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 존 쉐이드, <창백한 불꽃> - 그림자 해석하기 프로젝트- 블라디미르 나보코프



이번에 읽은 존 쉐이드라는 이름의 다소 생소한 시인의 마지막 유작이라는 <창백한 불꽃>은 문학동네에서 번역되었고, 그 제목과 두께 때문에 먼저 손이 간 기이한 책이었다. 별도의 정보 없이 무턱대고 책을 펼쳤는데, <창백한 불꽃>은 그의 미완의 원고를 정리한 ‘서사시’와 그의 친구이자 편집자로서 이 원고를 정리한 찰스 킨보트의 주석들로 구성되어있고 이는 당시 미국에서 출판된 형식 그대로라고 한다. 

기이하게도 시 자체는 999행의 미완의 시였지만, 그 주석의 분량 때문에 시집치곤 무척이나 두꺼웠다.



5-60년대 미국에서 활동했다는 이 시인은 당대의 대가였던 로버트 프로스트류의 시인이라는데, 그런 배경을 알고 나서 읽은 탓인지 시인의 자연물을 이용한 다채로운 비유들이 우선 눈에 들어왔다.



물론 존 쉐이드의 이 기묘한 장시는 얼핏 보기엔 전통적이고 때론 단조로운 부분도 없지 않아 있다. 그러면서도 T.S. 엘리엇의 시들을 패러디하고 교묘하게 조롱하는 면 등은 현대적이게 보이게도 한다. 



<태양은 도둑이야, 그의 거대한 장관으로

광대한 바다를 강탈하지. 달도 순전히 도둑에 불과해,

그녀의 창백한 불꽃은 태양으로부터 낚아챘지.>

- 윌리엄 셰익스피어, <아테네의 티몬(타이먼)>



존 쉐이드가 아마도 제목으로서 인용한 인간혐오자 티몬의 대사는 말 그대로 이 시의 성격을 나타내는 듯싶다. <창백한 불꽃>은 결국 삶의 그림자를 탐구하며 자신에게 있지 않은 것을 교묘하게 훔치려는 한 삶의 회고록이다.



<나는 죽은 여새의 그림자였다.

창유리에 비친 거짓 창공에 속은

나는 잿빛 솜털의 얼룩이었다 – 그럼에도 나는

계속 살아서 날아다녔다, 창유리에 비친 하늘에서.

집안에서도 마찬가지, 나는 둘로 만들곤 했다

나 자신을, 나의 램프를, 접시에 놓인 사과를.

-p.39, 창백한 불꽃>



존 쉐이드는 시의 시작을 다채롭고 교묘한 비유들로 독자의 시선을 혼란스럽게 만든다. 이러한 화려한 비유로 우리는 쉐이드가 말 그대로 '그림자', 그것도 죽은 이의 그림자에 불과하며 모든 것을 '만들어야했음'을 알 수 있다.



<나의 신은 요절했다. 신을 숭배하는 것은

굴욕이며, 숭배의 전제도 부적절하다고 여겼다.

자유로운 인간은 신이 필요 없다. 하지만 나는 자유로웠던가?

-p.44, 창백한 불꽃>



형식을 제외한 주제나 그 표현만으로도 사실 <창백한 불꽃>은 괜찮은 시가 될 수 있을지 모른다. 이 시의 핵심적인 주제 중 하나는 결국 살아가는 그림자의 피할 수 없는 죽음에 대한 성찰이다. 물론 여기엔 전적으로 쉐이드의 가정사가 깊게 관여되며 자연스럽게 죽은 황여새의 그림자는 자신의 삶을 토로하는 고백록을 작성한다.



<나는 죽은 여새의 그림자였다

창유리에 비친 허위의 먼 풍경에 속은

나는 두뇌도, 오감(그중 하나는 남다른)도 있었다.

그러나 그것 말고는 그저 굼뜬 괴짜였다.

-p. 45-46, 창백한 불꽃>





<삼단논법: 다른 사람들은 죽는다, 하지만 나는

다른 사람이 아니다, 그러므로 죽지 않는다.

공간은 눈 속에서 벌레처럼 들끓고, 시간은

귓속에서 노래를 부른다. 이 북새통에 내가

갇혀 있다.

