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보코프, <운문과 견해> - 러시아 시를 향한 애가 독서일기-시



나는 창유리에 비친 가짜 하늘에
살해당한 황여새의 그림자였다,
나는 잿빛 솜털의 얼룩이었으며, 나는
비친 하늘 속에서 살았고, 날아다녔으며,
또한, 그 안에서부터, 나는 나 자신과
나의 전등과 접시 위 사과 한 알을 베끼곤 했다.  
-나보코프,창백한불꽃 中


알다시피 나보코프의 글들은 꽤나 시적이고 실제로도 시를 상당수 쓴 시인이기도 했다. 단순히 자신의 글을 쓰는 것 외에도 그는 상당히 많은 번역 활동을 하였는데, 주로 러시아 작품을 영어로 옮기든가, 아니면 자신의 작품을 비롯한 다른 작품들(예: 앨리스)를 러시아어로 옮기는 활동을 하였다.

이 책은 그런 나보코프의 러시아 문학을 향한 애정의 결과물이다. 물론 정확하게는 러시아 운문을 향한 그의 애정이다. <운문과 견해>란 제목처럼, 이 책은 나보코프가 번역한 대부분의 러시아시들의 영역을 한군데 모으고, 그가 쓴 각각의 시인들에 관한 견해 및 번역 자체에 대한 그의 글들을 덧붙여서 편집한 책이다.

번역은 무엇일까? 접시 위에 
시인의 창백하고 눈부신 머리, 
앵무새의 꽥꽥거림, 원숭이의 재잘거림, 
그리고 죽은 자의 신성모독을 함께 올려놓는 것. 
-나보코프, 에프게니 오네긴을 번역하는 것에 관하여 中


본질적으로 번역은 번역자 본인의 견해가 개입되는 일이고, 나보코프는 보다 완전한 번역을 위해 꽤나 고심한다. 러시아 시인들이 쓴  운율의 방식을 살릴려고 노력하며, 때론 단어 하나하나를 직역하여 좀 더 시인의 의도에 맞추려고 한다. 그 결과물들 자체는 꽤나 신기하다.
다만  가장 분량이 근 에프게니 오네긴은 수록되지 않았는데, 아무래도 꽤나 유명한 번역인데다가, 번역의 3배가 넘는 해설까지 같이 있어야 되기에 그런지도 모른다. (애초에 따로 모을 필요가 없는 분량이기에)

나보코프는 '러시아 시문학의 3세기'란 부칭답게, 푸슈킨 이전의 러시아 시의 선구자들에 해당되는 자들의 시부터, 가깝게는 만델슈탐 등 비교적 당시 기준으론 현대에 해당되는 자들의 시까지 그가 번역한 범위는 꽤나 다양하다. 물론 모든 시인이 동등한 분량을 가진 것은 아니며, 그의 사랑의 대부분은 역시나 푸슈킨이다. 다음으론 아마도 레르몬토프나 블로크일거다.

(특이하게도 일단은 (당연하겠지만) 푸슈킨을 19세기 최고 천재로, 그 다음격으로 레르몬토프, 그 다음 20세기론 블로크 등을 뽑았고, 만델슈탐 자체는 꽤나 재능있게 평가하지만, 아흐마토바 등은 꽤나 폄훼한다.)

책 자체를 꽤나 여러 방향으로 볼 수 있어 더 괜찮은 책인데, 나보코프에 관심이 많은 독자라면 그의 번역론 등에 관심을 가질 것이고, 그 외에도 러시아 시 앤솔로지로도 꽤나 괜찮지 않나 싶다. 20세기 부분은 빈약하지만, 그 이전은 꽤나 다양하다.




덧글

댓글 입력 영역



통계 위젯 (화이트)

3581
525
60196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