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로베르, <부바르와 페퀴셰>/<통상관념사전> - 그들은 필경에 착수한다 독서일기-소설




익살스런 실패를 다루는 문학은 예전에도 많았고 긴 역사를 자랑하는 만큼 걸작들도 많이 낳았다. <돈키호테>나 <깡디드> 같은 소설들을 일일이 설명하지 않아도, 그 제목만 언급하는 정도로도 충분할 거다. 

<부바르와 페퀴셰>는 귀스타브 플로베르의 마지막 소설이자 미완성의 유작인데 이러한 기나긴 목록에서도 돈키호테처럼 큰 자리를 차지할 만한 그런 소설이다. 

유작인 만큼 그 구성도 상당히 기괴한데, 원래 작가의 구상에 의하면, 부바르와 페퀴셰의 이야기 끝엔 그들이 필사했을 법한 여러 텍스트들이 부록처럼 책의 2권을 차지할 예정이었다. 하지만 모든 게 미완으로 끝냈고, <통상관념사전> 정도만이 그 부록을 차지하고 있다. (책세상 문고 버전에선 따로 출판되었다) 이 기괴한 사전은 한참 전에 독립적으로 쓰인 텍스트지만, 결국 이 책의 본질적인 내용과 일맥상통하므로 같이 읽어야 한다.

아무튼 플로베르란 이름 자체는 이미 너무나도 거대하므로 설명하는 것조차 지겹다. <마담 보바리>로도 그 설명을 대신하기엔 충분할 거다. 그렇지만 플로베르는 작가였고, 스스로 고난을 자처하는 작가였으므로 엠마 보바리 이후로도 비슷한 위상을 가진 인물들을 계속 써내려갔고, 그 말미를 장식하는 것이 바로 우리의 부바르와 페퀴셰가 되시겠다.

이름조차 제대로 타이핑하기 어려운 이 두 명의 중년 사내는 필경사다. 말 그대로 글을 적는 자들이다. 마치 플로베르처럼, 그들은 자신의 직업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 하지만 둘은 우연히 친해졌고, 큰 돈이 우연히 생겨 많은 시간을 얻게 된다. 이제 한가해진 그들은 그럼 무엇을 할 것인가?

보통 사람이라면 놀고먹고, 즐기겠지만, 이미 글을 적는 저주를 받은 두 사람은 책들을 통하여 올바른 지식을 찾는 숭고한 작업을 하고자 결의한다. 제 딴엔 여생을 편하게 보내는 거라고 여기지만, 글과 책에서 벗어날 수 없는 자들이 으레 그러하듯, 제삼자, 특히 독자의 관점에선 결국 기나긴 실패의 길을 걸을 뿐이다. 그리고 그들은 실패하고, 또 실패하며 결국엔 다시 원점으로 돌아간다.

무엇보다도 읽는 이를 당혹스럽게 하는 것은 이 책이 백과사전식 소설이란 점이다. 사전처럼 쓰여 졌다는 의미가 아니다. 말 그대로 책으로 된 모든 지식을 모은 백과사전처럼 각각의 장마다 그 시대의 정보들이 쏟아진다. 물론 플로베르의 시대의 한계 상 그 정보들이 모두 정확하진 않겠지만, 굳이 그런 걸 신경 쓸 필요는 없다. 왜냐하면 그런 건 모두 무의미하니까.

부바르와 페퀴셰는 본질적으로 패배자들이고, 그들은 ‘어떤 의미론’ 멍청이들에 불과하다. 수많은 책들 사이에서 그들은 갈팡지팡하고 때론 서로 모순되는 것들을 분별할 줄 모르며 그들이 원하는 길에 도달하지 못하고 실패한다. 

그러나 그들을 탓할 순 없을 거다. 그들의 본질적인 비극은 이러한 지식의 무의미함과 인간에 대한 환멸을 가진 플로베르의 책에 등장했다는 죄 밖에 없으니까. 그들은 지성의 어리석음에 대한 풍자로서 태어났다.

그런 의미에서 당연하겠지만, 이 책은 시종일관 익살스럽다. 물론 이러한 부류를 좋아하는 사람들이겠지만, 아무튼 그러하다. 이미 돈키호테의 익살스러운 실패담이 있지만, 플로베르는 조금 더 현대, 우리의 시대와 조금 더 가까운 시대의 돈키호테들을 그린다. 

