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수아, <뱀과 물> - 눈 아이가 되기, 되지 않기 독서일기-소설




장편소설과 단편집은 모두 제각기 읽는 방법이 다를 수밖에 없다. 같은 분량이라도, 장편의 경우 한 이야기를 읽는 반면, 단편집은 여러 이야기의 집합이기에 자연스레 그 독법을 고민할 수밖에 없다. 작가의 의사와 관계없는 모음집이나 단편전집과 달리, 작가의 의사가 개입되었을 단편집을 읽을 때는 분명 우리는 생각해봐야한다. 이 한 권의 이야기들을 제각기 다른 이야기들로 볼 것인가, 아니면 하나의 세계를 구성하는 요소들로 볼 것인가?

배수아 작가의 단편집 <뱀과 물>은 한 무대를 구성하는 7편의 요소들로 봐야할 것이다. 마치 같은 주제 아래 변주처럼, 7편의 단편들은 제각기 다른 색을 띄면서도 공통되어 보이는 요소들을 공유한다.

처음 본 세상은 연극 무대와 같았다 - <도둑자매>, p. 149

한 무대 위에서 이 일곱 개의 이야기들은 각기 다른 모습을 뽐내고 있는 것이다.

사실 배수아 작가는 국내 작가 중에서 난해(?)하기로도 유명한 작가라 그녀를 읽는 것은 조금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다. 그러나 그건 조금 더 음미하며 읽는 즐거움이란 말이 될 수도 있다. 물론 읽기를 좋아하지 않는 자라면, 조금 돌아가야 할지도 모르겠다. 

이 이야기들이 어떤 이야기들인지, 그 줄거리를 이야기하는 것은 사실 무의미하다. 배수아의 세계는 이야기의 전개를 보기보단 장면들로부터 인상을 받는 것에 가깝다. 무엇보다도 <뱀과 물>의 세계는 몽환적이고 기억을 되살리는 것에 가깝다. 

그럼에도 무의미한 요약을 간략하게 우선 해보고자 한다.

첫 번째 이야기인 <눈 속에서 불타기 전 아이는 어떤 꿈을 꾸었나>는 유원지에서 아버지를 잃어버려 스카타이 무덤으로 아버지를 찾아 떠나는 소녀의 여정에 관한 단편이다.
<얼이에 대해서> 또한 어린 시절 얼이에 관한 한 소녀의 회상이며 <1979>는 1979년 한 교사와 리유진이라는 소녀의 이야기, <노인 율라에서>는 <눈 속에서->와 마찬가지로 아버지를 찾아 흉노의 땅으로 온 소녀의 이야기이며 <도둑 자매>는 자매의 이야기, <뱀과 물>은 과거의 사라진 기억과 마주하는 연극에 관한 이야기, 마지막으로 <기차가 내 위를 지나갈 때>는  여성의 날, 할머니의 추억과 마주하는 한 여성의 이야기이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직접 그 장면들을 직관적으로 받아들이지 않는 이상 무의미한 요약들이다. 그러면서도 자연스럽게 혼란스러울 수밖에 없다. 직관으로 받아들여야하는 이 이야기들은 그럼 어떻게 받아들일 것이며 무엇에 관한 이야기들인가?

무엇보다 주목하고 싶은 점은, 각각의 이야기들 모두 주인공이자 그에 준하는 이들이 끝없이 말을 하고, 이야기를 한다는 점이다. 그들은 늘 이야기할 것을 요구받는다.

"그러면 네 어머니는 어디에 있는 거지?" - <눈 속에서 불타기 전 아이는 어떤 꿈을 꾸었나>, p. 25
“얼이에 대해 말해봐” - <얼이에 대하여>, p. 37
"그런데 …… 리우진이 누구지?" - <1979>, p. 97
"네 아버지가 누군데?" - <노인 율라에서>, p. 129

아버지를 잃어버린 소녀는 아버지가 누구인지, 어머니는 어디 계신지 질문 받는다. 얼이에 대하여 이야기를 하라고 요구받거나, 리우진이 누구인지, 남자인지 여자인지 분명히 하기 위하여 또 다시 질문 받는다. 

이러한 질문과 그에 대한 이야기는 어떤 의미에선 자신이 누구인지를 확인하기 위한 작업에 가깝다. ‘나’의 뿌리가 무엇인지, 적어도 사회적인 관점에선 가장 확실할 그런 질문들. 그러나 <뱀과 물> 속 세상의 소녀들은 대체적으로 그러한 뿌리가 없거나 무의미한 자들이다. 그녀들의 아버지는 사라지고 어머니란 존재 자체는 없거나, 모르거나, 혹은 아예 기피 받는 그런 존재들이다. 때때로 그러한 소녀들이 사라지기도 한다. 그곳에 남는 것은 그런 사라진 자들을 생각하고, 대신 이야기하는 존재들이다.

