콘래드 (4) <나르시소스 호의 흑인> - 죽어가는 인간 프로젝트- 조지프 콘래드



<나르시소스 호의 흑인>은 조지프 콘래드의 세번째 '장편'이지만, 사실 분량으로 따지면 중편에 해당되는 작품으로 여러모로 콘래드의 세계에선 분명 중요한 계기가 된 작품으로 보인아. 우선, 기존의 두 장편 <올메이어의 어리석음>과 <섬의 추방자>에서 장편을 시도했다면, 이 세번째 작품에서 콘래드는 비로소 자신의 가장 장기가 발휘될 수 있는 중편이란 글쓰기를 찾았고, 본격적으로 성공하기 시작한다. 또한 이 작품은 콘래드의 세계에서 해양소설이란 특성을 완전히 각인시킨 작품이자 해양소설의 걸작 중 하나로 불릴만하며, 그의 초기작에선 가장 뛰어난 작품 중 하나일 거다.

허나 오늘날 이 작품은 한 가지 문제 때문에 조금은 껄끄러운 작품처럼 되어버렸다. 제목의 '흑인' 의 원제는 오늘날 가장 금기시해야할 단어 중 하나인 'n-word'로 표기되며, 작품 내에서도 자주 등장한다. 물론 콘래드가 이 작품을 출판할 당시에도 이 단어 때문에 미국판본은 '바다의 아이들'이란 제목으로 바꾸어서 출판했다고 하는데, 오늘날과는 전혀 다른 이유에서였다. 당시 미국 출판사 쪽에선 미국인이라면, 아무도 '흑인'이 주인공인 소설을 읽지 않을 것이기에 판매량을 위해서 부득이하게 바꿀 것을 제시했다니, 아이러니라면 아이러니다.

그렇다면 이 소설이 무시무시한 인종차별 소설이고, 콘래드는 인종차별주의자인가? 거기에 대해선 조금 판단을 유보해야할 것이다. 사실 이 중편의 중심 인물은 흑인 선원이고, 이 명확한 주인공이 없는 소설에서 그가 주인공에 가장 가까우며 'n-word'의 쓰임 자체가 영국식 영어에선 당시 흔하다는 걸 감안하면 인종에 관련된 내용도 거의 없다. 그가 때론 애매모호하게 표현되기도 하지만, 사실 이건 다른 인물도 마찬가지고 무엇보다 명확하게 부정적으로 나타나는 인물은 따로 있다. 물론 콘래드를 제국주의나 인종 문제에서 완전히 무결한 존재로 판단하는 것은 위험한 일일 테지만, 딱히 이 작품이 그걸 반증하는 명확한 증거라고 주장하기엔 애매해보인다. 만약 이 소설에서 문제가 되는 점이 있다면, 그런 점은 콘래드의 다른 소설에서 나타나는 것과 거의 비슷하므로, 만약 당신이 콘래드를 읽는데 큰 거부감이 없다면, 이 소설도 큰 문제는 없을 거다. (허클베리 핀을 생각해보자)

아무튼 이 소설은 콘래드 본인이 직접 선원으로 일했었던 나르시소스 호를 모티브로, 무역선 나르시소스 호가 인도에서 영국으로 귀환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그러나 정작 상당수 독자들은 이 소설이 사건적인 의미에서 굉장히 정적이라고 느낄 거다. 그저 묵묵히 바다를 항해나는 것처럼 이 배는 그러한 항해에 관한 소설이다.
그러나 바다라는 고립된 공간은 때때로 폭풍이 오거나, 고요함을 보여주며 인간의 내면을 반영하는데, 그런 의식적인 공간 속에서 나르시소스 호의 선원들을 사로잡는 것은 역시나 같은 선원이자 서인도 제도 출신의 흑인 제임스 웨이트다.  배를 탔지만 그는 사실 일할 수 없는 자다. 그는 죽어가는 자이며 다른 이들이 보기에도 그가 죽어가고 있다는 걸 알 수 있다. 그러나 그는 배에서 내릴 수 없다. 자연스레 그를 둘러싼 인간군상은 그에게 영향을 받으면서 죽어가는 약자이자 다 함께 일해야 살 수 있는 야성의 공간에서 도태되는 약자를 어떻게 대해야할지 도덕적 갈등을 겪는다. 'Wait'라는 그의 이름처럼 그라는 존재는 마치 사람의 항해를 멈추며 시험하는 존재와도 같다.
자연스레 그를 둘러싸고 바다에서의 규율을 중시하며 무시하는 늙은 부류나 그를 동정하고 그를 위해 더욱 음식을 주거나, 혹은 폭풍우에서 목숨을 걸고 구해주는 부류 등 작은 사회는 나뉘고, 또 그들 각자 내면의 갈등을 겪게 된다. 이는 비단 선원 뿐만 아니라, 제임스 웨이트 본인도 마찬가지다. 그는 홀로 상징으로만 남지 않는다. 이는 이 소설 속 모든 것과 마찬가지다. 그들 모두 각각 어떤 상징이 되면서 인물이 된다.
이 죽어가는 자 또한 그런 도덕적인 시련을 겪는다. 모든 콘래드의 주인공들이 그러하듯, 그는 패배자다. 그는 죽을 수밖에 없다. 그의 병은 피할 수 없다. 그렇기에 그는 자신의 상황을 오히려 이용하기도 하면서 죄책감을 느끼거나, 혹은 사실 병이 거짓말이라고 죽음에서 도피하고, 스스로를 속이고자 한다. 바다라는 공간은 그러한 시련 속에서 인간의 날 것을 그대로 들어내게 만들고, 또 변화하게 만드는 그런 공간이다. 마치 수면의 자신의 모습에 홀린 나르키소스처럼, 나르시소스 호의 선원들, 웨이트 본인을 포함한 모든 이들 또한 이 죽어가는 선원에게 홀려버린다.  
하지만 웨이트를 포함하여 이 선원들에게 불운한 점이 있다면, 그들은 어떤 영웅적인 세계가 아니라, 콘래드의 세계에서 태어났다는 점이다. 콘래드의 세계는 본질적으로 그다지 긍정적이지 못하다. 마치 폴란드 이민자 출신인 자신의 정체성에 불안을 느끼듯, 콘래드에게 있어 이곳은 패배하는 곳이고, 시험과 갈등 끝에 추한 모습을 보이면서 살아가는 곳이다. 

죽어가는 자가 죽고, 항해가 끝나고, 선원들이 육지에 내려도, 결국 그들 중 누구 하나 다시는 볼 수 없는 그런 곳. 그곳이 콘래드의 바다이며 이 작품을 시작으로 웨이트는 여러 이름으로, 말로우나 커츠, 혹은 짐 등으로 다시 태어날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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