돈키호테는 미쳤지만, 부바르와 페퀴셰는 미치지 않았다는 점이 이러한 시대의 차이이자 두 책의 차이일지도 모르겠다. 물론 부바르와 페퀴셰는 차라리 미친 것이 위안이겠지만, 텍스트는 그러한 걸 확정하진 않는다. 본질적인 차이는 없지만, 그래도 유념할만한 점이다.

2인조로 구성된 주인공들, 돈키호테와 산초 판자로 대표되는 이 구성은 많은 책들이 쓰고 있고, 얼핏 부바르와 폐퀴셰도 그러해 보이지만, 본질적인 차이는 존재한다. 2인조로 된 자들은 서로 비슷하지만, 다른 기질을 지녔지만, 부바르와 폐퀴셰는 얼핏 서로 비슷한 기질을 지녔을 뿐이다. 이 점에 대해선 이미 플로베르 본인이 이 책의 부록(?)에 대신 설명을 한 것 같다.

<바보들: 당신처럼 생각하지 않는 모든 사람들> - 통상관념사전, 플로베르 

하지만 많은 익살스러운 소설이 그러하듯, 이들의 끝(?)은 비극적이다.

돈키호테가 광기에서 깨어나 죽음을 맞이하듯, 부바르와 폐퀴셰 또한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 지긋지긋한 필경 작업을 시작한다.

그리고 이야기는 끝난다. 적어도 플로베르가 구상했던 메모가 그대로 이루어졌다면. 그리고 아마도 그대로 끝났을 거다. 이후엔 그들이 필경한 텍스트들이 부록처럼 수록될 예정이었다.

마치 원을 그리는 것처럼, 결국 이들은 반복할 뿐인데, 거기엔 씁쓸함이 감돈다. 물론 엉성한 손으로 원을 계속 그리면, 매번 그 모양이 조금씩 다르듯 이들의 반복 또한 다를 것이고, 처음과 다른 점도 분명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본질적으로 원이란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어쩌면 플로베르 본인이 꿈꿨던 것처럼 ‘나선’을 그리는 행위일지도 모르지만, 이러한 점이 과연 그들에게 위안을 줄진 모르겠다. 언젠가 고도가 올 것이란 점이 기다리는 자들을 구원해주진 않으니까. 조금은 즐기고, 받아들이게 되었을지언정 그걸 ‘구원’이라고 부를 순 없을 거다.  

플로베르는 경멸하는 자들을 우스꽝스럽게 만들고 비웃기 위하여 감정을 담아 실패담을 써내려갔고, 지성에 대한 회의엔 냉소마저 깃들어있다. 이러한 허무주의자는 모든 걸 비웃고 우스꽝스럽게 만드는데 치중한다. 하지만 그런 점에서 부바르와 페퀴셰의 씁쓸한 결말은 오히려 그들에게 연민을 느끼게 만들며 어떤 의미론 그들을 순교를 받아들이는 자처럼 영웅적으로까지 만든다. 이 글의 순교자의 사소한 실수였을까, 아니면 작가조차 통제할 수 없는 텍스트의 자유로움이었을까?

하지만 플로베르를 생각하면, 이 감상 또한 사뭇 달라진다. 플로베르는 자신이 경멸할 법한 인간들을 풍자하고자 부바르와 폐퀴셰를 만들었지만, 결국 그들의 직업은 자신과 같은 글을 적는 자들이었고, 부바르와 폐퀴셰가 끝내 글에서 도망치지 못하고 다시 돌아왔듯, 플로베르 본인 또한 끝내 글을 쓰는 일에서 도망칠 수 없었다.

분명 그도 부바르와 폐퀴셰의 글을 필경하면서 그 사실을 알고 있었을 거다.


<그들은 필경에 착수한다.> - 부바르와 페퀴셰, 플로베르



*플로베르의 책들을 다시 읽어보며

덧글

  • 메치카 2018/05/29 21:56 # 삭제 답글

    와 잘롭 잘 살고 있나요 나 기억하고 있을지 ㅋㅋㅋㅋ
  • JHALOFF 2018/05/30 00:40 #

    도서갤 분 맞죠? 오랜만입니다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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