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이너 뮐러 <햄릿 기계> - 갈라진 독일, 유럽의 폐허, 그리고 현대인의 분열 독서일기-희곡


<나는 햄릿이었다>. 하이너 뮐러의 희곡 <햄릿 기계>는 ‘햄릿’의 고백으로 시작한다. 말 그대로 햄릿은 햄릿이었다고 고백한다. 그렇다면 현재의 그는, ‘햄릿’이라 칭해지는 그는 햄릿이 아닌가? 그렇다면 어째서 그는 무대 위에서 아직도 햄릿이라 칭해지는가?
<나는 햄릿이었다. 나는 도시의 부둣가에 서서 파도에게 말한다 블라 블라 블라, 내 뒤엔 유럽의 폐허.>
블라 블라 블라 그는 아무 의미 없는 말을 읊조린다. 그의 뒤엔 폐허뿐이다. 뮐러의 햄릿은 말 그대로 <햄릿> 이후의 햄릿이다. 극에서 죽었음에도, 극이 끝났음에도 그의 극은 계속되며, 그는 계속 무대 위를 방황한다.
뮐러는 극의 형식에서부터 우리를 여러모로 당황시키는데, 기존의 극본들과 달리, 뮐러의 대본은 ‘희곡’의 형식보단 거의 산문에 가까운 형식을 취하고 있다. 말 그대로 모든 것이 모호하다. 이는 달리 말하면, 무대에서의 연출은 말 그대로 연출가에 의하여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음을 뜻한다. 이 십여 쪽에 불과한 희곡을 무대 위에 올리는 것은 말 그대로 연출가들의 숙제일 것이다.
뮐러는 서문에서 그의 목표들을 적는데, 말 그대로 희곡의 해체이며, 햄릿의 해체이고, 독일의 역사의 해체라고 그는 말한다. 동독 출신의 그에게 ‘독일’의 역사, 특히나 2차 대전 이후의 분열된 독일은 지식인으로서 중요한 문제일 것이다. 그렇다면 왜 하필 햄릿인가? 왜 보이체크나 파우스트가 아니고, 햄릿인가?
여러 이유가 있을 것이다. 햄릿이라는 배역이 가지는 특수성. 사느냐 죽느냐를 고민하는 그의 부조리함. 혹은 유럽의 페허를 만든 햄릿, 말 그대로 단순히 독일의 역사뿐만 아니라 유럽 그 자체를 조명하기 위한 햄릿일 수도 있을 것이다. 다르게 생각해보면, 셰익스피어의 햄릿은 사실 그 누구보다도 독일적인 캐릭터이다. 셰익스피어의 희곡들은 당대 독일 지역에서도 활발하게 상연되었으며, 분열되었던 독일인들의 정신에 영향을 끼치기도 한다. 당대의 통일되지 않았던 독일과 셰익스피어, 그리고 분열된 현대의 독일과 햄릿. 햄릿이 독일 역사의 해체를 위한 배역으로도 충분하지 않겠는가?
 
‘유럽의 페허’란 점 때문에 우리는 T.S. 엘리엇의 <황무지>를 꽤나 연상케 하는데, 말 그대로 햄릿 또한 이 황페화한 유럽에서 아무런 이유 없이 절망만을 한다.(황무지를 연상시키는 별도의 글들 또한 뮐러는 쓰기도 했다) 

<나는 착한 햄릿이니 나에게 절망할 이유를 주시오>

그러나 그에겐 어떠한 것도 없다. 어쩌면 그는 선한 햄릿보다는 악한일지도 모른다.

<리처드 3세 나 왕자살해하는 왕
오 나의 백성들이여 내가 그대들에게 무슨 짓을 했는가>

리처드 3세가 왕자들을 죽이고 왕위를 찬탈했듯, 햄릿 또한 <햄릿>의 배역들을 죽이고 폐허를 만들었다. 그러나 햄릿이 여전히 무대 위에서 햄릿을 연기하는 것처럼 다른 배역들 또한 그 배역을 계속 연기한다.
 
[그대는 너무 늦었네, 나의 친구여, 출연료를 받기엔/ 내 비극에 그대를 위한 자리는 없네. 호레이쇼.]
 
