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터 바이스 <마라/사드> - 마라와 사드의 혁명 논쟁 독서일기-희곡




<사드 후작의 지도 하에 샤량통 정신병원 수감자들이 공연한 장 폴 마라에 대한 박해와 암살>라는 긴 제목의 이 희곡은 아마도 페터 바이스의 제일 뛰어난 희곡이 아닌가 싶다. (그의 기록극들은 개인적으로 볼 때 극으로서는 좀 구리다)

저 괴상한 제목이 암시하듯, 이 희곡은 말 그대로 극중극에 관한 희곡이다. 그리고 그 극 속의 극은 저 악명 높은 사드 후작의 장 폴 마라의 암살에 관한 희곡이다. (실제로도 사드는 정신 병원에 수감되었고, 극단을 운영한다)

이 극에선 몇 가지 눈여겨볼 점들이 있는데, 다음과 같다:
1) 각 배역들을 맡는 배우들이 설정상으론 '광인'이라는 점. 즉 관객으로서 우리가 배역들을 연기하는 정신병자들을 볼 때, 저들이 과연 '사드의 희곡'을 그대로 따르는 것인지, 아니면 단순히 미치광이의 헛소리인지 우리는 생각해봐야한다.

마라의 암살범이자 역시 혁명에 대한 어떤 생각을 가지는 처녀 샬롯 코르데를 기면증 환자가 배역을 맡는다든지 등을 보면 꽤나 기괴한 무언가가 느껴진다.

2) 극중 사드는 장 폴 마라의 암살에 관한 극을 쓰지만, 실상은 그 자신이 극 속으로 들어가, 마라와 함께 '프랑스 혁명'에 관하여 논쟁을 벌이는 것이 사드 본인이 극을 쓴 이유이자, 바이스 본인이 쓴 이유이기도 하다. 
이 희곡의 핵심은 혁명에 관한 두 가지 서로 상반된 관점, 마라와 사드의 논쟁이다.

사드가 극을 마치고 평하듯, 마라와 사드 둘 모두 어떠한 변화가 있어야함에는 동의한다. 다만 그들은 그 방법에 대해선 서로 일치될 수 없는 성향을 지닌다.

 마라와 나는 모두 힘을 옹호했소. 
 하지만 논쟁에서 우리는 서로 다른 과정을 택했지 
 모두 변화를 원했지만, 그와 나의 
 힘의 사용에 관한 시각은 결코 일치될 수 없었소.- 사드

어떤 점에선 둘 모두 위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는 입장이다. 물론 그들의 방법론은 극과 극이다. 

모든 죽음, 가장 잔혹한 죽음마저 
자연의 완전한 무관심 속에 잠겨버려. 
자연 자신은 그저 냉정하게 지켜볼거야 
우리가 설령 모든 인간을 파괴한다고 하여도. 
나는 자연을 증오해. 
그 열정 없는 관중, 부술 수도 없는데
모든 것을 짊어질 수 있는 빙하와 같은 얼굴
우리가 더 위대하고, 위대한 행동을 하게 몰아넣지.-사드

자연의 침묵에 맞서 나는 행동을 사용해 
거대한 무관심 속에서 나는 의미를 발명하지 
 나는 냉정하게 지켜보지 않아 나는 참견해 
그리고 이것과 이것은 잘못되었다고 말하지 
나는 그들을 바꾸고 그들을 개선시키기 위해 일해 - 마라

사드의 희곡은 이러한 마라와의 혁명 논쟁이지만, 실상은 사드 본인의 마라에 대한 조롱극에 가깝다. 애초에 마라는 이미 죽었으며 극 속 마라는 정신병자가 연기하는, 말 그대로 사드 본인이 현실로 불러와 논쟁하고, 그가 낳은 혁명의 결과를 보여주기 위한 인형에 가깝다.

