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케의 비가(3) 두이노의 비가, 존재에 대한 찬가 프로젝트- 라이너 마리아 릴케

<두이노의 비가>는 릴케가 고뇌했던 '천사'와 같은 시일 것이다. 아름답지만 무섭다. 분명 아름다운 시들이지만, 왜 아름다운지 알 수가 없기에 무섭다.

<두이노의 비가>를 읽어보는 것은 이번이 세 번째지만, 언제나 이 시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는 것 같다. 어쩌면 결코 나는 이 시에 닿을 수 없을지도 모른다, 마치 신에게 끝없이 기도하지만, 결코 닿지 못하듯이. 다만 이 비가가 실은 찬가, 그것도 우리의 존재의 불완전함에 대한 찬가란 것은 확실한 것 같다.

<내가 설령 울부짖는다 해도 여러 서열의 천사들 중 누가 이 소리를 들어줄 것인가? 만일 천사가 하나 갑자기 나를 가슴에 끌어안는다면 그 강한 존재에 눌려 나는 사라지리라. 왜냐하면 아름다움이란 우리가 겨우 견딜 수 있는 무서운 일의 시초에 불과하기에. 우리가 그것을 그토록 찬탄하는 것은 우리를 멸망시킴을 잠잠히 거부하기 때문이다. 천사는 모두 무서운 존재.> - 제 1 비가 


비가의 유명한 시작 부분은 천사들을 향한 울부짖음으로 시작된다. 천사란 무엇인가? 우리는 결코 확답을 하지 못한다. 그저 아름답기에 무서운 존재, 너무나도 완벽한 존재, 너무나도 완벽하기에 불완전한 우리가 수용할 수 없는 그런 무서운 존재들이다. 어떤 면에선 마치 신과 같이 우리가 결코 도달하지 못할 완전함일 수도 있다.


<과거 속에서 파도 하나 일어나고, 또는 열려진 창문 옆을 지나갈 때 너는 바이올린 소리를 들었겠지. 그 모든 건 사명이었다. 그러나 너는 그것을 완수했는가?> - 제 1 비가

그러나 시인에게는 사명이 있다. 이 사명은 분명하다. 시인의 존재를 노래하는 것이 곧 두이노의 비가의 목적이자 시인에게 주어진 사명이다. 그러나 시인은 천사와 달리, 불완전하다.

<목소리, 목소리들, 들어라, 내 가슴아, 지난날 성자들만이 들었던 소리를, 엄청난 외침이 그들을 땅에서 들어올렸지만, 그들, 불가사의한 자들은 무릎 끓은 자세 흐트리지 않고, 그에 아랑곳하지 않았으니, 바로 그렇게 그들은 귀기울이고 있었다. 신의 목소리야 더 견디기 어려우리. 그러나 바람곁에 스치는 소리를 들어라.> - 제 1 비가

과거 초인적으로 보이는 성자들, 혹은 완전함에 거의 다다른 것처럼 보이는 자들과 달리, 이제 시인은 불완전한 존재로서 비가를 불러야한다. 불완전하기에, 과거의 완전한 자들과는 다른 방향으로 접근해야하는 것이 시인의 의지이자 유일한 방도다. 앞서 말했듯, 불완전한 존재는 완전한 것을 견딜 수 없다.

<이 세상에 더 이상 살지 못함은 참으로 이상하다, 겨우 익힌 관습을 버려야 함과, 장미와 그 밖의 무언가 하나씩 약속하는 사물들에게 인간의 미래의 의미를 선사할 수 없음과, 한없이 걱정스런 두 손 안에 들어 있는 존재가 더 이상 아닌 것, 그리고 자기 이름까지도 마치 망가진 장난감처럼 버리는 것은 참으로 이상하다.> - 제 1 비가

어쩌면 삶의 불완전함은 죽음과 관련이 있는지도 모른다. 릴케가 비가에서 외치듯, 존재는 언제나 '단 한 번' 뿐이다. 존재했다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전에도 릴케가 주장하듯 죽음의 존재의 부분이자 완성이다. 다만 인간이 천사와 달리 불완전한 이유는 존재에 불안을 느끼기 때문이다. 죽음을 받아들이지 못한다.