그러나 사실 햄릿의 저 발언은 매우 역설적이다. 이 비극 또한 햄릿을 위한 비극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는 극이 끝난 뒤에도, 말 그대로 퇴장을 했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계속 비극을 연기한다, 누구의 것도 아닌 비극을.
그렇기에 뮐러는 여러 충격적인 장면들을 삽입하면서 햄릿의 황폐함을 그려내는데, 그 중 하나는 거트루드와의 근친이다.
[어머니의 자궁은 일방통행로가 아니다.]
마치 오이디푸스처럼, 햄릿 또한 아버지/클라디우스를 죽이고, 아버지의 아내를 취한다. (뮐러는 햄릿의 아버지와 클라디우스를 동일시화한다) 그러나 진실을 찾기 위해 스스로 눈을 멀고, 진실을 찾는 오이디푸스와 달리, 햄릿은 그저 부도덕함만을 낳을 뿐이다.
 
[오필리어
제 심장을 드시고 싶나요, 햄릿(웃는다)
 
햄릿
(손으로 얼굴을 가리며) 나는 여자가 되고 싶어
 
햄릿, 오필리어의 옷을 걸쳐입는다, 오필리어, 창녀의 가면을 그에게 씌운다. 클라우디스, 이제 햄릿의 아버지인 그는 침묵 속에서 웃는다. 오필리어는 햄릿에게 키스한 후, 클라우디스/햄릿의 아버지와 함께 관 속으로 걸어간다. 햄릿은 창녀처럼 자세를 취한다. ]
 
이런저런 무의미하며 충격적인 장면들이 몇몇 진행되지만, ‘햄릿’은 안식을 취할 수 없다. 마침내 ‘햄릿’은 스스로의 처지를 깨닫고, 저항/혹은 포기를(을) 한다.
 
 
[나는 햄릿이 아니다. 나는 더 이상 극에서 배역을 맡지 않겠다. 내 대사들은 나에게 어떠한 것도 전해주지 않는다. 내 생각들은 그들의 피의 이미지를 유출할 뿐이다. 내 드라마는 어디에서도 상연되지 않는다. 내 뒤의 무대는 세워질 뿐이다.
내 드라마엔 관심도 없는 자들에 의해, 더 이상 신경도 쓰지 않는 자들에 의해. 나 또한 더 이상의 흥미는 없다. 나도 더 이상 연기하지 않겠다.]
 
이제 그는 ‘햄릿’에서 ‘햄릿-연기자’가 된다.
 
[ 나는 다시는 먹고, 마시고, 숨 쉬고 여자를 남자를 아이를 동물을 사랑하고 싶지 않다. 나는 더는 죽기 싫다. 나는 더는 죽이기 싫다.
 
(그가 작가의 사진을 찢는다.)
 
나는 봉합된 나의 살을 찢어서 연다. 나는 내 정맥, 내 골수, 내 두개골의 미로 속에서 살고 싶다. 나는 내 내장 속으로 숨는다. 나의 장소는 나의 배설물 속에, 내 피 속에 있다. 어딘가 육체들이 망가져서 내 배설물 속에 살 수 있는 곳이 있을 거다. 어딘가 육체들이 열려있어 내 피와 함께 혼자 있을 수 있는 곳이 있을 거다. 내 생각들은 내 머릿속 상처에 불과하다. 내 뇌는 흉터다. 나는 기계가 되고 싶다. 잡기 위한 손 걷기 위한 다리 고통 없이는 생각도 없다.]

그는 작가에게 창조된 인형이지만, 인형이기를 거부하며 작가를 살해한다. 그는 차라리 기계가 되고 싶어 한다. 말 그대로 그에게 존재는 무의미한 고통이다. 햄릿 기계라면 그에겐 더 이상의 고통은 없을 것이다.
햄릿의 고통은 당연하다. <햄릿>이 진행될 때 그는 그저 셰익스피어의 대사들로 이루어진 배역이었으며 어떠한 사색 없이 정해진 극을 따르면 될 존재였다. 그러나 극이 끝나고, 이제 그는 말 그대로 ‘생각하는 존재’로 남겨졌다. 그렇기에 그는 고통스럽다.
 
