벨르이, <페테르부르크> - 청동기마상의 망령이 러시아를 덮치다 독서일기-소설


네바 강의 안개처럼 페테르부르크는 허상의 도시다. 이곳의 가면을 쓰고 돌아다니는 인간들은 그저 인간의 형상을 한 광대들일 뿐이다. 안드레이 벨르이의 소설 <페테르부르크>는 이런 페테르부르크를 주인공으로 한 거대하며 멋진 소설이다.

페테르부르크는 청동 기마상이 배회하며 로쟈의 노란 방이 있고, 고골의 코와 외투가 돌아다니는 도시다. <페테르부르크>의 거대한 한 축은 이런 러시아 페테르부르크 문학의 계승이다. 러시아 문학을 좋아하는 독자라면 누구나 이 <페테르부르크>에서 패러디되고 재창조되는 수많은 것들을 찾을 수 있다. <페테르부르크>는 도스토예프스키, 톨스토이, 체호프 이후, 그리고 파스테르나크와 불가코프의 등장 이전까지의 단절된 러시아 소설에서 우리가 찾을만한 보석과 같은 소설이다. 물론 혁명 당대의 소설가들도 있지만, 적어도 벨르이와 <페테르부르크>는 앞서 언급했던 작가들과 버금갈만한 소설이다.

소설은 러일 전쟁 직후의 러시아, 혁명으로 혼란에 빠진 1905년의 페테르부르크를 중심으로 일어난다. 러시아는 동과 서가 만나는 곳이며 페테르부르크는 이러한 동으로부터 서쪽을 향한 창문이자 표트르 대제가 이룩한 거대한 망령이다. 혼란스런 정국답게, 페테르부르크는 혼란스럽다. 동과 서는 제대로 공존하지 못한채 기괴한 축으로 융합되며, 이러한 동에 대한 공포는 과거 몽골의 침략과 러일 전쟁의 패배로 나타난다. 이러한 혼돈을 더욱 거세게 만드는 것은 구세대와 신세대의 갈등, 혹은 제국 러시아와 혁명 러시아의 갈등이다. 이러한 구 제국과 혁명가의 갈등은 아버지 아폴론과 아들 니콜라이의 갈등으로 나타난다. 혁명가 니콜라이는 아버지로부터 몽골의 환영을 본다. 이러한 아버지와 아들의 대립은 투르게네프의 <아버지와 아들>이나 도스토예프스키의 <악령>이 연상된다.
그러나 니콜라이는 혁명에 가담한 유령에 불과하다. 그는 도미노(광대) 복장을 하고 수많은 가면을 쓴채 페테르부르크의 밤거리를 돌아다니는 악령에 불과하다. 가면 아래에는 아무 것도 없다. 이는 제국의 관리 아폴론조차 마찬가지다. 그는 도망간 아내와 아들, 그리고 제국을 형성하는 모든 것에 얽매인 유령이다. 사실 이 소설에서 제대로 살아있는 인물은 없다. 모두 페테르부르크의 일부분에 불과하며, 페테르부르크가 있을 때에만 그들도 있을 수 있다.

페테르부르크의 가면들은 모두 수많은 환영을 본다. 페테르부르크는 네바 강의 안개와 무한히 뻗는 무한성과 같은 거리들, 그리고 방황하는 네덜란드인이자 적그리스도 표트르 대제의 청동 기마상이 지배하는 곳이다. 소설은 기본적으로 여러 가지 상징들을 던져놓으며 하나의 거대한 플롯, 즉 폭탄으로 아버지를 암살해야하는 니콜라이의 분열에 대해 진행된다. 폭탄은 니콜라이의 정신의 분열시키는 한 요소이며 이 폭탄을 둘러싸고, 여러 정신적인 분열 및 다툼이 일어나고, 점차 현실과 환영의 경계는 무너진다. 모두들 페테르부르크를 지배하는 청동 기마상의 환영에 쫓기며 도미노에게 쫓긴다. 도망갔던 어머니가 돌아오고, 사랑했던 여인으로부터 자신의 기행을 무도회장에서 폭로된 니콜라이는 친부살해자가 될 수 있을 것인가?

 이 소설이 말 그대로 모든 러시아를 담았다는 책 뒤에 써져있는 버제스의 평가는 옳다. <페테르부르크>는 동과 서의 대립을 중심으로 제국과 혁명의 갈등, 세대의 갈등, 인간 정신의 분열, 그리고 페테르부르크 자체를 다루는 당대 러시아에 대한 고찰이다.

물론 소설은 단순히 역사적인 소설은 아니다. 폭탄을 둘러싼 하나의 거대한 서스펜스이며 상징과 정신의 분열을 다루는 심리 소설이고, 환영과 현실을 무너뜨리는 환상 소설이자 거대한 도시를 담는 멋진 모더니즘 소설이다. 또한 시종일관 유쾌한 소설이다. 벨르이는 어둡지만 재치있게 이야기를 진행해나간다.

일대의 결말이 끝난 후 에필로그는 평화로운듯 묘사되지만, 그 이면엔 알 수 없는 불안만이 잠들어있다. 벨르이 본인 또한 이후 러시아의 몰락과 서구 세계의 거대한 몰락을 알고 있었기에 당연히 느껴지는 불안함일 것이다. 러시아의 몰락은 단순히 동과 서의 실패한 융합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서구를 향한 창 페테르부르크를 통하여 서구를 향한 거대한 파도가 되어 덮칠 것이다.

<그러나 나는 흔들리는 요람으로
돌처럼 잠든 20세기가 악몽에 괴로워했음을 깨닫는다.
그런데 마침내 때를 맞이하여 태어나고자 베들레헴으로
뚜벅뚜벅 걷고 있는 저 거친 짐승은 누구인가?>
-예이츠, 재림 中

다른 모더니스트들과 마찬가지로, 벨르이는 혼돈을 보았고, 몰락을 예언하였으며 그 불안과 고독을 이 한 편의 거대한 블랙코미디에 담았다.

<페테르부르크>는 벨르이의 동과 서 3부작 중 두번째에 해당하는 작품이라는데, 첫번째에 해당하는 <은빛 비둘기>도 꼭 읽어야겠다. (소설 속에 언급이 된다.) 다만 아쉽게도 마지막 3번째 작품은 결코 쓰여지지 않았다고 한다.

나보코프는 <페테르부르크>를 <율리시스>, <변신>,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와 더불어 20세기 4대 소설로 분류했다. 적어도 20세기 최고의 러시아 소설 중 하나란 것은 의심치 않을 수 없다. (<페테르부르크> 자체는 서방에 비교적 늦게 소개되었다.)

근래 들어 가장 멋진 독서 중 하나였다. 대산에서도 소개되었으며 다른 번역본들도 추가로 읽어봐야겠다.

멋진 책이 있는데 그것을 놓치는 것은 독서가로서의 즐거움 하나를 잃는 것이다. 그것도 아주 크나큰 즐거움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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