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먼 멜빌 (2) <모비딕, 혹은 고래> - 나는 그저 배를 탄다 프로젝트 - 허먼 멜빌




<날 이스마엘이라 부르라. Cal me Ishmael>

<모비딕, 혹은 고래>

이 괴물 같은 작품은 말 그대로 작가였던 멜빌 본인 조차도 파멸로 몰아넣은 괴물 같은 녀석이지만, 우리는 여전히 모비딕에 대해 명확한 답을 내릴 순 없을 거다.
피쿼드 호를 미국의 상징으로 해석할 수도 있을 거다, 그런 해석이 실제로 많기도 하니까. 우연치 않게도 피쿼드 호의 선원의 숫자가 당시 미국의 주 숫자와 일치한다는 사실이나 다양한 국적으로 구성되었다는 사실은 이 모든 걸 멜빌의 세계에서의 아메리카로 볼 수도 있을 것이며 에이허브를 그러한 미국을 이끄는 지도자로 볼 수도 있을 거다. 혹은 고래에 관한 자연적인 소설이나 형이상학적인 투쟁으로 볼 수도 있을 거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경악스러운 것은 그저 평범한 모험소설이자 해양소설이 될 수도 있었을 이 책이 고래와 인간의 싸움을 형이상학적 투쟁으로 바꾸어버린다는 점에 있을 거다.

<날 이스마엘이라 부르라. Cal me Ishmael>
영문학에서 가장 유명한 첫문장 중 하나인 이 문장은, 스스로를 추방된 자로 부르는 한 '잘못된 고아'의 회고록임을 알려주며시작된다. 이스마엘, 혹은 에이허브나 피쿼드의 모든 선원들, 그리고 멜빌의 고뇌는 대체 무엇일까?
배를 타는 것은 일종의 자살과도 같은 행위로 모비딕은 첫 장에서부터 묘사한다. 안식이 있는 뭍이 아닌, 떠돌아다니는 바다로 나가는 행위.

<입가가 일그러지는 걸 깨달을 때, 내 영혼이 축축하고 비 내리는 11월이 될 때, 관 파는 가게 앞에 나도 모르게 발걸음을 멈추고 만나는 장례 행렬마다 그 끝을 쫓을 때, 무엇보다도 길가로 달려나가 지나가는 이의 모자를 보는 족족 후려쳐 시비를 걸고 싶은 충동을 도덕심으로 강하게 자제할 때, 그럴 때 나는 가능한 빨리 바다로 가야할 때가 되었다는 걸 깨닫는다. 그게 내겐 권총과 총알을 대신한다. 철학적인 수사 속에서 카토는 칼 위로 자신을 던졌다. 나는 그저 배를 탄다.>

이스마엘로 시작하여 바다로 나가는 자신의 선택을 일종의 자살 행위로 묘사하는 이 대목은 가장 멋진 도입부 중 하나일 거다. 무엇보다도 모비딕의 고뇌를 제일 잘 드러나는 장면 중 하나다. 스스로 목숨을 중단하는 걸 미덕으로 여긴 로마인들과 달리, 기독교적 세계관에서 자살이 금기시되는 세계에선 추방된 자조차 그러한 금기를 지킨다. 그러나 뭍에서 생육하고 번성하는 것과 달리, 추방된 자는 바다로 향하여 죽음과 대면한다. 그리하여 이스마엘이 된 이방인은 배를 타고, 피쿼드 호의 부분이 되며 에이허브가 되고, 흰 고래와 장대한 투쟁을 시작한다.

이스마엘이든, 에이허브든, 멜빌이든, 그는 본질적으로 패배자였고, 고뇌하는 자였으며 투쟁하는 자였다. 이는 모두 같은 말이다. 멜빌에게 있어 고뇌는 곧 투쟁이며 이는 곧 패배로 이어졌다. 시대적인 그의 가장 큰 고뇌는 역시나 종교적인 회의였을 것이다. 자살을 하지 않으면서도 편법을 사용하는 기독교인처럼, 멜빌의 세계는 이러한 믿음에 고뇌하는 이의 투쟁을 밑바탕으로 한다.
<모비딕>에서 가장 유명한 대목 중 하나이자 에이허브가 자신의 포부를 밝히는 대목에선 이러한 투쟁이 무엇보다도 잘 나타난다.

<"우둔한 짐승에게 복수라니!" 스타벅이 외쳤다. "놈은 그저 눈먼 본능으로 당신을 쳤을 뿐이요! 미친 짓이야! 에이허브 선장, 우둔한 것에게 분노하는 것은 감히 신성모독으로 보이요.">

모비딕을 향한 에이허브와 멜빌의 증오와 투쟁은 당연한 섭리에 대한 반란이자 신성모독이며 보이지 않는 투쟁으로 나타난다. 멜빌은 에이허브의 입을 빌어 자신의 고뇌에 대해, 그리고 자신의 증오를 연설한다.