<무섭지 않은 천사는 없다. 하지만, 슬프게도, 너희들, 영혼의 거의 치명적인 새들을, 알면서도, 나 노래로 찬양했다.> - 제 2 비가

<우리가 느낄 때마다 우리는 증발하는 까닭이다. 아, 우리는 숨을 내쉬면서 사라진다. 하나씩 타들어가며 우리는 갈수록 약한 냄새를 낼 뿐.> - 제 2 비가

인간과 달리 천사는 완벽하기에 아름다우며, 그렇기에 무섭지만 시인은 천사를 향한 찬양을 멈출 수 없다. 다만 천사라는 모티프 자체는 전체 비가에 걸쳐 조금씩 그 양상을 달리하는듯 보인다. 

<우리 자신의 마음은 신들을 넘어섰듯 우리까지도 넘어서기에, 그리하여 우리는 우리의 마음을 부드럽게 해주는 그림들에서나, 아니면 더욱 위대하게 우리 마음이 억제된 신의 몸에서도 우리를 볼 수 없다.> - 제 2 비가

<사랑하는 여인을 노래하는 것과, 슬프다, 저 숨겨진 죄 많은 피의 하신을 노래하는 것은 완전히 다른 일> - 제 3 비가

존재를 노래하는 일은 사랑을 노래거나 다른 일과는 다르다.


<그는 얼마나 몰두했던가-. 그는 사랑했다. 그는 자신의 내면의 것을 사랑했다, 내면의 황야를, 그의 내면에 있는 원시림을 사랑했다, 그곳에 그의 마음은 말없이 쓰러진 거대한 나무들 틈에 푸른 싹처럼 서 있었다. 사랑했다, 그는 그곳을 떠나 자기 자신의 뿌리들을 지나서 그 거대한 근원을 향해 갔다,> - 제 3 비가


<당신이 보다시피, 우리는 꽃처럼 단 한 해만 사랑하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가 사랑하는 날 태곳적 수액이 우리의 양팔을 타고 오를 것ㅇ이다. 오 소녀여, 이것이다, 우리의 내면 속의 단 하나의 존재,> - 제 3 비가

우리는 불완전하기에 우리의 내면에 몰두해야한다.  신을 통해서도 우리를 제대로 볼 수는 없다. 그저 시인의 눈으로, 견자의 눈으로 우리의 존재를 투시해야 가능할 것이다.


<오 부드럽게, 부드럽게 그를 위해 사랑의 하루를 시작해라, 믿을 만한 하루를,- 그를 정원으로 인도하여 그에게 넘치는 밤들을 베풀어라....> - 제 3 비가

<오 생명의 나무들이여, 너희들의 겨울은 언제인가? 우리는 하나가 되지 못하고  있다, 우리는 철새떼처럼 서로 통하지 못한다.> - 제 4 비가

물론 이러한 시도 자체는 본질적으로 불가능하다. 우리는 결코 닿을 수 없다. 그렇기에 이 모든 노래들은 '비가'일 수밖에 없다. 우리는 불완전하기에 완전해지기 위하여 불완전함을 극복하고, 우리의 내면을 관조하지만, 완전해진다는 것은 본질적으로 불가능한 일이다. 이 모든 것은 시시포스의 노동이며, 그렇기에 비가다.


<천사와 인형: 그러면 마침내 연극은 시작되는 것이다. 그러면 우리의 존재 그 자체로 인해 우리가 언제나 둘로 나뉘었던 것이 합쳐진다.> - 제 4 비가

우리는 인형 같은 존재지만, 천사와의 합일은 끝없이 시도한다. 그것은 마치 연극과도 같다. 어떻게 보면 짜여진 대본 대로 모든 것이 움직이며 연극이라는 한계를 지닌다. 반복적이며 작위적이다.

<드높은, 여름날의 밤들, 그리고 별들, 대지의 별들. 오 언젠가는 죽는 것, 그들의 무한함을 아는 것, 그 모든 별들을: 그들을 어떻게, 어떻게, 어떻게 잊겠는가!> - 제 7 비가

언젠가는 죽는 것, 그리고 무한함을 아는 것, 그것이 비가의 궁극적인 앎의 목표 중 하나일 것이다.