무엇보다도 주목하고 싶은 것은 작가가 변주처럼 공통적으로 사용하는 단편들 속 키워드들이다. <눈 속에서 불타기 전 아이는 어떤 꿈을 꾸었나>/<노인 율라에서>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하는 스키타이족의 무덤이나 흉노족, 그리고 그러한 유목민들의 마술사들. 혹은 <얼이에 대해서> 속 반두족의 왕인 아버지란 존재나 <기차가 내 위를 지나갈 때>에 등장하는 반두어.

스키타이나 흉노 모두 역사적으론 야만족처럼 취급받는 자들이었다. 고대 희랍인들은 자신과 다른 말을 쓰는 스키타이를 ‘바르바로이’로 나누었으며, 중국인들은 중원 밖에 사는 흉노를 ‘오랑캐’로 분류하였다. 이러한 문명/야만인의 이분법은 얼핏 이야기 속에서도 등장한다. 가령, 흉노와 맞서 싸우고 있는 <노인 율라에서>의 ‘아버지’와 그 병사들처럼.

그러나 무엇보다 중요한 점은 배수아의 세계에서 주체가 되는 소녀들은 그러한 이분법을 무너뜨리는 존재들이다. 흉노의 이름인 ‘눈 아이’란 이름을 가지거나 흉노 마술사 어머니 밑에서 태어난 딸처럼, 그들은 이분법의 경계에 있는 존재들이다. 

이러한 경계를 허무는 행위는 다양하게 나타난다. 

"더 이상 사내아이 흉내를 낼 필요도 없어." - <얼이에 대하여>, p. 76
“여자아이로 살아도 좋단다” - <노인 율라에서>, p. 146

소녀들은 소년으로 살다가 소녀가 되는 자들이다. 소년/소녀의 경계가 허물어지기도 한다. 때론 나와 너의 경계가 허물어지기도 한다.

"그것참 신기하구나." 경찰관은 새삼스럽게 내 얼굴을 빤히 쳐다보았다. "내 딸 이름도 눈 아이 였는데." - <눈 속에서 불타기 전 아이는 어떤 꿈을 꾸었나>, p. 18

무엇보다도 삶과 죽음의 경계가 무너지는 것이 핵심일지도 모른다.

"나는 정말로 죽은 줄 알았지. 그런데 이렇게 살아 있었구나." - <도둑자매>, p. 158

이러한 삶/죽음의 경계선에 관한 묘사는 이 단편집의 표제작인 <뱀과 물>에서 더욱 자세하게 나타난다. 소설 속 내가 보는 터너의 그림 <The Cave of Despair>를 생각해보면 더더욱 그러하다.

터너의 그림은 스펜서의 <요정 여왕>의 한 장면을 그린 그림인데, 그 장면은 ‘절망’이 사는 동굴을 그리고 있다. ‘절망’은 사람들을 유혹하며 스스로 목숨을 끊을 것을 청한다. 이에 사람들은 절망하며 그 말을 따른다. 삶을 사는 것은 너무나도 힘들고 절망적인 일이기에 죽음으로서 고통과 절망에서 벗어나란 유혹이다. 

하지만 이런 유혹을 받는 기사는 절망을 물리치며 그 그림을 보는 나 또한 계속 살아있다. 물론 과거 속 나는 이미 없기에 죽었을지도 모른다. 현재 속에 죽음과 삶이 공존하는 것이다. 

사람과 사람을 이어주는 것은 죽음의 전언만이 유일한 때가 곧 오리라는 사실을 아직은 전혀 알지 못하면서도 - <1979>, p. 115

내가 없는 1972년 여름 어느 하루는 존재했을 것인가? 모든 것이 시작과 동시에 늙었고, 살기도 전에 너무도 오래되었던 어느 날 나는 - <뱀과 물>, p. 192

무엇보다도 <뱀과 물> 속 나는 내가 기억하지 못하는, 어떤 의미에서 존재하지 않는 과거, 죽은 과거를 생각하며 고뇌한다. 그러나 이는 비단 <뱀과 물>의 문제만이 아니다. 이 단편집의 세계는 1979년의 과거이든, 어린 시절이든 모두 과거의 이야기를 회상하는 것에 가깝다. 지금은 다시 거기 없는 무언가를 이야기한다.

거기엔 내가 애써 잊은 악몽도 존재하며, 슬픈 이별이나 기이했던 일들, 혹은 절망의 동굴에 갇힌 것과 같은 일들도 있다. 때론 소녀가 소년이었을 때의 일이나 힘든 진실을 알기 이전의 순진할 때의 추억도 있다.

이 무대 위의 이야기들이 몽환적이고 어딘가 비현실적인 것처럼 보이는 것은 당연하다. 이 모든 것은 누군가의 사라진 과거이자 기억이며 이야기니까.

여기엔 회의적인 시선도 물론 섞여 있다.