-p.50, 창백한 불꽃>



그러나 창백한 불꽃을 써내려가는 존 쉐이드는 아직은 죽음과 마주하지 않았기에 결국엔 내내 삶에 대해 이야기할 수밖에 없다. 이러한 기묘한 사실은 그가 시의 마지막 부분에 와선 시를 쓰고 있는 자신과 마주하고, '999행'을 써내려갔을 때 실제로 불행한 죽음을 맞이했다는 점에서 작품 외적으로 더욱 아이러니하게 만든다.

이 책의 주석을 단 쉐이드 연구가 킨보트에 의하면, <창백한 불꽃>은 1000행으로 구성될 예정이었고, 그 마지막 행은 이 시의 첫 행과 같은 구절로 마무리될 예정이라고 한다. 하지만 이쯤에 와선 과연 쉐이드가 그 마지막 행을 불행한 사고가 없었어도 붙였을지 의문이 든다.

애당초 죽음이 오기 전의 삶에 관한 시라면, 그의 의도에 따라 미완이 될 수도 있지 않았을까?



이런 점을 고려할 때  (더 많은 부분도 고려의 대상이지만) <창백한 불꽃>은 한국 독자들에게 다소 생소한 50년대 미국 시인의 최후의 불꽃 그 자체로서도 충분히 즐길만한 멋진 장시가 될 것이다.



하지만 이 책의 본문인 <창백한 불꽃>만의 감상은 여기까지고, 난 책 외적인 부분에 대해서도 이야기하고 싶다.

두꺼운 분량의 주석을 차지하는 만큼, 난 이 시가 무척이나 난해하거나 레퍼런스적으로 흥미로운 면이 가득한 줄 알고 킨보트 박사가 붙인 주석을 하나하나 따라가 보았다.

그런데 읽을수록 이 책의 자칭 연구가는 시와는 관련 없는 이상한 소리를 하고 있었는데, 굳이 이런 부분까지 국내 번역판에 소개를 했어야했는지 의문이다. 

주석이란 무엇인가? 결국은 작품에 관한 해설이자 설명이고, 작품 없이는 존재할 수 없는 존재다. 

물론 킨보트 박사가 말 그대로 지껄이는 기이한 말들은 간혹 흥미롭기도 하였지만, 시와는 전혀 무관하였다. 차라리 자신만의 작품을 따로 쓰지, 괜히 남의 작품의 그림자에 숨는 짓은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시는 나쁘지 않았지만, 나머지 부분에선 책과 상관없었으므로 너무나도 별로였다. 이쯤되면 킨보트 박사가 과연 저명한 존 쉐이드 연구자인지도 의심이 될 정도로.

아무튼 존 쉐이드의 다른 시집들도 소개된다면 읽어볼 의향은 있다. 물론 킨보트의 주석이 없는 녀석으로!




















물론 이 책이 ‘시집’이고, 이 책의 저자가 정말로 존 쉐이드였다면 위와 같은 감상은 타당했을지도 모르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창백한 불꽃>은 킨보트의 서문, 쉐이드의 시, 킨보트의 주석과 미주로 구성된 나보코프의 소설이다.

개인적으로 이 책을 처음 읽은 이후론 많은 이들이 그러하듯 가장 사랑스러운 나보코프의 최고 걸작으로 남아있었는데, 드디어 문학동네에서 한국어역본으로도 다시 한 번 읽어볼 기회가 생겨서 무척이나 기뻤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독자인 내가 아는 나보코프라면, 과연 이 감상을 쓰는 것이 옳은지, 조금 회의감이 들기도 한다. 내가 아는 나보코프라면, 고고하게 홀로 진짜 예술가로서 밑을 내려다보고, 독자들을 그리 달가워하지 않으며 특히나 킨보트 같은 독자들을 비웃을 테니까.

하지만 나 또한 수많은 킨보트들 중 한 명으로서 그라두스를 기다려야하지 않겠는가?



처음 이 책을 읽었을 때는 자연스럽게 나보코프의 또 다른 걸작이자 악명 높은 <롤리타>와 겹쳐서 읽었던 기억이 있다. 정교하게 가짜 예술가였던 험버트 험버트와 퀼티를 처형시키는 나보코프의 그림자 아래에서 <창백한 불꽃> 또한 가짜를 처단하는 진짜 작가 나보코프의 놀이로 해석했다.