[죽은 뱃속에서 우러나오는 웃음소리
하일 코카 콜라
살인자를 위한
왕국
 
나는 맥베스였다]

그리곤 햄릿 연기자는 마르크스, 레닌, 마오의 해골을 도끼로 쳐부수며 극의 하이라이트를 이끌어낸다.
문제는 이 ‘햄릿 연기자’가 누구인가, 혹은 무엇인가다. 무엇이 그를 햄릿 기계로 만들었는가? 시대상과 작중 표현되는 마르크스, 레닌, 마오의 해골을 도끼로 까부수는 행위 등을 고려하면, <햄릿기계>는 어느 정도 동독과 공산 사회에 대한 비판처럼 보여 진다. 또한 햄릿이라는 역을 포기한 햄릿, 무작정 정해진 배역을 연기하지 않는 허무주의에 빠진 햄릿과 전쟁으로 황폐화된 유럽을 고려하면, 패전 이후 독일의 상황을 그리는 희곡으로도 보인다.
<햄릿기계>에서의 햄릿은 독일 그 자체이며 나약한 지식인이다. 독일이 파시즘의 광기를 맹목적으로 따라 유럽의 몰락을 야기 시켰듯, 햄릿 또한 맹목적으로 배역을 연기하여, 폐허만을 만들어냈다.
물론 단순히 이 희곡이 유럽에 사는 이들만을 위한 것은 아니다. [하일 코카콜라]인 것처럼, 말 그대로 현대의 물질문명에서 황폐화된 이들을 위한 극이 바로 <햄릿 기계>다.
 
[오필리어
여기 엘렉트라가 말합니다. 암흑의 심연에서. 고문의 태양 아래에서. 세계의 메트로폴들을 향하여. 희생자들의 이름으로. 나는 내 속에 뿌려졌던 모든 정액을 석방했어요. 나는 내 젖에서 나오는 우유를 치명적인 독약으로 바꿨죠. 나는 내가 생명을 주었던 세계를 다시 받았어요. 내 넓적다리 사이로 나는 내가 생명을 주었던 세계를 목 졸랐어요. 나는 그것을 내 가랑이 사이에 묻었죠. 굴복의 행복을 타도해요. 증오, 경멸, 폭동, 죽음 만세. 그것이 도축업자의 칼을 들고 당신의 침실로 갈 때, 당신은 진실을 알 게 될 거에요.]
 
그러나 극은 일종의 불길한 미래를 암시하며 막을 내린다.
뮐러의 선구자들은 다양하다. 베케트의 부조리함이나 브레히트의 경고, 혹은 보이체크의 환영에서 셰익스피어의 악한들, 또한 엘리엇의 황무지까지 우리는 이런저런 요소들을 그의 희곡에서 발견할 수 있다.
이들이 때론 공통적이거나 반복적인 것을 말하지만, 그럼에도 따분하지 않은 점은 그 주제가 언제나 유효하기 때문일 것이다.
<햄릿 기계>는 말 그대로 <햄릿>과 극에 대한 해부이자 억압된 사회의 지식인의 나약함에 대한 성찰이자 경고다. 말 그대로 햄릿의 씨앗, 혹은 그 무언가가 도살업자의 칼을 들고 우리에게 다가올 때에야 우리는 진실을 깨닫게 될 것이다. 살해당하는 순간에.
이는 일종의 경고다.
 
-Heiner Muller <연극기계 Theatremachine>, trans. & ed. by. Marc von Henning, Faber and Faber.
 
드디어 하나 처리했다.
 

덧글

  • CATHA 2014/04/30 10:51 # 삭제 답글

    딱,딱히 제가 현기증난다고 해서 써주신건 아닐테지만 이거 올라온 거 보고 굉장히 텐션이 업됬습니다ㅎㅎ

    이래저래 작품은 굉장히 멘붕이네요. 말씀처럼 파우스트나보이체크 등 가장 '독일적인' 캐릭터들이 아닌 뜬금포로 햄릿을 가져다 쓴 것도 인상깊구요. 그런데 햄릿이 독일 역사의 해체를 위해서 꼭 알맞는 인물이라는 것은 잘 이해가 가지 않았습니다. 좀 더 설명해 주실수 있으신가요?

    배역과 연기자의 분해라는 면에서 피란델로 극도 연상이 되고, 제목으로 장 콕토의 지옥의 기계랑 비슷한지라 또 햄릿+오이디푸스 모티브인가 싶었는데 오히려 극의 취지는 엘리엇에 가까웠네요. 좋은 글 감사합니다!
  • JHALOFF 2014/05/03 05:54 #

    '햄릿' 자체는 아무래도 극작가라면 누구나 중요한 인물이니까요. 독일적인 의미는, 셰익스피어의 연극들이 동시대 통일 전의 독일 지방에서도 영국 못지 않게 인기를 누렸었다는 의미로 썼습니다. 그리고 그런 셰익스피어의 연극들에 영향을 받은 괴테 등의 작가나 사상가들이 독일문화를 형성하였고요. 그냥 개인적인 잡설입니다.
댓글 입력 영역



통계 위젯 (화이트)

1339
376
62656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