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M. 쿳시 (2) <페테르부르크의 대가> - 다시 쓰는 악령 독서일기-소설



<페테르부르크의 대가>는 남아공을 배경으로 하는 쿳시의 대표작들과는 달리, 러시아 페테르부르크를 배경으로 하는 소설이다. 이 소설의 주인공은 누구나 아는 작가 도스토예프스키이며 이 소설은 그 자체로 도스토예프스키의 세계에 대한 소설이기도 하다. 현대의 거장은 과거의 거장을 주인공 삼아 과거의 세계를 재구성하며 오늘날의 세계를 만들어낸다.

물론 이 소설은 '소설'이므로 이 이야기 속에 나오는 거의 모든 것은 전적으로 허구다. 도스토예프스키에게 첫번째 아내로부터 얻은 양아들이 있었음은 사실이나, 실제 그의 양아들 파벨 이사예프는 도스토예프스키 사후에도 살아있었으므로 이 소설 속에 묘사되는 그의 죽음과 그에 엃힌 사건 자체는 전적으로 허구다. 물론 이를 이 소설을 읽는데 굳이 세세하게 가릴 필요는 없을 것이다. 

소설은 자신의 양아들 파벨의 갑작스런 죽음으로 외국에서 페테르부르크로 돌아온 도스토예프스키의 이야기이다. 말 그대로 페테르부르크로 돌아온 이 대가는 자신의 양아들을 둘러싼 석연치 않은 진실과 마주하며 이야기는 진행되는데, 그 진실의 이름은 '악령'이자 네차예프다.

그렇다, 네차예프다. 도스토예프스키를 좋아하는 독자라면 이 이름을 알아챌 것이다. 그는 과격한 러시아 무정부주의자이자 테러리스트였고, 자신의 모임에 반발한 이를 살해 후 암매장한 것으로 일대 스캔들을 일으킨 인물이다. 그러나 이러한 러시아의 한 사건은 보다 이 페테르부르크의 대가와 밀접하게 연관되는데, 도스토예프스키는 이 사건과 네차예프로부터 그의 거대한 비극 <악령>을 썼기 때문이다.

자연스럽게 이 소설은 이러한 네차예프와 도스토예프스키의 가상의 만남을 통하여 어떻게 이 페테르부르크의 대가가 <악령>이란 형이상학적 비극을 쓰게 되었는지에 관한 이야기가 된다. 쿳시가 묘사하는 도스토예프스키는 물론 실제 도스토예프스키와는 거리가 있다. 그는 역사속 도스토예프스키보단 쿳시의 소설 주인공으로서, 나약한 지식인 남성으로 그려진다. 

이 소설이 무엇보다 놀라운 것은 한 슬라브 극우의 정치적 프로파간다이자 형이상학적 비극에서 나타나는 거대한 사상의 환영과 폭력성을 재현하고, 이를 현대적으로 변주한데 있다. 작중 도스토예프스키는 네차예프와 네차예프주의를 이론이 아닌 악령과 같은 존재, 감정으로 움직이는 환영으로 마주하며 그 본질을 꿰뚫으면서도 그저 도시의 방화를 지켜볼 수밖에 없는 지식인이다. 무엇보다 그는 양아들의 죽음에 갈등하고 고뇌하는 나약한 인간이며 결국엔 그가 할 수 있는 것은 펜을 들어 <악령>을 써내려가는 일에 불과하다.

이 거대하고 정교한 소설은 무엇보다도 도스토예프스키를 좋아하는 이에겐 커다란 선물일 거다. 곳곳에서 패러디되는 도스토예프스키의 소설 속 장면들, 죄와 벌을 연상케하는 심문 장면이나 악령 속 여러 장면들, 혹은 찌혼의 암자에서와 같은 거대한 대화들, 그리고 <악령> 속 인물들을 이용하여 소설 속 현실에 재현한 이들 등 어떤 의미에선 도스토예프스키에 대한 애정 어린 팬픽과도 같다.

물론 이 소설이 단순히 도스토예프스키 애독자들만을 위한 소설은 아니다. 앞서 말했듯 네차예프주의와 도스토예프스키의 대립은 그 자체로도 <악령>과는 독립적인 형이상학적인 비극을 완성한다. 그리고 거기에서의 지식인의 고뇌이자 나약한 인간의 좌절 등 감히 말하건데 실제 도스토예프스키의 존재가 잊혀져도 이 소설 자체는 그대로 남아있을 수 있다.

이러한 쿳시의 대작들을 보면 그의 정교한 솜씨에 혀를 찰 수밖에 없다. 분명 그는 현존하는 거장 중 하나이며 아직 좀 더 그의 작품을 읽을 수 있을 거란 희망은 우리에겐 커다란 축복일 거다.


* 물론 이 소설을 즐기기 위해 <악령>을 읽어보는 것을 추천한다. 더불어 네차예프에 관한 전기 등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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