물론 지금도 이 해석 자체는 어느 정도 진짜 불꽃에 가깝지 않을지, 그렇게 킨보트로서 생각해본다. 나보코프의 세상 속에서 오로지 진실 된 진짜 천재, 참된 재능을 가진 예술가는 오직 나보코프 자신뿐이며 그의 수많은 놀이들은 자신이 진짜임을 증명하기 위하여 수많은 가짜들을 처단하는 놀이와도 같다.


분명 찰스 킨보트는 그러한 수많은 가짜들 중 하나일지도 모른다. 이미 <창백한 불꽃>이라는 제목, 희미한 불꽃에서부터 나보코프의 웃음소리가 저 너머에서 들려오는 듯하다.

앞서 시에 대한 감상에서도 언급했듯 ‘Pale Fire’는 인간혐오자 타이먼의 대사에서 따왔고, 원본의 대사에서부터 태양의 불꽃을 훔쳐야 빛날 수 있는 달과 같은 킨보트를 조롱하는 듯하다.

킨보트는 서문에서부터 자신만만하게 자신의 예술성을 보이고자 한다. 그는 존 쉐이드를 조종하여 자신에 관한 시를 쓰게 만든다고 믿으며 그의 참된 이해자라고 믿는다. 따라서 킨보트의 주석은 킨보트의 관점에서는 <창백한 불꽃>을 진정으로 완성시키는 길이 되며, 그 자체로서도 빛나는 예술작품과도 같다.

하지만 그의 주석을 읽는 우리 독자들은 결국 본질적인 문제에 계속 긴가민가할 수밖에 없다. 과연 주석은 그 자체로서 있을 수 있는가? 과연 그림자는 원본이 되는 물체 없이 있을 수 있는가?

안타깝게도 그럴 수 없을 것이다. 자연스럽게 킨보트의 우스꽝스런 자만과 망상은 마치 존 쉐이드의 시처럼, 유리창에 비친 가짜에게 홀려서 죽어버린 여새의 비극이 되어버린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소설로서 <창백한 불꽃>을 다시 한 번 생각해보면 조금은 달라질지도 모르겠다.

이미 험버트의 추악한 고백록에 익숙한 나보코프 독자들이라면 알겠지만, 결국 우리의 킨보트 박사의 장대한 고백 또한 우리 독자들은 믿을 구석이 하나도 없다. 그렇다면 자연스럽게 우리는 나보코프의 놀이 속에서 모든 것을 의심할 수밖에 없게 된다.

킨보트는 분명 ‘거짓말’을 하고 있어 보인다. 그렇다면 어디까지가 그의 거짓말인가? 애당초 존 쉐이드는 정말로 있는 것일까? 그의 이야기들은 진실인가, 아니면 정말로 망상에 불과한가? 그가 ‘킨보트’는 맞는 걸까?


한때는 수수께끼 같은 장시 <창백한 불꽃>의 저자가 킨보트 혼자가 아닐지, 생각해본 적도 있지만, 이번에 읽으면서 그 생각은 바뀌었다. 다시 읽어본다면 또 다시 바뀔지도 모르고, 그것이 나보코프의 놀이 과정이겠지만, 아무튼 지금은 그렇다.

결국 이 책은 킨보트를 향한 희비극인데, 킨보트의 본질은 진짜가 되고 싶은 그림자이며 따라서 <창백한 불꽃>의 주석을 쓰면서 자신이 진짜 <창백한 불꽃>의 저자가 되려는 웃-픈 노력이 곧 킨보트 그 자체니까. 그가 시의 저자라면, 애당초 이런 노력은 무의미할 것이다. (물론 그런 무의미함을 조롱하려는 것이 나보코프의 의도라면, 나 또한 킨보트처럼 조롱당하고 있겠지만)



걸작이 그러하듯 사실 이 책도 너무나도 다양한 방식으로 읽고, 즐길 수 있다. 대표적으론 역시 나보코프의 수수께끼를 풀고자 노력하는 것일 거다. 과연 이 책 속 진실은 무엇이며, 킨보트의 주석 속의 진짜 이야기는 무엇인지, 때론 나보코프가 주석 읽는 방식이나 색인의 숫자들을 따라가며 말 그대로 퍼즐을 맞추듯 새롭게 읽어볼 수도 있다.

