게 책을 받을 때는 두 손이 나도 모르게 떨리기 마련이다그러나 이러한 모든 감정은 책을 가슴에 꼭 안고 가게 밖을 나갈 때 모두 사라지고 오직 단 한 감정이로 말할 수 없는 쾌감만이 나에게 남아있다누군가 나에게 왜 헌책이나 초판을 사냐는 질문에 그나마 가장 이성적인 대답을 하자면이런 쾌감을 계속 느끼고 싶어서라고 밖에 할 말이 없을 것이다그러나 이것도 전부는 아니다이것은 지극히 비이성적인 행위이며 여기에는 어떠한 정당한 이유도 없다단순한 정언명령과 같은 것이다.


           또 누군가는 나에게 이렇게 묻는다네가 책을 좋아하는 것은 알겠지만꼭 그렇게 책을 살 필요가 있는가책의 존재 가치는 책의 내용에 있는 것이 아니냐이렇게 살 필요 없이 도서관에서 빌려도 되지 않는가맞는 말이다나는 우선 독서가다독서가에게 중요한 것은 텍스트지책이 아니다책은 단순한 외양에 불과하다이렇게 끝없이 책을 사려는 나의 행동을 보고책을 단순히 장식품으로서 수집하려는 수집가라고 비난할 수도 있다그러나 위에도 말했듯이 이렇게 책을 사려는 것에 이성적인 이유는 존재할 수 없다굳이 표현하자면그 작가의그 텍스트의 모든 것을 내가 소유하고 있다는 감정을 그 책을 소장하고 있는 것으로 대체하고 싶기 때문이 아닐까물론 내가 모든 책을 사는 것은 아니다빌려 읽기도 하고다시 되팔기도 한다내가 소장하는 책들은 전부 내가 소장할만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는 책들이기 때문이다이는 다른 독서가들도 마찬가지겠지물론 책의 진정한 진가는 책 자체가 아니라책의 내용에 있는 것은 옳다그러나 이는 골동품 수집이나 다른 취미예를 들어 우표를 모으거나음반을 모으는 것과 같은 이치가 아닐까정말 중요한 것은 그 내용이지만그 내용을 둘러싼 형태를 소유하고 싶어하는 것은 독서가로서의 애정이 아닐까 싶다.


           사실 구질구질한 변명은 필요 없을 것이다누군가가 나를 어떠한 형태로 비난하고나 자신이 스스로 이러한 무분별한 짓을 후회하여도어느새 나는 무의식적으로 헌책방으로 향할 가능성이 높을 것이다책을 구경하고사는 것에 거창한 이유나 논리적인 변명은 필요 없다그저 책이 있기에보고사는 것이다단지 그뿐이다


덧글

  • 문우 2012/09/03 23:56 # 삭제 답글

    헌책방에서 보석같은 책을 만나 비교적 싼 값에 장만했을 때의 기쁨이란... 정말 그에 관심 없는 사람들은 모를거예요. 이해를 못하는 사람들도 종종 있겠구요.
    이 글을 읽으니 저도 영국으로 유학 가고 싶어지네요. 빵모자에 염소수염이라, 왠지 조이스가 생각나는걸요! 저는 펀딩 등 주로 학비 문제 때문에 미국으로 가려고 하고 있긴 합니다만 그것도 몇년 뒤가 될테니 어떻게 될지는 알 수 없죠... 유학생활 건승하시길 빌겠습니다 :-)
  • JHALOFF 2012/09/07 21:43 #

    ㅎㅎㅎ 감사합니다.
  • CATHA 2012/09/04 01:02 # 삭제 답글

    고서적 페티쉬 헣헣헉 멋지세요! 항상 잘롭님 포스팅보면서 배우는게 많습니다. 책을 진짜 좋아하시는게 느껴져요ㅜ 전 내년쯤에 이냥저냥 더럼으로 갈것같네요 윗분말씀처럼 유학생활 건투를 빕니다!
  • JHALOFF 2012/09/07 21:43 #

    오 더럼 좋죠. 감사합니다.
  • 2012/09/04 03:29 # 답글 비공개

    비공개 덧글입니다.
  • 2012/09/07 21:44 # 비공개

    비공개 답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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