<모든 보이는 사물들은, 이 사람아, 그저 마분지 가면에 불과해. 하지만 일어나는 일들 속엔, 그 살아 숨쉬는 움직임 속엔 의심할 수 없는 행위가 있지.  거기엔 알려지지 않았지만 분명 계획된 존재가 자신의 형태를 무심한 가면 뒤에서 뽐내고 있어. 만약 인간이 쳐부순다면, 그 가면 너머를 부셔야해! 벽을 뚫고 가는 것 외에 죄수가 어찌 자유로워질 수 있겠는가? 내겐 그 흰 고래가 바로 날 뭉개는 벽이야, 어떨 때엔 그 너머에 아무 것도 없지 않을까 싶지. 하지만 됐어. 그가 나를 고되게 만들어, 그가 나를 짇밟고 있어. 난 그놈 속에서 알 수 없는 악의가 온 힘을 다하고 있는 터무니없는 힘을 볼 수 있어. 그 알 수 없을 것이야말로 내가 증오하는 것이야. 그 흰 고래가 그것의 대리인이든 그 자체든 난 그놈에게 내 증오를 퍼부울 거야. 내게 신성모독을 말하지 말게, 이 사람아. 날 모욕한다면, 태양이라도 부술 테니까. 태양에게도 그럴 수 있다면, 다른 것도 마찬가지겠지.>

보이지 않지만, 너머에서 우리에게 관여하는 힘에 관한 투쟁. 이러한 형이상학적 투쟁이 곧 모비딕의 본질이 되며, 그저 고래와 포경선에 관한 해양소설을 멜빌은 순식간에 인간의 형이상학적 투쟁으로 바꾸는 괴물로 바꾸어버린다. 무엇보다도 에이허브라는 이 반란자이자 프로메테우스는 희망차게 선언한다.

<누가 내 위에 있는가? 진리엔 한계가 없다!>


<그리고 하나님께선 거대한 고래들을 만드셨다> - 창세기 (KJV 기준)

이러한 보이지 않는 힘, 혹은 신이나 그 대리인, 그것도 아니면 그저 불합리함 자체를 향한 도전은 다소 모순적으로 나타난다. 이러한 모습이야말로 모비딕아란 괴물이 더욱 우리를 혼란 속에 빠뜨린다. 멜빌은 끝없이 당시 기준으로 고래에 관한 모든 것을 서술한다. 반쯤은 고래를 향한 애정어린 백과사전이라고 부를 만큼 모비딕은 '고래'에 대해 알고자 하며, 탐구하고자 하고 무엇보다도 그걸 알 수 있을 거라 믿는다.
그러나 그 반대편엔 역시나 흰 고래가 자리잡는다. 에이허브를 부순 것처럼, 읽는 독자로 하여금 모든 것을 의문으로 남긴 채 그저 부술 뿐인 그러한 흰 고래가.
멜빌 본인조차도 모든 걸 의문으로 남겨두었을 뿐이다. 그저 레이첼, 혹은 라헬은 자신의 아이들 대신, 길 잃은 고아를 건져내었을 뿐이다.
그는 자신의 신화를 만들어내는데엔 성공했다. 모비딕은 미국 문학이 낳은 가장 괴물 같은 책으로 남을 것이며 아마도 <미들마치>와 더불어 가장 위대한 영어소설로 남을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명성을 멜빌은 결코 알지 못할 거다. 이미 멜빌 본인조차 이 책이 자신을 집어삼키고, 패배로 몰아넣을 책이란 걸 직감했으며 동료들에게 호소하기도 하였으니까.
그러나 에이허브, 혹은 멜빌은 자신이 패배할 것을 알았고, 투쟁할 것을 알았으며 그걸 받아들여서 패배하고 사라진다.

물론 <모비딕>은 거대한 괴물이므로 여기 적힌 면은 이 거대한 책의 극히 부분에 불과하다. 각각의 선원들의 이야기나 모비딕 속 멜빌이 그리는 아메리카의 모습 등 누군가는 이미 그런 걸 이야기하고, 또 이야기할 것이다. 그나마 가장 확실한 것, 마분지 가면 너머를 부수려는 주먹질을 하는 것은 바다에 나가는 것처럼 이 괴물과 만나는 것일 거다.



p.s. 사실 <미들마치>와 <모비딕>의 대결은 아무리 봐도 영미의 자존심 싸움에 가까울 거다. 둘 중 어느 게 '더' 위대한 영어 소설인가>? 그 답은 대게 답하는 이의 국적에 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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