<세계는, 사랑하는 이여, 우리의 마음속 말고는 어디에도 없다. 우리의 인생은 변용 속에 흘러간다. 그리고 외부 세계는 점점 더 적게 사라진다.> - 제 7 비가

세계란 결국 나라는 존재가 있어야 같이 있는 것이다. 내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면, 나라는 존재에게 세계는 무관한 존재가 되어버린다. 존재는 불완전하기에 언제나 변한다.

<죽음을 보는 것은 우리 뿐이다; 자유로운 동물은 몰락을 언제나 뒤로하고 앞에는 신을 두고 있다, 일단 걷기 시작하면, 동물은 영원히 앞으로 걷는다, 마치 샘물이 흘러가듯이.> - 제 8 비가

인간은 죽기에 불완전하며, 그렇기에 죽음을 본다. 만약 죽음이 없다면 저 완전한 동물들처럼 앞으로 영원히 나아갈 지 모르지만, 우리는 언제나 제자리 걸음을 할 수밖에 없다. 그렇지만 릴케는 결코 죽음에 대해 부정적이지 않다. 오히려 그것이 살아가는 것이다.

<천사를 향해 이 세상을 찬미하라, 말로 할 수 없는 세상은 말고, 호화로운 감정으로는 너는 천사를 감동시킬 수 없다; 천사가 모든 것을 절실하게 느끼는 우주공간에서 너는 초심자일 뿐이다. 그러니 천사에게 소박한 것을 보여주어라,> - 제 9 비가

천사에게 닿는 것과 더불어, 천사를 찬미하는 것이 릴케가 원하는 것이다. 그러나 완전한 천사를 감동시키기란 어려운 일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우리의 불완전함을 깨닫고, 인정하며 인간만이 할 수 있는 것, 천사는 결코 알지 못하는 소박한 것을 보여주는 것만이 천사를 기쁘게 해줄 수 있는 유일한 방도다.


<보라, 나는 살고 있다. 무엇으로? 나의 어린 시절도 나의 미래도 줄어들지 않고 있다...넘치는 현존재가 내 마음속에서 솟아나기 때문이다.> - 제 9 비가

보라, 우리는 불완전하고, 천사를 원하지만, 그것이 본질적으로 비극임을 안다. 그렇기에 우리는 삶의 멋짐과 존재의 불완전함을 찬양할 수 있다. 그렇기에 두이노의 비가는 존재와 불완전함에 대한 시인의 승리이자 찬가가 된다.

<언젠가 나 이 무서운 인식의 끝마당에 서서 화답하는 천사들을 향해 환호와 찬양의 노래를 부르리라.> - 제 10 비가

시인은 겸손한 자세로 미래를 기약하지만, 이미 그는 두이노의 비가란 찬가로 천사들마저 만족할 만한 찬가를 불렀다.


<그리고 솟아오르는 행복만을 생각하는 우리는 행복이 떨어질 때면 가슴이 무너지는 듯한 충격을 느끼리라.> - 제 10 비가


충격을 느끼면 어떠하랴? 비가의 마지막 문장은 결코 부정적이지 않다. 오히려 이것은 시인의 승리이며 또다른 찬가를 다른 말로 표현한 것에 불과하다.

릴케가 내리는 결론은 발레리가 <해변의 묘지>에서 내리는 결론, "바람이 분다, 살아야겠다."와 일맥상통한 면을 보인다. 서로 교류가 있기도 했던 두 위대한 영혼들은 삶의 불완전함에 대해 비슷한 결론을 내린다.

불완전하기에 끝없이 살아가며, 살아가기에 불완전하다. 그리고 거기에 약간의 멋짐이 있을 뿐이다.

물론 이것은 그저 피상적인 감상에 불과하며 릴케가 말해질 수 없는 것을 언어로 표현한 것과 달리, 나는 나의 감상을 표현하진 못 하겠다. 하지만 굳이 그럴 필요는 느끼지 않는다. 나 자신에게 설명되지도, 이해되지도 않는 어떤 감상을 느꼈으면 그것만으로도 족한다고 본다.

그것이 설령 결코 이해되지 못할 비가라 할지라도.

-오르페우스에게 바치는 소네트/완성시에서 께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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