"어린 시절은 망상이에요. 자신이 어린 시절을 가졌다는 믿음은 망상이에요. 우리는 이미 성인인 채로 언제나 바로 조금 전에 태어나 지금 이 순간을 살 뿐이니까요.
그러므로 모든 기억은 망상이에요. 모든 미래도 망상이 될 거예요. 어린아이들은 모두 우리의 망상 속에서 누런 개처럼 돌아다니는 유령입니다." - <1979>, p. 94

만일 그것이 정말로 일어났다면, 모든 기억은 이토록 생생할 리가 없다. - <도둑자매>, p 188

어째서 그녀들은 과거와, 어린 시절에 대해서 절망하는 것일까? 어째서 지나간 과거를 애초부터 없었던 일로 치부하는 걸까? 그들은 마치 유년시절과 과거를 꿈꾸고 있는 듯하다. 그러나 그러한 꿈조차 아름답게 미화되진 않는다. 오히려 때때론 그러한 꿈은 상대방에 의해 냉소의 대상이 된다.

"이제 꿈이 시작되는 건가요?"
"바보 같은 소리 하지 마라."
- <눈 속에서 불타기 전 아이는 어떤 꿈을 꾸었나>, p. 31

이분법이 무너진 세상 속에서, 삶과 죽음의 경계가 허물어지고, 너와 내가 하나가 되며, 과거의 내가 눈 아이가 되고, 내가 흉노 마술사이자 리유진이 되는 꿈속에서, 그럼 우리는 이 무대에서 어떤 인상을 가져야하는 걸까? 마냥, 절망이 유혹하는 동굴에서처럼, 삶과 이야기에 대한 절망일까?

그러나 그 실마리는 역시 그러한 절망을 주는 이야기 속에서 동시에 찾을 수 있을 거 같다. 

"꿈은 우리를 해치나요?"
"꿈은," 여승은 담배를 바닥에 던지고 발로 문질러 껐다. 
"꿈은 글과 마찬가지로 직관의 일종이야." 
- <뱀과 물>, p. 203

놀랍게도, 우리의 경험이란, 사실 우리의 직관이 눈에 보이는 형체를 입고 나타나는 것에 불과합니다. - <기차가 내 위를 지나갈 때>, p.266

미약한 결론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렇기에 우리는 계속 읽고, 또 누군가는 쓰고 있을지도 모른다. 우리의 슬픈 꿈처럼, 글처럼 읽고, 쓰며 우리는 스키타이 족의 무덤을 찾아 떠나게 된다. 우리가 누구인지 끝없이 질문 받으며 그에 대한 대답을 포기하지 않으면서도. 왜냐하면

"말이란 신비하니까요."  - <기차가 내 위를 지나갈 때>, p. 265

꼭 이야기를 직접 쓰거나 말할 필요도 없을지도 모른다. 그저 누군가의 이야기를 대신 전해주는 이가 되어도 상관없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너는 아마도 훌륭한 우체국 직원이 될 거다." - <뱀과 물>, p. 205

이러한 없을지도 모를 과거의 이야기와 마주하는 독자들은 다시 본질적인 질문을 품을 수밖에 없다. 물론 여기에 이야기로 답해주는 이는 없다. 우리의 눈앞엔 <뱀과 물>이란 종이와 활자로 된 침묵하는 책 한 권만이 있으니까. 그러나 우리의 의문에 대한 답을 주진 않을지라도, 어쩌면 그 의문을 그대로 품고 있을지 모르겠다.

기차가 내 위를 지나갈 때 내가 느끼는 것을
지금 그도 느끼고 있을까?
- 기차가 내 위를 지나갈 때,268

결국 본질적인 문제는 이거일지도 모르겠다. ‘눈 아이’인 나와 ‘눈 아이’인 소녀는 같은 걸 느끼고 있을까? 과거의 내가 느꼈던 것을 현재의 나도 그대로 느끼고 있는가? 나와 너가, 나와 흉노 소녀와 마술사가 같을 수 있을까? 내가 나일 수 있을까?

“아, 내가 모든 사람과 모든 곳이 될 수만 있다면!”
- 페르난두 페소아(알바루 데 캄푸스), <승리의 송가> 中

이러한 의문은 언제나 있어왔다. 그러나 진부하기에 결코 진부하지 않은 그런 의문이다. 그러한 질문에 답하기 위하여 나와 소녀 모두 눈 아이란 이름을 가지게 되며, 내가 곧 흉노 마술사인 어머니처럼 되고, 과거의 내가 현재의 나와 만나며 나는 죽고, 또 삶을 살게 된다. 그렇게 우리는 <뱀과 물> 속 세계와 마주하게 된다. 

사실 답을 찾지 않아도 좋다. 그게 그저 사라질 희미한 인상이 되고, 사라질 글쓰기가 되어도 좋다. 언제가 깨어날 꿈이 되어도 좋다. 하지만 과거가 될 내가 그러한 직관을 한순간이나마 품게 된다면, 글을 쓴 이나, 읽는 이나 모두 성공할지도 모르겠다. 모든 읽기엔 제각각 그 즐거움이 있다. 배수아의 글도 마찬가지다. 왜냐하면 ―

"말이란 신비하니까요."  - <기차가 내 위를 지나갈 때>, p. 265

덧글

  • 2018/10/04 14:20 # 답글 비공개

    비공개 덧글입니다.
  • 2018/10/04 20:01 # 비공개

    비공개 답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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