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G. 발라드 <크리스털 세계>- 종말의 아름다움 독서일기-소설



나는 산 것도, 죽은 것도 아니었다 
- T.S. 엘리엇, 황무지

이렇게 세상이 끝나는구나
이렇게 세상이 끝나는구나
이렇게 세상이 끝나는구나
쾅 소리 하나 없이, 흐느낌으로 
- T.S. 엘리엇, 텅 빈 사람들

아직 이 말을 주머니쥐*에게 하지 마라, 쾅 소리 하나, 흐느낌 하나 없이,
쾅 소리 하나와 함께, 흐느낌 하나 없이,
별들의 색을 간직한 테라스가 있는  데이오세스의 도시를 건설하기 위하여.
- E.P., 피산 캔토스

*T.S. 엘리엇의 별명.

J.G. 발라드의 크리스털 세계에서 과학적인 설명은 별로 중요하지 않다. 모든 것이 빛나는 보석처럼 변해간다. 그리고 인간은 막을 수 없고, 파멸만이 기다리고 있을 뿐이다. 그것이 전부다. 굳이 구질구질하게 과학적인 설명을 하지 않아도, 크리스털 세계는 그대로 존재할 것이다. 절대적인 외계인의 광선이든, 어떤 갑톡튀한 마왕의 저주든, 메이드인헤븐의 시간 가속이든, 허블 효과 등의 과학적인 설명이든, 어쨌든 모든 것이 아름답게 변하고 종말을 향해간다는 것은 변함없지 않은가? 그저 인간은 거대한 우주 앞에서 경이로움을 느끼면 될 뿐이다.

마치 나병 환자의 그것처럼, 수정으로 변하는 모든 것들은 말 그대로 산 것도, 죽은 것도 아니게 된다. 말 그대로 삶과 죽음의 이분법이 무너지고, 모두들 편안한 안식을 맞이하게 된다. 그런 점에서 이 소설은 역설적으로 아름다운 종말을 향해가는 하나의 찬가다. 거기엔 어떤 두려움도 존재하지 않는다. 소설 속 비유되는 워즈워스의 송가처럼 그저 젊음을 향한 낭만적인 송가일 뿐이다.

나병 환자 무리가 자진해서 크리스털 숲으로 파멸을 맞이하러 가는 모습은 마치 광적인 사이비 종교집단의 집단 자살처럼 보이면서도 모두가 즐거운 축제처럼 보인다. 둘 다가 맞을 것이다. 삶도, 죽음도 사라지는 것처럼, 경계는 크리스털 세계 안에서 무너진다.

종말은 결코 피할 수 없지만, 그것은 너무나도 아름답다. 모든 것이 아름다운 무지개 빛 찬란한 보석으로 변한다. 발라드는 그런 광경을, 아름다우면서도 추악한 그 광경을 매혹적이게 묘사한다. 애당초 종말을 피할 수 없다면, 적어도 아름답게 즐기지 못할 이유가 있을까?

어느 정도 종말의 공포를 얼핏 보여주면서 시작한 소설도 결국은 너무나도 편안한 안식으로 끝난다. 

마지막 장을 넘기며 무엇을 해야할까? 별 것 있으랴, 그저 편안히 눈을 감고 잠시동안 내용을 음미하고, 다른 책을 찾을 뿐이지. 

아름다운 것에는 이유는 없다. 종말이든, 시작이든, 그저 아름답다면 별 다른 이유가 필요할까?


덧글

  • CATHA 2013/01/19 01:13 # 삭제 답글

    어휴 사는게 싫어도 그래도 지구종말안되서 다행이네요..그래도 저기 있는 세작품 다 문학적으로는 굉장히 아름답게 느껴집니다. 실제로 일어나는건 싫지만요...
  • JHALOFF 2013/01/19 11:42 #

    ㅎㅎㅎ 원래 불구경이 제일 재밌는 법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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