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G. 발라드 <잔혹 전시회>, <크래쉬>, <콘크리트 섬>, <하이라이즈> 독서일기-소설



<크래쉬> - 

이 소설은 말 그대로 '현대'를 위한, '현대'에 대한, '현대'에 의한 소설이다. 모든 핵심은 결국 자동차다. 미래주의자들이 힘과 속도의 상징으로 달리는 자동차를 예찬하였듯, 빠른 속도로 달리는 자동차는 현대 문명 그 자체와도 같다.
그렇기에 발라드는 현대에서 밖에 있을 수 없는 기괴한 종류의 성애를 그린다. 에로티시즘과 모던이 결합할 때, <크래쉬>가 나온다.
자동차 사고는 일종의 예술로 묘사된다. 이는 새로운 종류의 예술이다.  
발라드는 엘리자베스 테일러나 그 외 자동차 사고와 관련된 현대의 유명인사들, 그리고 자동차 사고 성애자들을 한데 섞어 기괴한 도시 풍경을만들어낸다.
여기엔 어떤 세계라기보단 말 그대로 그때그때 순간에만 존재하는 것 같은 구성요소들만이 있다, 마치 자동차 사고의 순간처럼.
사실 '잘 짜여진 소설'이라기엔 무리가 있을 수 있다. 어디까지나 발라드의 다른 소설들과 비교해서.
물론 이 '소설'의 목적은 잘 짜여진 세계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기괴한, 아니 그 어떤 것보다도 현대와 밀접하게 연관된 현실적인 순간을 만들어내는 것이 목적이므로 그다지 상관은 없다. 다른 말로 표현하면, 변태성의 향연이다.
발라드는 현실이 '현실'이 아니기에, 소설에서나마 '현실'을 담아야된다고 말한다. 그런 점에서 <크래쉬>는 성공적이다. 
기괴하지만, 그렇기에 현대적이다.

<잔혹 전시회> -
만약 <크래쉬>만 읽은 독자라면, <크래쉬>의 기괴함을 보며 발라드란 작가의 변태성에 감탄하겠지만, <잔혹 전시회>까지 읽은 독자라면, <크래쉬>는 도리어 '정제'된 세계란 것에 충격을 받을 것이다.
시기적으론 <크래쉬> 이전의 소설이며 그렇기에 그 후에 나올 <크래쉬>나 <하이라이즈> 등의 원형이 정제되지 않은 야성 그 자체로 드문드문 보이기도 한다.
구조 자체도 매우 실험적인데, 어떻게 보면 수많은 엽편들이 모인 '장편'이고, 어떻게 보면 그냥 단편집이지만, 어느 쪽으로 보든 크게 무리는 없다.
발라드의 세계 안에서 과학 기술은 이미 하나의 포르노그래피가 되었다. 우리 모두 과학의 산물에 발정하며 과학과 기술로 건국된 현대에서 살아간다. <잔혹 전시회>는 그런 의미에서 그런 현대의 포르노그래피를 하나하나 전시하는 공간이다. 
발라드가 이 책을 쓸 때나 지금이나 큰 변화는 없다는 점에서 그 또한 꽤나 미래를 내다본 작가일지도 모른다.

요약하기 힘들며 사실 할 필요도 없는 책이지만, 굳이 요약하자면 <잔혹 전시회>의 한 챕터 제목을 인용하는 것으로 끝내고자 한다.
'왜 나는 로날드 레이건을 따먹고 싶은가?'

<콘크리트 섬> -

위의 소설들이 모두 그러하듯, 이 소설 또한 현대 도시를 그리지만, 어떤 점에선 환상적 소설이다. 수많은 이들이 다니는 도시 속에서 콘크리트 섬에 유배되어버린 남자를 상상해봐라. 힘들지만, 이 책은 정말 그런 내용이다. 도시 속의 섬.
다만 꽤나 아쉬운 점은 초중반까지의 그 주인공 홀로의 사이코틱한 세계 내의 묘사는 마음에 들지만, 그 이후 이어지는 로빈슨 크루소 식 모험에 대해선 꽤나 실망적이다.
아무리 소설 자체가 어느 정도 현대의 로빈슨 크루소에 관한 이야기일지도 모르지만, 발라드의 장기는 아니었다.

<하이라이즈> - 
<하이-라이즈>에서 발라드는 하나의 세계를 완전히 그리는데 성공했는데, 그런 점에선 '소설'로서는 위의 소설들보다 성공적이다. 다만 그 고층 건물의 세계는 약육강식이 지배하는 원초적 세계다.
<물에 잠긴 세계>가 그러하듯, 하이라이즈에 사는 이들은 점점 원시로 회귀하는 듯 하다. 
소설의 주인공은 물론 형식적인 주인공이 있지만, '하이-라이즈' 자체다. 이것 자체가 곧 하나의 도시이자 세계다.
굳이 구질구질하게 더 쓰기는 귀찮게 되어버렸다.
J.G. 발라드는 변태적이다. 여기엔 많은 의미를 내포한다. 좋아하면 좋아할 것이며 싫어하면 더욱 싫어할 것이다.

끗. 
께속?


덧글

댓글 입력 영역



통계 위젯 (화이트)

3188
668
60745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