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롤리타> - 험버트처형기계, 혹은 예술가 놀이 프로젝트- 블라디미르 나보코프




험버트 험버트는 분명 용서받을 수 없는 악인이지만, 작품 외적으론 생각해본다면 동정 받을 여지는 충분하다. 그에게 원죄가 있다면, 철저하게 가짜 예술가들을 처형시키는 나보코프의 세계에 태어났다는 사실 자체일 거다. 그를 괴물로 만든 님펫-소아성애나 가짜 예술가 행각이나 모두 가짜를 처형시키기 위하여 철저하게 짜인 한 인간의 악의로 가득찬 놀이의 일부에 불과하다.

나보코프의 상당한 작품들은 얼핏 데카당트 문학의 탈을 쓴 것 같다. 예술가들이 등장하고 저마다 자신의 예술을 위하여 모든 것을 희생하며 몰두한다. 도덕이나 통념 같은 것은 장애물에 불과하다. 말 그대로 예술을 위한 예술을 울부짖던 시절을 얼핏 떠올릴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는 나보코프의 기만이며 독자를 속이기 위한 첫 번째 퍼즐에 불과하다. 그의 세계에서 예술가들은 거의 빠짐없이 조롱되고 파멸된다. 이는 데카당트의 예술을 위하여 모든 걸 불사르는 장엄한 예술가의 죽음과는 다르다. 애당초 <롤리타>의 ‘예술가’로 지목된 험버트 험버트는 그 이름에서부터 작가의 조롱을 우리는 느낄 수 있다.

<롤리타>가 오늘날 나보코프의 대표작으로 자리 잡은 것엔 이러한 그의 악의적인 놀이가 제일 악랄한 방향으로 발전되었기 때문일 거다. 험버트 험버트의 처형과 비교될 만한 나보코프의 사례는 ‘페일 파이어’를 둘러싼 존 쉐이드와 찰스 킨보트의 우스꽝스런 놀이 정도일 거니까.

물론 누군가는 이 소설이 ‘소아성애’를 다루고 있다는 점이 충격적이란 점을 꼬집을 거다. 그에 대한 답은 간단하다. 애당초 그러한 요소 자체부터가 나보코프의 악의적인 놀이의 시작이다. 이 수수께끼로 가득 찬 책은 시종일관 독자를 시험하고, 또 시험한다. 

충격적인 소재에 혹여 관심을 가진 독자는 이러한 관심을 나보코프 본인이 조롱하듯 험버트의 혓바닥으로 이루어진 장대한 고백록과 마주하게 된다. 누군가는 험버트의 화려한 말과 자기변명 속에서 자신도 모르게 이 끔찍한 괴물에게 연민을 느끼거나 롤리타를 원망할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러한 속은 자들의 ‘어리석음’을 비웃듯 나보코프는 애당초 고백록 곳곳에 험버트란 괴물의 악행을 이리저리 숨겨두곤 그걸 발견하지 못한 이들을 다시 조롱한다. 이는 실로 악랄하기 그지없다. 그의 속임수에 빠지는 것은 어리석음의 산물이라기보다는 나보코프 본인의 정교한 덫이니까. 설령 이러한 나보코프의 시험에 빠지지 않은 숙련된 독자라 할지라도 험버트와 롤리타의 불멸로 끝을 맺는 이 고백록을 맞이하고, 나보코프의 의도적인 후기까지 읽은 후에도 여전히 풀리지 않은 무언가에 고민할 수밖에 없다. 그의 독자를 향한 악랄함은 거의 증오의 영역이지 않을까 의심될 정도다.

그러다보면 자연스레 이런저런 해석들에 고개를 모두 끄덕일 수밖에 없게 된다. 이 소설 속에서 볼 수 있는 유럽의 이방인의 시선으로 나타난 미국의 정경이라든가. 그러나 그러면서도 여전히 충격적이고 불쾌한 내용 덕분에 우리는 고민하게 된다. 과연 내가 생각한 바가 나보코프의 술수에 놀아나는 것일까, 아니면 그의 허점을 찌른 것일까? 그런 의문을 풀려는 노력을 하기 위해선 어찌되었든 우리는 이 정교하고 악의적인 놀이에 동참해야한다.

