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라리시 리스펙토르, <G.H.에 따른 수난> - 현대적 수난극 독서일기-소설



클라리시 리스펙토르는 추천하는데 구질구질한 말은 필요 없지만, <G.H.에 따른 수난>이란 이 짧은 소설을 추천하면서 덧붙이는 말은 그녀는 전혀 새로운 방식으로서 종교적인 작가란 점이다.

 

<나는 계속 보고, 또 보고 있다. 이해하기 위하여. 내가 무엇을 겪었는지 다른 누군가에게 건네주기 위하여, 그러나 누구인지 나는 모른다, 그래도 나는 그 경험과 혼자 있고 싶진 않다.> - <G.H.에 따른 수난>

 

<G.H.에 따른 수난>은 가장 특이한 형식으로, 그리고 환상적으로 쓰인 현대의 수난극이다. 익명의 여성 화자 G.H. 가 바퀴벌레 한 마리로 인하여 '두 존재'만이 대결하는 경험으로 상징되는 이 수난극은 마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못 박힘으로서 인류의 구원을 이루듯 자기 자신, 아니 만물에 대한 구원으로 막을 내린다.

밀실, 자신에 대한 의심, 바퀴벌레 한 마리의 두려움으로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한 것인가, 사실 구질구질한 설명으론 신비적인 경험을 전달하는 것은 무의미하고, 또 불가능한 일일 것이다. 그저 리스펙토르의 경험을 독자가 같이 체험하는 것 외엔.

앞서 말했듯이 이러한 수난극은 역설적으로 '종교적인 요소'를 배제한다. 바퀴벌레를 발견하는 것은 일상에서 일어날 수 있는 일이고, 그 존재에 두려움을 느끼는 것도 불안한 일상이겠지만, 그런 일상에서 누가 구원을 발견할 수 있겠는가? 하지만 리스펙토르의 세계엔, 그곳엔 오직 한 미물을 통한 익명의 화자의 내면에 대한 성찰과 신비주의적인 구원이 있다. (물론 십자가의 수난과 종교적인 수난곡이 없다는 뜻이지, 그런 걸 발견하지 못한다는 점은 아니다)

바퀴벌레와의 만남은 카프카의 변신을 생각나게 하는 체험일지 모르나, 그 양상은 다르다. 사실, 리스펙토르를 카프카 이후로 가장 위대한 유대계 작가로 부르는 상투적인 찬사 덕분에 오버랩될지도 모르지만, 잠자와 G.H.는 불행하게도 다른 존재다. 그레고르 잠자에게 구원이 없다면, 리스펙토르는 정반대의 방식으로 익명의 g.h.(포어로 일반적인 인간의 약자)에게 구원과 합일을 선사한다.

 

<내가 열광했었으니까. 나는 행복한 어둠의 폭력을 알고 있다 - 나는 악마처럼 행복하였으며, 지옥은 내 최댓값이다.> - <G.H.에 따른 수난>

 

누군가는 이 기묘한 구원에서 이야기의 부재 등을 불평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 수난극을 읽고 난다면, 그런 건 이 무대에서 거추장스럽다는 거에 동의할 거다.

 

아름다움이 누군가를 구원할 수 있다면, 이 책 또한 충분히 그러할 것이다.

 

<지옥은 내 최댓값이다.

나는 고요하고 빈틈없는 무관심의 항구 속에 온전히 있었다. 무관심한 사랑과, 무관심한 몽유와, 무관심한 고통의 항구 안에서도. 설령 내가 사랑하다하여도, 신에 대해서 나는 그가 내게 무엇을 원하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다만, 나는 알 뿐이다, 그가 나로 하여금 그와 동등한 자가 되기를 원한다는 것을, 그건 내게 있어, 내가 할 수 없는 사랑을 통하여 그와 동등해진다는 것을.> - <G.H.에 따른 수난>




(리스펙토르의 샹들리에의 영역본이 오고 있는 걸 기념하여, 몇 년만에 미루고 미루던 감상들을 하나씩 쓰기 시작한다. 리스펙토르의 소설은 국내에 한 편만 소개되었지만, 그녀의 모든 소설은 완벽하므로 맛보는데 문제는 없을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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