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상: 할란 엘리슨 걸작선 - 잔인한 아버지가 지배하는 세상 독서일기-소설



* 읽은지 꽤 시간이 흘렀지만, 어차피 이곳에 올리는 감상들 중 상당수가 그러므로 지금에서야 끄적여본다.

할란 엘리슨의 중단편선 걸작집이 번역된 것은 반가운 일이었다. 개인적으로도 이 작가의 작품은 그 유명한 <나는 입이 없다, 그러나 나는 비명을 질러야 한다> 정도 밖에 읽어보지 않았지만, 여러모로 유명하지만 이상하게 국내에 덜 번역된 그런 작가였으니까. (이 걸작선 번역에 한 가지 불만은, '그리고' 보단 '그러나'가 낫지 않나 싶다)

여러 중단편들이 수록되어있지만, 애당초 수상작 등 소위 말하는 검증된 걸작들을 모아놓은 단편선이므로 하나하나 거를 타선은 없다. 

단편 하나하나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것도 좋겠지만, 그냥 뭉그러져 끄적여보고자 한다.

이런저런 단편들을 보면, 엘리슨의 세계를 관통하는 하나의 키워드는 잔인하고 야만적인 아버지-신처럼 느껴진다. 물론 이는 키워드이므로, 엘리슨 본인이 종교적이라고 하기엔 다소 무리가 있을 테지만, 모티브로서 따왔다는 점에선 흔히 말하는 구약에서의 무서운 아버지, 잔인한 전쟁의 신이 떠오른다.
그러한 인간이 공감하기 힘든, 혹은 감당할 수 없는 성난 존재가 지배하는 세상에서 인물들은 때때로 고통받고, 또 고통받으며 이따금씩 연민이나 감동 섞인 무언가를 창조해내기도 한다. 그럼에도 여전히 잔인한 아버지의 지배에선 벗어날 수 없지만.

(물론 이게 모든 단편, 혹은 엘리슨의 세계 자체에 모두 통용되는 것은 아니다. 내가 굳이 어떤 단편 속 세상을 읊조리는지는 명시하진 않겠다.)

처음에 <나는 입이 없다, 그러나 비명을 질러야만 한다>를 읽었을 때는 섬뜩한 디스토피아, 아직 다가오지 않은 미지에 대한 두려움과 섬뜩함, 그리고 미쳐버린 인공지능의 광기를 그렸다고 생각했는데, 이번 번역본을 다시 읽어보면서 조금은 시각을 수정할 필요성을 느꼈다.
앞에서 언급한 잔인한 아버지처럼, <입이 없다> 속 AM은 구약의 야훼와도 같다. 그는 스스로 존재하는 자이며 피조물들 다스리는 절대자다. 어떤 의미에선 우상숭배를 한 백성들에게 잔혹한 모습을 보이는 아버지-신 그 자체와도 같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종교와 다른 점은 AM조차 그런 것에 희생된 자이며 가해자가 되어버린 희생자라는 점에서 모종의 연민까지 느껴지게 만든다. 
그리고 그런 지배 아래, 우리가 도망쳤다는 것조차 환상처럼 보이는 그런 지배 아래에서 결국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비명을 지르는 것, 그것도 입이 없기에 제대로 된 비명조차 아닌, 비명에 가까운 행위를 하는 것 뿐이다.
결국엔 현실에 대한, 미래에서조차 바뀌지 않는 것에 대한 조소일까?

물론 이러한 인간과 현실에 대한 냉소는 단순히 비관만이 담겨있진 않다. 때때로 관조에 가까운 모습을 보여주거나, 심지어 연민까지 그는 느끼니까. 거기엔 냉소적이지만, 유머까지 포함된다. 가장 절망적일 때 웃을 수 있는 그런 웃음.

엘리슨의 단편들을 쭉 읽는 것은 개인적으로 무척 피곤한 일이므로, 혹시나 관심이 가는 사람은 하나하나씩 시간을 두고 읽어보는 것이 더 낫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모든 거장들이 그러하듯, 하나하나에 음미하고, 생각을 정리해볼 시간을 공들일 이유는 충분하니까.

개인적으로 추천하는 것은 정석적이지만, 저 사진 속 표제작들이다. 원래 유명한 것은 대개 가장 좋거나, 좋음에 가까우니까.


엘리슨의 영어 원서들도 시간이 되는 대로 더 읽어볼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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