앤 카슨, <빨강의 자서전> 독서일기-시



<빨강의 자서전>은 오늘날 앤 카슨의 대표작으로 인식된 작품이다. 물론 앤 카슨은 아직 살아있고, 미래에 그녀의 작품군에 대한 평가에 변화가 생겨서 다른 작품이 대표작으로 재인식되거나, 이 작품이 오히려 잊혀지는 가능성도 무시할 순 없지만, 어찌되었든 아직 살아있는 우리에게 있어 앤 카슨의 대표작이라고 봐도 무방하다, 마치 과거와 미래 사이의 현재를 다루는 이 시처럼.

'시-소설'이란 명칭만큼, 사실 이 작품은 조금은 어중간한 위치에 놓여있다. 시라고 하기엔 소설에 가깝고, 소설이라고 하기엔 시에 가깝다. 물론 이는 앤 카슨에게 익숙해져야하는 독자의 몫이다. 앞서 말했듯 카슨은 무언가 한 가지 틀에 쓰기 보단 이리저리 뒤섞는 작가 쪽이다.

<빨강의 자서전>은 앤 카슨의 본업이기도 한 희랍 문학에 대한 그녀의 비평으로 시작된다. 그녀의 관심사는 희랍 서정시인이었던 스테시코로스의 작품군과 그의 작품 중에서도 헤라클레스와 게리온을 다룬 서정시다.
호메로스나 헤시오도스가 명사와 동사를 '만든 자'였다면, 카슨이 평가하는 스테시코로스는 '형용사'를 거기에 덧붙인 자다. 번역-연구자답게, 그녀는 형용사의 희랍어적 어원에 주목하며 '형용사'가 덧붙인 존재란 점에 주목한다.
거기에 그녀의 관심을 끄는 것은 게리온에 관한 스테시코로스의 파편 모음이다. (거의 모든 희랍 시인들이 그러하듯, 스테시코로스 또한 파편 모음집만이 전해진다)
헤라클레스의 12 과업 중 하나인 게리온의 소떼를 훔치는 이 과업을 스테시코로스는 노래했지만, 기이하게도 영웅이었던 헤라클레스가 아닌, 게리온의 시점에서 노래하였다. 붉은 괴물 게리온에 관한 스테시코로스의 노래와 덧붙여진 존재인 형용사. 이러한 소재를 밑바탕으로 카슨은 자신의 스테코로스-론을 마친 후 자신의 게리온에 관한 서사시를 재창작하기 시작한다. 말 그대로 붉은 괴물이 서술하는 자서전, 빨강의 자서전이다.

이러한 신화의 재창작은 두 부류로 나뉜다. 그 시대를 배경으로 다시 들려주든가, 아니면 아예 모든 걸 바꾸든가. 카슨은 후자다. 게리온이라 이름 붙인 한 날개 달린 소년의 성장소설이라고 볼 수 있는 이 시-소설은 희랍 세계의 괴물과 영웅의 투쟁기와는 다르다. 물론 카슨은 모든 경계를 무너뜨린다. 게리온이란 소년이 적는 자신의 자서전은 스테시코로스의 시 그 자체이면서도 그는 독일 철학을 공부하고, 작가를 꿈꾸며 우정과 사랑에 고뇌하기도 하는 그런 현대의 인간이다.
이 작품의 묘미는 그러한 혼돈에 있다. 한 예술가의 전통적인 성장 소설이면서도 동시에 희랍문학론이며 스테시코로스에 관한 이야기이거나 (카슨이 오버랩하는) 거트루드 스타인의 목소리를 내는 스테시코로스-카슨의 인터뷰이기도 하다. 그녀가 여러 작품에 걸쳐 집중하는 시간(혹은 시기, 시대)에 관한 글일지도 모른다. 말 그대로 덧붙여진 존재, 전통이 아닌 이질적인 존재가 서술하는 자서전, 그것이 바로 <빨강의 자서전>이다.

물론 책 자체로도 충분히 즐길 수 있다. 하지만 조금 더 이 시-소설을 깊게 즐기고 싶다면, 스테시코로스의 시를 읽거나(카슨 본인이 번역 일부를 수록하기도 하지만) 카슨이 '언어'를 다루는 측면에서 오버랩하는 거트루드 스타인 등에 친숙해지는 것도 좋은 선택일 거다.


*최근에 국내에도 소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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