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지니아 울프 ,<막간> - 과거와 미래 사이에서 독서일기-소설




누가 버지니아 울프를 두려워하는가? 버지니아는 10점 만점의 12점인 진짜 울프!




희한하게도 버지니아 울프에 대한 감상을 하나도 쓰지 않았다는 걸 깨닫고, 이번에 <막간>을 다시 읽으면서 첫 발걸음을 옮겨보고자 한다.

울프를 좋아하는가, 싫어하는가를 묻는다면 아마도 좋아하는 쪽일 거다. 사실 좋아하지 않는 작가를 에세이집, 편지, 일기 모음집까지 굳이 모아서 소장하진 않을 테니까. 그래도 역시 애매하다.

사실 위의 문단은 장난이다. 점잖게 내빼는 척 한 거고 좋아한다.

이유야 많지만, 나 개인적으론 당연히 그녀가 좋은 모더니즘 작가라서 그렇다. 사실 그녀야말로 영국 모더니즘의 거의 유일한 선봉장이 아닌가? 전통과 역사를 자랑하는 영국 문학의 기이한 침체기는 아이러니하게도 모더니즘 시대이지 않을까?

이 시대를 대표하는 영문학 작가들은 많다. 하지만 순수한 영국인이 거기에 얼마나 있냐고 묻는다면 생각 외로 없다.

조이스? 아일랜드 술꾼이다. 버나드쇼나 예이츠, 베케트도 아일랜드 출신인 건 두말할 잔소리다.

T.S. 엘리엇? 영국인보다도 더한 영국 성공회 보수지만, 미국에서 이민 왔기에 순수한 잉글랜드와는 거리가 멀다.

에즈라 파운드는 당연히 미국 촌에서 온 이방인이었고, 캐서린 맨스필드조차 뉴질랜드 출신이며 그 밖의 많은 영국 밖의 영어를 쓰는 자들은 제외하자.

기껏해야 D.H. 로렌스나 E.M. 포스터, 버지니아 울프 정도만이 남는데, E.M. 포스터는 재미가 없으므로 제외하자. 결국 잉글랜드 모더니즘을 수호하는 작가는 로렌스와 울프, 두 사람 정도 밖에 없다.





허나 이런 식의 논리를 버지니아 본인은 매우 달가워하지 않을 거다. 그녀가 보기에 이러한 관점은 매우 위험하다. 특히 <막간>을 읽고 났다면, 이런 식의 국가관에 대한 비판을 생각할 수밖에 없다.

<막간 Between the Acts>는 버지니아 울프의 마지막 장편이자 ‘미완성’의 작품이다. 원고를 끝낸 직후 그녀가 비극적으로 목숨을 끊었기에 편집과 수정 문제가 우리에게 남아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런 건 연구자들의 문제고, 남아있는 텍스트들로 우리가 이 글을 즐기기엔 충분하다.

이야기 자체는 거의 없다. 이전의 울프의 많은 소설들처럼 하루 동안 벌어지는 ‘작은’ 일에 불과하다. 하지만 댈러웨이나 등대로 등에서 울프가 ‘개인’에 몰두했다면, 말년의 그녀는 집단에 관심을 가진다는 점이 핵심이다. 우리는 무엇을 해야하는가?

소설은 전쟁 직전의 영국 한 시골 마을에서 열리는 야외극을 다룬다. 그리고 그 야외극의 막간에 해당하는 마을에서의 가족의 삶을 다룬다.

야외극은 이 소설의 핵심이다. 사실 읽어보면 자연스럽게 알 수밖에 없다. 결국 모든 것이 이 야외극에서 나오고, 연결되며 지배하니까. 잉글랜드의 전반적인 역사를 개괄하는 이 야외극은 말 그대로 영국의 ‘찬란했던’ 과거다. 셰익스피어의 작품들의 패러디되고, ‘전원적’이다. 울프 본인의 시적인 문체가 이 소설 전반을 지배한다.

자연스레 소설 속 관객들, 혹은 막간을 지배하는 관객들은 이 야외극에서 ‘과거의 영광’을 기대하지만, 그 기대는 조금 엇나간다. 극이 막을 내리고, 남은 자들이 막간에서 읊조리는 걸 보고 있자면 우리는 자연스레 이러한 과거에 대한 그리움, 인위적으로 조장되는 집단 자체에 대해 거리를 둘 수밖에 없다. 가령 무적함대를 부수거나 인도를 착취하여 영광을 이룩한 것, 그런 과거가 현대에 되풀이되어야하는가?

시대상을 생각하면, 이러한 ‘과거에 대한 영광을 그리는 행위’에 대한 경계는 파시즘에 대한 경계를 생각하게 한다. 결국 이러한 행위가 언제 파시즘의 탈을 쓰고 우리에게 다가올지, 혹은 그 속내를 감추고 우리를 속이고 있는지, 그러한 불안이 소설 속 한 축을 담당한다.

그렇다면 현재의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며, 무엇을 할 수 있는가? ‘우리’는 무엇을 하는가?

여전히 개인들은 방황하고, 각자의 문제가 해결되지 않은 채 살아갈 수밖에 없다. 막간에서 답은 나오지 않는다.  당연할지도 모른다. 이 모든 건 고작해야 하루 동안 일어나는 일에 불과하다. 삶과 역사 속의 작은 하루.

그러나 이러한 모든 문제에 대한 답은 명확하지 않다. 어쩌면 극을 만들어가는 것은 관객의 참여이므로 관객은 극을 거부하거나 바꾸고자 노력할 수도 있을 거다. 어쩌면 그대로 짜인 각본과 극작가의 의도 아래 환호하고 울지도 모른다. 선택은 막간에서 일어난다. 어쩌면 이러한 인위적으로 조장되는 과거의 푸른 땅에 대한 그리움을 거부하고, 현재의 인간이 살아가는 이 시대와 장소가 답일지도 모른다. 

이런 점에서 울프의 후기 소설들은 하나 같이 난해하다. 한 개인으로 하여금 명확히 표현하기 어려운 인상들 속에서 우리는 찾아야한다. 그건 더 이상 댈러웨이와 같은 한 개인의 문제가 아니기에. 역사와 시간의 흐름이라는 파도 속에서 ‘우리’는 좋든, 싫든 같이 흘러갈 수밖에 없다.

그런 점에서 버지니아 울프를 두려워할 수밖에 없다.

  

여담이지만 <막간>이 원제의 번역인 것은 맞지만 조금 마음에 들지 않는다. 영제는 ‘Between the Acts’인데 ‘막간’이라고 하면 갑작스럽게 제목이 줄어든 느낌이다. 언어의 차이지만,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은 변하지 않는다. 아쉬운 점이다.


덧글

  • 2018/05/31 02:21 # 답글 비공개

    비공개 덧글입니다.
  • 2018/05/31 12:40 # 비공개

    비공개 답글입니다.
  • 2018/05/31 10:33 # 답글 비공개

    비공개 덧글입니다.
  • 2018/05/31 12:40 # 비공개

    비공개 답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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