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요의 바다> 4부작, 미시마 유키오 - 허무에 대한 탐미 독서일기-소설



<풍요의 바다> 4부작은 미시마 유키오의 최후의 작품이자 대작이며, <봄의 눈>, <달아난 말>, <새벽의 절>, 그리고 <천인오쇠>로 구성된다.

미시마는 분명히 문제적인 인간이었고, 이를 부정할 길은 안타깝게도 거의 없는 듯 하다. 사실 그가 어떤 사상을 지녔든지, 군대의 봉기를 외치곤, 몸을 비틀며 할복을 했다는 점에서부터 정상의 눈으로선 미치광이 밖에 보이지 않겠지.

<풍요의 바다>는 그런 의미에서 문제적이면서도, 정신 나간 걸작이라고 밖에 표현할 길이 없는 그런 연작이다. 

사실 과연 미시마 유키오를 그의 '정치 사상'과 분리할 수 있는가는 의문이다. 문학의 미시마와 정치의 미시마를 분리하려는건 마치 에즈라 파운드의 <캔토스>를 논하면서 그의 유교-파시즘 성애를 분리하려는거와 같은 어처구니 없는 시도가 아닌가 싶을 정도다.

아니, 과연 미시마에게 특정한 '정치적 사상'이 있는지조차 사실 의문이다. 미시마의 정치란 것은 아무리봐도 결국 본인의 미학을 실현시키기 위한 수단에 불과한 듯 싶고, 또한 어떤 세상을 바꾸고자하는 의지의 구현이라기보단, 단순한 일본 천황제 성애에 가깝다.

아니, 이것도 거짓말이다. 아무리봐도 미시마 유키오 이 인간은 그저 할복에 대한 성애가 있는 것이 아닌가 싶을 정도로, 모든 것이 결국은 '늙기 전에 깨끗하게 스스로 배를 갈라 죽는 것'에 연관된다. 이러한 미적 성애에서 비롯되니 정치라고 하기에도 솔직히 뭐하다고 본다.


<풍요의 바다> 연작은 불교적 윤회에 바탕을 둔 세계관으로서, 시게쿠니 혼다가 청소년 시절의 친구, 키요야키 마츠가에의 환생들과 조우하며 그의 '환생'들과의 만남에 관한 소설이다.

첫편에 해당하는 <봄의 눈>은 간략하게 정의하면, 우리가 흔히 아는 일본적인 탐미소설이며, 그 극한이라고까지 말할 수 있을 정도로, 아름답게 잘 쓰였다. 

<봄의 눈>은 1910년대의 일본 도쿄를 배경으로, 귀족 집안인 키요야키와 사토코와의 이루어질 수 없는 비극적인 사랑과 죽음을 다루며, 앞으로의 시리즈를 예고한다. 병약한 키요야키는 한 마디로 병약하고, 찌질한 감성의 소유자라, 자신의 감정도 이해할 수 없어, 사랑을 깨닫지 못하고, 

사랑하는 이를 놓치지만, 정작 감정을 깨닫고 나선, 사랑을 시도하다, 결국 병으로 죽어버리는 그런 병약한 인물이다. 그리고 시리즈의 한 축이 될 혼다는 그런 키요야키의 병약하지만, 알 수 없을 매력에 매료되곤, 앞으로의 시리즈를 이어주는 징검다리 역할로 변한다.
(사토코의 천황가와의 약혼은 미시마의 천황성애를 잘 드러낸다, 이 천황제 밖에 모르는 바보 미시마놈!)

<봄의 눈>이 탐미적이고 파멸적인 사랑을 다루었다면, <분마>에선 20여년이 지난 후, 1930년대, 보다 정확하게는 일본이 본격적으로 전쟁에 돌입하기 직전의 혼란한 상황을 다루며, 1권에서 병약했던 키요야키와는 대조되는, 강한 육신의 (키요야키의 환생일) 혁명가 이사오를 등장시킨다.

<봄의 눈>이 탐미적 소설이었다면, <분마>는 피가 넘치는 정치의 세계다. 굳이 비교하자면, 도스토예프스키의 <악령>과도 같은 소설일까. 우리의 스타브로긴인 이사오는 자신의 전생과 마찬가지로, 파멸을 피할 수 없고, 할복으로 생을 마감한다. 