하지만 단순히 그런 수수께끼들만 있다면 이 책의 매력은 반으로 줄어들 것이다.



이 책이 내게 너무나도 사랑스럽고, 애처롭게 느껴지는 것은 역시나 이 책이 이 책을 읽는 우리들과 너무나도 닮았기 때문일 거다.



킨보트가 자신이 쉐이드의 진실 된 이해자라고 스스로 생각하고, 그의 작품들의 온전한 권리가 있다고 망상에 빠지며 자신이 그의 작품에 큰 영향을 끼치고, 자신이 원하는 방식대로 쓰이고 있다는 망상은 분명 나보코프의 시선엔 비웃음의 대상일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결국 이러한 ‘과장’은 으레 우리 독자들이 좋아하는 작가에게 하는 방식과 흡사하지 않은가? 

또한 이 책, 시와 주석, 그리고 모든 것을 읽어 내려가는 과정 속에서 독자가 각자 이 이야기를 받아들이는 방식은 흡사 킨보트가 자신만의 주석을 써내려가는 것과 마찬가지일 거다. 좋은 책을 읽으면서 자신도 이런 글을 쓰고 싶고, 이런 작가가 되고 싶다는 생각을 안 해본 독자가 있을까? 누구나 킨보트처럼, 자신이 더는 그림자가 아닌 불꽃이 되고 싶은 마음은 한구석에 있을 거다.


물론 이러한 방식에서 여러 의문점들은 그대로다. 킨보트가 우리 자신들이라면, 쉐이드나 그라두스는 어떠한가? 쉐이드의 경우 우리가 사랑하는 작가라고 해보자. 물론 그마저도 만족스럽진 않지만, 아무튼 그보단 그라두스를 생각해보자.

지금 이 순간마저도 그라두스는 의문투성이다. 그의 이야기나 그라는 인물의 매력이 떨어져서가 아니다. 그럼에도 그는 대체 무엇일까?

한 편으론 이런 생각을 해본다. 그라두스조차 킨보트의 망상세계, 혹은 그림자 세계에서 변형된 가짜라도, 결국 킨보트의 주석의 끝은 그의 등장으로 끝나버리게 된다.

그라두스와 쉐이드, 킨보트의 만남으로 킨보트는 여전히 자신이 불꽃의 그림자에 불과하다는 걸 깨닫고, 잠시 동안 약간의 진실을 보여주는 듯 보인다. 그리고 그는 새로운 그라두스를 기다리며, 그 기다림이 끝날 때 어떤 방식으로든 모든 것은 끝날 것을 예고한다.

이런 점에선 그라두스는 말 그대로 끝이 아닐까? 어떤 매력적인 이야기라도, 설령 그것이 미완이라도 우리는 마지막 페이지와 마주해야한다. 그 이후에 우리가 여전히 그림자든, 아니든, 다른 이야기를 찾든, 현실로 돌아가든, 끝을 마주해야한다. 마치 존 쉐이드가 자신의 시를 통하여 죽음과 마주하듯.


사실 킨보트로서 이 책의 마지막, 색인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젬블라 – 머나먼 북쪽의 나라’는 흡사 러시아 혁명으로 망명자가 될 수밖에 없었던 나보코프 개인의 향수처럼 느껴진다. 그런 점에서 드문드문 이 책은 나보코프 개인의 삶에 관한 어떤 주석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 또한 킨보트이며 그러한 존 쉐이드-나보코프가 원하는 방식대로 주석을 달진 않을 것이다.  



물론 우리의 오만하고, 질투할 수밖에 없는 나보코프의 시선엔 이러한 감상 자체는 쓸데없는 그림자의 날개짓이며 진짜가 되고 싶은 킨보트들의 그림자는 무의미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아무래도 좋다. 그러면서도 우리 킨보트들은 계속 그라두스를 기다릴 것이다. 창유리의 비친 하늘 속이라도 계속 날아다니고 싶기에, 그림자라도 진짜 불꽃이 되고 싶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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