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센(3) 헤다 가블러- 모든 것을 불태워라 프로젝트- 헨릭 입센

 


나는 한 가지 사실을 고백할 수밖에 없다. 내 오래된 '잘못된' 믿음 중 하나는 '매력적인' 여성 악역은 존재할 수 없다, 였다. 이 믿음으로 나를 성차별주의자로 오해하진 말기를 바란다. 나는 적어도 남성과 여성의 동등한 '사회적' 평등을 믿고, 마땅히 그렇게 되야한다고 믿는다. (생물학적 평등은 불가능하다. 애당초 서로 신체구조 다른데, 어떻게 평등하게 만드는가? 남자를 모두 거세하거나, 여자를 모두 남자로 바꾸지 않는 이상!)

물론 나의 이러한 믿음에는 어느 정도 나만의 근거는 있었다. 우선 내가 말하는 '매력적인' 악역은 이아고나 리처드 3세, 실낙원의 사탄과 같은 한없이 숭고하면서도 한없이 매력적인 악들을 말한다.

내 믿음은 간단하다. 우선 '여성'을 이러한 악으로 표현하기에는 기존의 (성차별적인) 믿음에 부합하지 않는다. 문학에서 대개 여성은 한없이 선하며 순수한 존재이거나, 설령 악역이라도 위의 예시와는 달리, 좀 더 소박한 악인 경우가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또한 설령 뛰어난 '남성' 작가가 매력적인 여성 악역을 쓰려고 노력해도, 그는 본질적으로 여성이 아니기에, 쓸 수 없을 것이다.

아 물론 이러한 내 믿음이 어느 정도 틀렸다는 것을 인정할 때가 되었다.

우리의 헤다 가블러는 위의 예시와 대등한 위치에 서있는 여성 악이다.

헤다를 굳이 다른 인물들과 비교하자면, 햄릿이나 이아고가 적합할 것이다. 그녀는 팜므 파탈과 같은 악이 절대 아니다. 물론 그녀가 모두를, 심지어 자기 자신과 자신의 뱃속에 살아숨쉬는 생명까지 파멸로 몰아넣는 것은 사실이지만, 이러한 그녀는 팜므 파탈과 같은 '저급한' 악으로 분류할 수는 결코 없으며,
오히려 숭고하면서도 장엄한 악으로 분류하는 것이 헤다에게도, 입센에게도 올바른 평가일 것이다. (애당초 팜므 파탈이란 존재 자체가 결국 남자가 만든 환상에 불과하지 않은가.)

이 희곡은 본질적으로 헤다 '가블러'와 한때 그녀를 사랑했었던 뢰보르그의 투쟁이다.

분명 헤다가 뢰보르그의 원고에게 어떠한 조치를 가하는 것은 그녀의 남편 테스만의 앞날을 위해서인 것처럼 보이며, 뢰보르그의 투쟁은 한때 사랑했었고, 지금도 사랑하는 여인을 향한 갈등처럼 보이지만, 이것들은 모두 장식에 불과하다.

오히려 설명할 수 없는, 그래, 말 그대로 헤다의 욕망 그 자체로 인한 거대한 두 힘의 투쟁이라는 것이 더 올바른 표현이다. 

사실 헤다는 뢰보르그에게 어떠한 직접적인 조치를 취하지 않는다. 그녀는 뢰보르그를 유혹하지도 않으며, 그를 살해하거나, 직접 살해를 교사하지도 않고, 그를 짇밟지도 않는다. 심지어 그에게 직접 도구를 주지도 않는다. 오히려 그녀는 스스로 움직이지 않는 거대한 힘이다. 그리고 뢰보르그는 이러한 거대한 힘에 대항하고, 파멸한다.

하지만 이러한 뢰보르그의 파멸은 헤다에게 어떠한 영향을 끼치지 않는 것은 절대 아니다. 그녀는 뢰보르그가 외쳤던 것처럼 그 어느 누구보다도 자신의 스캔들을 두려워하는 인간적이면서도 대범하지 못한, 어쩌면 평범한 한 여자에 불과하기도 하다.

그리고 이러한 그녀의 믿음과 달리 모든 것이 틀어지자, 그녀 스스로 파멸하고 주위의 모든 것들조차 같이 파괴한다. 

헤다 가블러는 비록 아름다운 여성이지만, 이 희곡에서 나는 헤다 테스만이라는 여성이 아닌, 그저 헤다 가블러라는 한 인간만을 느낄 뿐이다.

그녀는 여자 햄릿이다. 햄릿과 아버지의 유령처럼, 헤다에게도 언제나 가블러 장군의 유령이 겉을 맴돌고 있다.

희곡이 제목이 '헤다 테스만'이 아닌 '헤다 가블러'인 이유조차 생각해보면 간단하다. 이 희곡은 단순히 테스만 부인이 아닌, 가블러의 유령에 사로잡힌 헤다라는 한 인간에 관한 희곡이기 때문이다.

마치 햄릿처럼 헤다 또한 오히려 부조리한 인물이다. 사느냐, 죽느냐의 문제를 고민하는 햄릿처럼, 그녀 또한 불태울 것인가, 말 것인가를 고민하며 갈팡지팡하며 관객에게 오히려 혼란을 준다.

하지만 이런 모든 사소한 고민거리 따위는 치워버리자.

그저 헤다라는 이 매력적인 악이 어떻게 모든 것을 파괴하고 스스로를 불태우는지, 그것 자체를 객석에서 구경하는 것만으로도 이 얼마나 큰 재미가 아니겠는가?

나에게 어떠한 해도 끼치지 않는 매력적인 악을 구경하는 것은 언제나 큰 즐거움이다.



덧글

  • 이준영 2012/11/28 10:26 # 답글

    으아아 이것도 너무 쫄깃하게 리뷰해 주셨군요. 꼭 체크해보겠습니다ㅠㅠ
  • JHALOFF 2012/11/29 08:39 #

    오 즐겁게 읽어주셨다니 감사합니다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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