<새벽의 절>은 또다시 20년이 흘러, 1940년대의 태국에서 공주로 환생한 키요야키가 중심 인물이 되는데, <새벽의 절>은 한 마디로 '철학적 소설'이다. 결국 이 풍요의 바다의 중심이 되는 '환생'에 대한 고찰이 중점이 되면서, 그와 동시에 '여성'으로 변한 키요야키와 혼다와의 사랑을 그려나간다.

마지막 <천인오쇠>에선 드디어 노인이 된 혼다와 그가 키요야키의 환생일 거라 추정하는 양자 토루의 파멸, 그리고 '천인의 죽음'과 환생의 죽음이 중점이 되면서, 시리즈의 대단원을 마무리하는 그런 작품이다.


<천인오쇠>의 마지막 장에 이르러선, 미시마는 애당초 '키요야키'란 자가 존재는 했는지, 과거를 붙잡으려는 늙어버린 인간의 허무함을 묘사하며, 말 그대로 모든 것을 부수곤, 허무주의적 세계관으로 대단원의 막을 내린다.

이런 류의 시리즈에서 가장 중요한 것 중 하나가 마무리란 점을 생각하면, <천인오쇠>의 마무리는 가히 이 시리즈의 완성도를 한층 높은 곳으로 보내버리는 그런 한 미치광이 천재의 천재성의 발현이라 할만하다.


<풍요의 바다> 미시마의 미학에 근간을 두면서, 1910년대부터 1970년까지의 일본의 사회상도 일부 담는 그런 시리즈다. 물론 미시마의 주 관심사는 아무리봐도 일본의 사회를 담는 것은 결코 아니다. <달아난 말>이 그 역할을 일부 수행하지만, 그것조차 이사오라는 한 남성의 장엄한 할복을 다루기 위한 소재에 불과하다.

미시마의 미학은 대체 무엇일까, 한 마디로 '할복성애'로 정의되지 않을까? 공교롭게도, 왠지 모르게, <나루토>의 데이다라와 사소리가 생각나더라.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읽으면서 문득 생각이 났다. 데이다라는 사라지는 것이 예술이라 외치고, 사소리는 영원불멸한 것이 예술이라 외친다. 미시마의 할복은 이 두 사상을 짭뽕시킨 것에 가깝다.

'할복'은 하나의 의식이며, 그것도 아름다움을 간직한 젊음이 늙기 전에, 그 아름다움을 간직하고 죽어버리는 행위다. 아름다움이 사라지지만, 그와 동시에 그 젊음의 아름다움은 영원토록 박제되는 거다. 굳이 미시마의 성애의 근간을 찾으면 이런 매커니즘이 아닐까? 물론 자살엔 종류가 많다. 하지만 '할복'은 굉장히 일본적이다.

이러한 젊음의 덧없는 아름다움과 파멸, 그리고 허무에 관한 성애는 결국 친구와는 달리, 죽지 못하고, 추하게 늙음을 향해가며, 젊을 때 죽어버린 친구 키요야키의 환생에 집착하는 혼다가 이 시리즈의 중심축인 점과도 연관된다.

그와 동시에, 미시마는 몇 가지 허무에 도달한다. 인생이란 뜻대로 되지 않는다. 그리고 더 이상 윤회를 반복하지 않는 허무만이 해탈이다. 하지만 우리는 계속 추하게 될 때까지 늙어가고, 또 살아갈 거다.


그런 점에서 미시마 본인은 아무리봐도 자신이 주장하는 것의 불가능함과 실패를 잘 알았던 듯 싶다. 결국 키요야키와 그의 환생들을 모두 합치면, 그것이 곧 미시마 본인이 아닐까? 사랑에 빠진 병약한 청년, 우익 사상에 극도되어, 혁명을 꿈꾸다 할복하는 청년, 신비로운 여성, 그리고 악마적 재능을 지니고 스스로의 재능을 잘 아는 청년.

그리고 이런 자들을 지켜보는 아마도 미래의 추하게 늙을 미시마 유키오인 혼다.

그 시도와 끝은 비참했지만, 어떤 의미에선 미시마는 본인의 사상과 행동이 일치되긴 했다. 바로, 실패할 것이 뻔한 혁명을 외치며 늙기 전에 배를 갈라죽는 것으로 스스로의 몰락을 완성시키고 영원불멸한 아름다움으로 남는 것.\



물론 나는 그냥 이 인간이 계속 살아서 문학이나 쓰는게 인류의 미(美)를 위해서나 본인을 위해서나 더 좋았을 거라고 확신한다.


* 영역본으로 읽었다. 언젠가 일어를 배우면 꼭 원서로도 읽어보게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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