마라 
오늘 저들은 당신을 필요로 하지 왜냐하면 당신이 저들을 위해 고통받을테니까 
저들은 당신을 필요로 하고 당신의 재를 담은 항아리를 공경해 
내일이면 저들은 돌아와서 항아리를 부수고 그들은 물을테지 
마라 누가 마라였지 -사드

그렇지만 이 극을 단순히 사드의 마라에 대한 조롱극으로 볼 수는 없다. 사드 또한 바이스가 창조한 배역에 불과하니까. 따라서 극을 보는 관객들은 다음과 같은 것들을 스스로 구별하며 자신이 원하는 해석, 또는 의미를 찾아야할 것이다:

-역사 속의 사드
-극작가로서의 사드
-작가가 만든 배역으로서의 사드
-역사 속의 마라
-작가가 만든 배역으로서의 마라
-사드가 만든 마라

극본 자체는 어떻게 연출하느냐에 따라 사드나 마라에 초점을 맞출 수 있을 것이다. 극 속 사드는 엄밀히 말해선 조롱자이자 허무주의자이다.

오래 전 나는 내 걸작을 버렸지 
30 야드 길이의 종이 두루마기였는데 
몇년 전 지하 감옥 안에서 깨알 같은 글씨들로 채워넣은 것이었어.
그건 사라졌지 바스티유가 무너질 때   
그건 사라졌지 모든 쓰여진 것들 
모든 생각과 계획된 것들이 사라질 것처럼. -사드

반면 마라는 스스로의 한계, 혹은 공포정치를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혁명을 포기하지 않는 일종의 이상주의자처럼 그려지기도 한다. (이는 어떤 면에선 더욱 조롱당하기 위한 의도로도 볼 수 있다)

우리는 혁명을 발명했어 
하지만 그것을 어떻게 운영해야할지 모르지. 
봐라, 모든 이들은 과거로부터 무언가를 남기고 싶어한다 
구체제의 기념물을
이 사람은 그림을 남기기로 결심했지
이 자는 그의 정부를 간직하고 있어
그는 그의 정원을 간직하고
저 자는 그의 땅을 간직한다.
저 자는 그의 시골 집을 간직하고
또 저 자는 그의 공장을 간직하지.
이 사람은 그의 조선소와 떨어질 수 없었어
이 자는 그의 군대를 간직하고
또 이 자는 그의 왕을 간직한다. - 마라



극 자체는 여러 노래들이나 다양한 몰입 유도,그리고 서사극적인 요소까지 어느 것 하나 빠짐없이 잘 배합되어 보거나 읽는 이를 즐겁게 해준다.

특히나 서사극적인 요소는 마지막 자크 루 역할을 맡는 정신병자의 외침으로 두드러지는데, 그는 관객에게 외친다.

아니야! 왜 당신들은 저들에게 말하기를 두려워해? 
마라는 당신들을 위해 죽었어! 저들이 그를 살해했어! 
이제 그들이 당신들을 살해할거야! 
언제 당신들은 보는 법을 배울거야! 
대체 언제 당신들은  일어서는 법을 배울거야! -자크 루

마라나 사드 모두 공통적으로 대중의 혼돈을 두려워한다. 스스로 일어나지 않은 대중은 혼돈을 낳을 뿐이다. 결국 프랑스 혁명의 끝엔 나폴레옹이 남았을 뿐이다 (적어도  사드의 관점에선)
그렇다면 극의 결말은 무엇인가? 단순히 마라의 암살과 실패인가? 그렇진 않다. 사드 본인이 스스로 극의 결말을 정할 수 없었다고 고백하듯, 결말은 없다. 사드/마라라는 이분법적인 분류도 어떤 면에선 잘못된 분류일 것이다. 단순히 마라 대 사드로만 나누는 것은 이 극을 한쪽으로만, 단순하게만 보는 길이다.
자크 루의 외침은 단순한 정신병자의 외침을 수도 있고, 바이스의 외침일 수도 있다. 마라의 방법을 선택하듯, 사드의 방법을 선택하듯, 혹은 제3의 방법을 선택하듯, 적어도 일어서는 법을 배워야하는 것은 유효할 것이다.

http://www.youtube.com/watch?v=RJc4I6pivqg

영화도 아주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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