물론 이 책의 방식 덕분에 더더욱 수수께끼를 푸는 것은 난해해 보인다. 거의 대부분의 분량은 험버트의 입을 통해서만 전달되며, 그의 고백록 속엔 오직 험버트만이 있을 뿐이다. 양부에게 희생당한 돌로레즈 헤이즈는 없고, 심지어 수수께끼 같고 역시 추악한 퀼티마저도 없다. 더군다나 예술가로서 자부심으로 똘똘 뭉치고, 오만한 나보코프가 제시하는 힌트들조차 친절하진 않다. 일반적인 독자가 연구자들의 노력으로 이루어진 주석들을 참고하지 않고, ‘비비안 다크블룸’이 나보코프 본인의 에나그램이라든가, 이런저런 퍼즐들을 알아맞히기란 쉽지 않은 법이다. 

하지만 역시나 나보코프의 세계를 풀기 위한 가장 기초적인 사실은 이 모든 것이 하나의 놀이라는 점이다. 체스를 두거나 카드 게임을 하거나 수수께끼를 푸는 것. 하나하나는 난해하고 때때로 즐거움을 주기도 하지만, 게임이 끝나면 말 그대로 끝이다. 

그리고 그러한 게임을 조종하고 지배하며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하나 짜낸 것은 험버트가 아닌 나보코프다. 이 점이야말로 험버트의 우스꽝스러운 점이자 그에게 있어 크나큰 비극일 것이다. 그가 자신을 변명하고자 만든 고백록조차 그가 아닌, 나보코프의 손으로 대리 집필된 놀이이며 이미 자신의 불멸을 증명하려는 고백록조차 그 이전의 시작 부분에서의 험버트와 롤리타의 죽음을 고하면서 조롱된다.

이러한 정교하게 짜인 퍼즐을 풀고 난 후엔 대체 무엇이 있는가? 사실 무언가가 남기를 원하는 것은 이상할지도 모른다. 우리는 체스를 마치고 수수께끼를 마치고 나서 무언가 남는 것을 바라지 않는다. 그저 그 과정에서의 고난과 즐거움을 원할 뿐이니까. 그 후에 남는 것은 각자 자신만의 몫이겠지만, 사실 나는 개인적으론 이러한 놀이 자체가 그 의의라고 여기는 쪽이므로 아무래도 상관없다. 아무 것도 남지 않는 것처럼 허무함을 느끼더라도 그 과정은 무척이나 재밌다. 작품 속 퍼즐을 몰두하고, 나보코프와 대결하며 때론 험버트라는 괴물을 이리저리 궁리해보거나 그가 숨긴 진짜 돌로레즈 헤이즈나 다른 현실을 찾아보려는 시도들 하나하나가 재밌다. 그 점이 이 작품을 오늘날 나보코프를 불멸로 만들어준 요인일 테니까.

물론 나보코프 개인적으로나, 혹은 이러한 잔혹한 처형기계의 목적을 생각해본다면, 그 답은 조금은 단순할지도 모른다. 이 놀이의 목적은 무엇인가? 어째서 이 나비 수집가는 정교하고 잔인한 처형기계를 만들어 가짜 예술가들을 조롱하고 처형시키는가? 어째서 가짜를 죽이는가? 이는 당연히 진짜를 위해서다. 그런 의미에서 가짜들을 처형시킴으로서 자신만이 진짜임을 증명하려는 이 정교한 처형기계는 분명 오늘날까진 성공적이라고 평할 수 있다. 그리고 그 진짜는 나보코프의 세계 아래에서 나보코프 본인의 의도대로라면 역시나 유일하고도 진실 된 예술가, 나보코프 한 사람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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